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04화
소실(14)
슬그머니 망원경을 켜자, 까마귀 몇 마리가 캐슬락을 맴도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안개가 흐릿해지기는 했나 보네.’
그동안은 약간의 거리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짙었는데 천관위가 원정을 나가자 캐슬락 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들이 흐릿해진 것이다.
물론 아주 약간 흐릿해진 것뿐이다. 여전히 적들이 캐슬락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까마귀들이 안개 속에서 계속해서 길을 잃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심지어 지난 접촉 이후로 캐슬락에는 저런 종류의 까마귀들에게 민감해진 상태였던 터라 더욱더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내가 진 군사 쪽이랑 이미 접촉했다는 건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을 거고….’
물론 캐슬락 내에 끄나풀이 없을 거라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까마귀의 눈으로 내가 진 군사와 접촉하는 장면을 확인하지는 못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녀석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백 퍼센트 신뢰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이미 접촉했을지도 모른다고 상정할 확률이 결코 낮지는 않다.
‘일단 캐슬락에서는 정보가 제한되어 있으니까.’
미카엘이 내 안전을 신신당부했기 때문에, 캐슬락 내에서도 나에 대한 민감한 정보는 흐르지 않고 있을 것이다.
기껏해야 뭐 공화국의 누군가가, 이를테면 높은 신분을 지닌 자식이 캐슬락 성 꼭대기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보호받고 있다는 것 정도겠지.
미카엘이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도 흐르지 않는 판국에 이쪽이야 오죽할까. 새삼스럽게 내 소재를 파악한 김창렬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정보의 우위를 쥐고 있는 건 당연한 거야.’
아니, 당연해야 돼.
녀석에게는 김창렬이 없고, 내게는 김창렬이 있다. 2회차의 경험으로 전문적인 정보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창렬이었으니, 오랜 시간 동안 인프라를 쌓아온 이곳의 다른 정보 길드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1기영이 어느 정도의 인프라를 구축해 놓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내 예상을 벗어나는 정도는 아닐 것이다.
꼬리를 자르는 와중에 규모가 분명히 축소됐겠지.
“…….”
“…….”
지난번 이후로 계속해서 이쪽과 접촉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녀석 이었던지라 본대가 공화국으로 원정을 떠나는 이번 기회를 놓칠 리 만무, 어쩌면 천관위와 위란 같은 예민한 녀석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공화국으로 병력을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나보다는 녀석이 내게 접촉하는 것을 원하고 있다.
‘목마른 새끼가 우물을 파는 거야. 원래.’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이런 기회를 놓치는 게 바보 같은 거고….’
아니나 다를까.
탁탁.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직 펴보지도 못한 진 군사의 편지를 다시 품 안으로 집어넣은 이후에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자색의 눈동자를 하고 있는 까마귀 한 마리가 시야에 비쳐온다.
‘이럴 줄 알았자너. 현자의 돌 때문에 지금 속이 타들어 가는 거자너.’
곧바로 창문을 열어젖힌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아니, 쓸데없는 질문이었네. 그야 늦은 게 당연하겠죠.”
딱! 딱!
“대체 시바 그 까마귀는 뭐예요? 사역마를 부리기에는 너무 눈에 띄는 거 아닌가? 괜히 의심 사는 짓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덕분에 이쪽 애들이 얼마나 예민해져 있게요?”
“…….”
“공화국에서 일만 안 터졌어도, 아마 들어오지 못했을 거라고요. 안 그래도 안개 때문에 비둘기들도 하늘에서 길 잃고 헤매는 마당에…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시바 그런 사역마를 가져온 건지… 저기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화살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지. 이렇게 쥐새끼처럼 들어온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야.”
“까악! 까아악!”
“아무튼… 군사님 쪽은 린델에 계시겠네요? 그게 아니면 실리아? 아무튼 제국 쪽에 있는 건 확실하시죠?”
딱! 딱! 딱딱!
‘어느 정도 기틀은 마련해 줘야지.’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말이다.
쪼르륵 날아 들어와 방 안을 살피기 시작한 까마귀 한 마리가 계속해서 부리를 딱딱거리기 시작한다.
곧바로 목소리를 내오거나 하지는 않고 있었다. 아마도 너무 깊은 커뮤니케이션은 들킬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 뭐 말투나, 얼토당토않은 내용을 내뱉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거겠지.
“뭐, 들어온 정보는 확실하고요?”
