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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503화 (1,501/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503화

소실(13)

정확히 어떤 이유로 갈등을 맞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 이것보다 더한 희소식은 없을 것이다.

미카엘이 스스로를 희생하기 위해 가장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 바로 미켈레가 아니었던가.

애초 미카엘이라는 캐릭터가 쓸데없이 원리원칙과 옳고 그름을 중요시하는 녀석이었던 터라, 본인이 갈려 나갈 때 미켈레를 역시 갈려 나갈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 굳이 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아졌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당장 쓰레기 같은 내구도 역시 미켈레의 의식을 남기는 과정에서 일어난 헤프닝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기왕 갈려 나갈 거 불순물이 섞여 있는 재료보다는 순수한 덩어리가 더욱더 가치가 높을 것이라는 건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먹어야 돼.’

미카엘이 미켈레를 먹어야 한다. 완전히 미켈레의 몸을 탈취해야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각오가 설 것이다.

또 다른 이벤트를 준비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들기도 했지만….

‘이미 지들끼리 치고받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자너.’

-이건 당신이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무한한 삶을 살아가는 초월자에게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당신이 알 수 있을 리가 없겠지요.

‘아 그게 중요했어? 아… 나도 몰랐자너.’

-당신 차원에 있는 지식으로 재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영혼이 연결되어 있는 두 사람이 서로를 잊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겁니까? 잊지 마십시오. 이미 당신도, 저도 한 번의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아주 잘하고 있자너.’

-우리 모두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이 말입니다. 당신도, 저도 절대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 아주 잘하고 있자너.’

-…….

‘정신분열 제대로 터졌자너.’

-…….

-…….

-후우…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미켈레.

‘벌써 끝이냐고.’

결과가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녀석의 눈깔이 살짝 돌은 것처럼 보이는 게 시야에 비쳐온다. 어떻게 첫술에 배부를 수 있을까.

‘아마 조금씩 조금씩, 진행 중일 거야.’

행복회로를 돌리는 것이 아니다. 대충 돌아가는 분위기만 보고 있더라도, 이미 도화선에는 불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천천히 타들어 가고 있는 모습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진다. 종국에는 미카엘이 미켈레를 완전히 져버릴 것이라는 걸 확신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녀석에게 쓸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으니 초반에 이벤트를 몰아서 한 것이 효과가 있었던 셈이었다.

조금 더 다른 쪽에 집중해도 괜찮은 타이밍이었다는 거다.

‘이를테면 여기.’

김창렬이 보내온 편지 같은 것 말이다.

슬쩍 편지를 꺼내자 익숙하다면 익숙한 필체가 시야에 비쳐오기 시작했다. 사실 편지의 내용에 대단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곧 하연수가 나를 돕기 위해 캐슬락으로 출발할 거라는 것.

김창렬이 선희영을 통해 외팔이 신세를 벗어났다는 것.

녀석들 역시 게이트를 타고 지금 보다 몇 년 전 시점에 도착해 이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와해될 뻔한 정보 길드를 다시 키우고, 현재까지 린델에서 머무르며 드잡이질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녀석들이 찾고 있는 게 이쪽뿐만이 아니었던지라, 김현성의 행적에 대한 조사 보고서도 쓰여 있기는 했다. 별다른 성과가 없는 것이 문제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물론 정보 길드는 계속해서 헤르엔을 비롯해 김현성이 출몰지역에 대기하고 있는 중, 심지어 김창렬과 알프스는 다시 임무를 위해 홀로 대륙을 거닐고 있단다.

지난 추격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고, 우연이 겹치기는 했지만 김현성을 직접 쫓기도 했으니 지난번보다 더 발견할 확률을 높게 보고 있는 것이다.

‘창렬이가 같이 움직이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기는 해.’

일단 열외자가 한 명도 없이 모두 무사하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중에서도 김창렬의 팔이 붙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떨어진 지 너무 오래돼 제대로 붙었는지 걱정했었는데, 무사히 딱 달라붙은 모양, 결혼 축하 선물로 유아영에게 외팔이 신랑을 데리고 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얘들은 무사하고… 이제 교통정리 할 시간이자너.’

정확히는 시점에 대한 정리였다.

지금에 와서 정리할 게 뭐가 있나 싶기도 했지만 꼭 확인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다.

‘본격적으로 외신전쟁이 수면 위로 터지기 전에….’

린델에 색욕과 영면의 군주가 강림하지 않았던가. 1회차의 이기영이 색욕과 영면의 군주를 기억하고 있는지, 그날 이후에 1회차의 역사가 어떻게 변하고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 1기영이 현자의 돌을 만든다고 설치고 다닌 이유가 거기에 있는지 전부 확인을 해야만 했다.

혹시나 오류로 튕겨 나간 이후에 모든 게 없었던 일이 된 게 아닌가 싶기는 했지만….

‘그건 아니었자너.’

린델에서 커다란 전투가 있었다는 소식 정도는 여기서도 주워들을 수 있었다.

내가 정하얀을 살리기 위해 계속해서 게이트를 이동하며 시간을 되돌린 것도, 1기영이 그것을 깨닫고 본래의 역사와는 다르게 린델로 총공세를 펼친 것도, 그 과정에서 빅보이가 죽은 것도, 그 과정에서 색욕과 영면의 군주가 강림한 것도, 내가 튕겨 나간 것도 모두 이미 일어났던 일이다.

슬그머니 다시 한번 편지에 시선을 옮긴 것은 당연지사. 김창렬의 필체로 쓰여진 편지에는 내가 궁금했던 정보들이 혹은 요청하지 않았던 정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정하얀이….

“…….”

“…….”

‘살아 있었다고…?’

“…….”

“…….”

빅보이 패밀리가 나와 그녀를 보호해 주기는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에는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치료를 받고 살아났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본래의 역사대로 목을 매달았단다. 괜스레 입안이 쓰다. 그녀를 살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떠난 뒤에 쭈욱 마탑에 혼자 지냈을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색욕과 영면은….

“…….”

“…….”

‘기억하지 못하고 있네.’

“…….”

“…….”

아무래도 갑작스레 튕겨 나간 보정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스템이 아예 자체적으로 색욕과 영면의 강림 사실을 없었던 일로 치부하고 있는 모양, 물론 김창렬의 편지에 적혀 있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일반인 기준이다.

그들이 떠올리고 있는 그날의 역사는 인류가 외신에 저항해 린델을 사수하며 그들을 몰아냈다는 것이란다.

실제로도 그날의 기억을 제법 생생하게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성검용사와 달빛을 따르는 자들이, 신 흑장미 살롱과 소규모 이 종족 원군들이 린델에 나타나 그들을 도와주었다던가. 한낱 헛소리라고 모두가 같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터라….

여기에서는 역사가 바뀌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내가 과거 시점부터 굴린 스노우볼이 린델로 굴러와 방어선을 사수하도록 한 것이다.

아마 그들이 도착한 건 내가 역소환된 다음이지 않을까. 색욕과 영면의 강림 당시 하늘에서 뒈지면서 후두둑 떨어지는 이들에 대한 기억도 전부 사라진 모양이다.

1기영과 비둘기들은….

“…….”

“…….”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 하기사… 그럴 수밖에 없겠네.’

“…….”

“…….”

대체적으로 색욕과 영면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1기영과 비둘기들마저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애초에 비둘기 놈들은 회귀 사실을 기억하고 있기도 했고, 앞서 말했듯이 1기영 역시 내가 정하얀을 살리기 위해 계속해서 역사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전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색욕과 영면이 없었던 일이 된 것은 시스템의 억제력이었지만, 아마 세라핌 같은 개체들은 이 억제력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벨리알과 계약한 것으로 추정되는 1기영 역시 마찬가지. 어쩌면 안개가 낀 듯 흐릿한 잔상 정도는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현자의 돌을 만들겠다고 설치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약간이나마 기억하고 있을 확률이 높기는 해.’

녀석이 회귀가 가능하다고 깨달은 것은 나 때문이기도 했고, 그때 이후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찾아 헤맸을 테니 말이다.

기억도 온전하지 않고, 2회차의 자신, 즉 색욕과 영면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으니 아마 본인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 설치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다가 결론에 다다른 게 바로….

‘애들 갈아서 만드는 소원의 돌이라는 거냐고….’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가기도 한다.

녀석이 대뜸 까마귀로 내게 현자의 돌에 대해서 떠봤던 이유가 말이다.

그리고 그 돌을 어째서 현자의 돌이라고 부르는 건지도… 전부 이해가 간다.

그야 현자의 돌이라는 건 실체가 없지만서도… 어떤 기적이라도 일으킬 수 있는 물건이라는 인식이 강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연금술로 만든다는 인식이 퍼져 있기는 하지.’

녀석은 내가 떠난 이후에, 정확히 색욕과 영면에 대한 흐릿한 기억과 위화감을 느낀 이후에 아마 뒷조사 아닌 뒷조사를 하고 다녔을 것이다.

단언하건대 쥐 잡듯이 대륙을 뒤지고 다녔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자기 안에 있는 위화감이 풀어지기 전까지, 계속해서, 계속해서, 과거에게서, 현재에게서,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 대해서 정보를 얻고자 설치고 다녔을 것이다.

색욕과 영면을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다른 이들에게 닿는 것은 아마 어렵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과거 차희라와 만난 시간 여행자, 빅보이 패밀리와 함께 나타난 마탑의 실험 노예, 정진호의 죽음을 지켜본 어린 죽음, 헤르엔에서 김현성을 끄집어내 준 붕대를 감은 소년, 정하얀을 따르고 그녀와 함께 다니던 꼬마 마법사. 흑장미 살롱에 불씨를 불어넣어 준 아이나 페넬로티, 달빛을 따르는 자들의 성검용사가 믿고 따르는 달빛의 성자. 그리고 색욕과 영면.

특정 시간대에 나타난 오류와 이레귤러들, 본인의 계산에 없이 나타난 것들.

여러 가지 신분 중에 무엇에 닿았던 것인지는 나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작정하고 뒤지고 다녔다면 저 모든 게 동일인물이고, 2회차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개인적인 정보도 모으고 다니지 않았을까. 만약 2회차의 자신이 흑마법사가 아닌 연금술사를 베이스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면….

‘현자의 돌을…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

아니.

‘확실히 있어.’

시간여행자이자, 회귀자이자, 2회차에서 온 이기영은 연금술사였으니까.

육망성 게이트니 뭐니, 대륙의 개연성을 부과하는 과정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녀석이 알 리가 없다.

아니, 설사 육망성 게이트에 대해서 눈치채고 있다고 해도 그게 2회 차 대륙에 문제 때문에 생긴 바이러스라는 사실을 추론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당장 우리 쪽 애들도 육망성에 대해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판국에 이 새끼가 뭐라고 게이트에 대해 판단할 수 있겠는가.

결국 2회차의 이기영이 특정한 방법을 통해 시간 여행을 하고 다닌다면… 그런 기적 같은 일을…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고 다닌다면….

‘실체가 없는 현자의 돌이 그 기적을 일으키는 물건이라고 생각했었던 거구나….’

“…….”

‘그랬던 거야… 2기영은 이미 현자의 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건가? 그래서 계획을 수정하고, 인간과 외신들을 갈기 시작한 거야. 자신도 만들 수 있어야 했으니까.’

“…….”

‘그래서 진청으로 위장한 채로, 나를 떠봤던 거야.’

“…….”

당연하지만 녀석은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

물론 나도 녀석을 신뢰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한다니 그것보다 멍청한 행동은 없을 테지만, 적어도 우리 같은 인간들이 터놓고 과거의 자신과 대화하는 것은 때려죽여도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 진 군사도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지혜 누나도 마찬가지.

물론 이전에 나 자신을 믿음으로써 득을 본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진 특수한 케이스였다.

평소 같은, 아니, 내가 만약 1기영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의 내가 원하는 것과 미래의 내가 원하는 것이 같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내가 회귀하는 것을 원한다고 해서, 미래의 내가 회귀하는 걸 원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타인보다 더욱더 믿기 힘들 것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너무나도 쉽게 변한다는 사실을 나나 녀석이나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 떠보고 있는 거야.’

내가 자신을 도우려는 온 것인지, 아니면 방해하려는 것인지, 우리가 적인지, 아군인지. 제거하는 것이 이득이 될지, 제거하지 않는 것이 이득이 될지.

“…….”

“…….”

사실 딱히 녀석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내가 녀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사실 녀석 덕분에 갑작스레 잊을 뻔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 이 새끼가 죽였지….

‘이 새끼가 죽였어.’

물론 1회차와 2회차는 분리되어야 한다. 지혜 누나와 베니고어에게 별 것 아닌 설교를 계속해서 들었던 것이 엊그제 같지만….

‘1기영을 지금… 살릴 필요가 있나?’

현시점에서 나는 굳이 1기영이 살아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진 군사의 손목을 걸고 말하건대 단순한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내가 녀석의 역할을 대신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일단은….

‘현자의 돌을 가지고 있는 척이라도 해야겠는데.’

슬그머니 망원경을 켜자, 까마귀 몇 마리가 캐슬락을 맴도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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