“까악!”
“뭐라 말 좀 해봐요. 딱딱거리고 까악! 까악! 거리지만 말고.”
“…….”
“…….”
“확.실.한.정.보.이.니.믿.어.도.좋.다.”
‘우리 기영이 고생하자너.’
“갑자기 여기서 현자의 돌이라… 현자의 돌… 참 신기하네… 아무렴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서도 이렇게까지 과거가 달라질 수도 있는 건가.”
‘이 새끼 귀 기울이고 있는 것 봐.’
의자에 살짝 걸터앉은 채로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린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기는 했지만 1회 차 이기영이 이쪽 존재를 눈치채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겠네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1회 차의 시간 여행을 하고 있다는 건 알아차린 것 같고… 그 수단이 현자의 돌이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래서… 현자의 돌을 만든다고 설치고 다니는 거 아닐까요? 군사님이 보기에는 어때요?”
“아.마.그.럴.수.도.있.겠.지.”
“현자의 돌을 어떤 식으로 만들고 있는지는 확인했어요?”
“인.간.”
‘그래. 이것도 그냥 주시겠다. 뭐 어차피 뻔한 정보였으니까.’
“굳이 현자의 돌을 만들려고 하는 목적이 뭘까요?”
“…….”
“…….”
“…….”
“…….”
‘잘 대답해야 할 거야.’
터무니없는 대답을 내뱉는 것은 하책이다. 당연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또한 하책이다.
이미 앞선 질문에 대한 대답도 말을 흘리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튀어나온다면 의심을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당연히 하고 있을 것이다.
“회.귀.”
“혹은요?”
“네.놈.이.더.잘.알.고.있.지.않.나.”
‘그래. 아예 정답은 아니지만 괜찮은 대답이기는 하네.’
이미 내가 1회 차에 대해서, 이 대륙에 대해서, 이 서사의 대해서, 본인에 대해서 전부 알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내린 대답이기도 했고, 모든 걸 진청과 공유하지 않았다는 것을 염두에 둔 대답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나름대로 진 군사의 캐릭터에 대해 유심히 고민해 본 모양, 녀석과 내가 갑작스레 절친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내 쪽에서 조금 힌트를 주기는 했지만….
‘잘 받아주자너.’
“왜 이렇게 까칠해요? 혹시 다른 정보 들어온 거 없나 싶어서 여쭈어본 건데. 아니, 진짜로 다른 게 없으면 시바 도대체 여기에 와서 뭘 하고 있었던 건데요?”
“녀.석.이.현.자.의.돌.을.만.들.려.고.하.고.있.다.이.야.기.해.주.지.않.았.나.그.리.고.그.것.외.에.다.른.이.유.가.있.을.리.가.놈.이.뭘.원.하.고.있.다.고.생.각.하.지.”
“박덕구를 살리는 건 불가능할 텐데….”
“그.게.무.슨.뜻.이.지.”
“말 그대로죠. 뭐. 연금술로 사자소생을 시도하든지, 시간 여행을 통해서 과거로 돌아가 돼지 새끼를 구하려고 하든지 간에 두 가지 모두 불가능할 거예요.”
“…….”
“뭐 그쪽은 흑마법에 능통한 것 같으니 사자소생 같은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지가 더 잘 알고 있을 테지만… 저도 한번 해봤잖아요. 정하얀을 살리기 위해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되돌려보기는 했지만 운명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거슬러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이미 2회 차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1회 차의 인물들은 결국 예정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1회 차 이기영이 당시 쓰레기촌으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결국 박덕구는 뒈지고, 1기영은 살아남을 거예요.”
“…….”
“지금까지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선.택.지.는.리.셋.외.에.는.없.다.는.거.군.”
“그건 저야 모르죠. 다른 선택지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지금 당장은 찾기 힘들겠죠.”
“우.리.가.아.직.까.지.존.재.한.다.는.사.실.이.결.국.리.셋.외.에.는.다.른.방.법.이.없.다.는.것.을.설.명.해.주.는.것.이.아.닌.가.”
“글쎄요… 뭐 그 말도 맞긴 하겠죠.”
‘맞아. 그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는 없어. 1회차에서 무슨 일이 있든 간에 2회차에 시간 역설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거든.’
쓸데없이 다른 선택지에 헛물을 켜거나 간을 보는 것 자체를 차단시키는 게 현시점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본다.
이쪽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박덕구의 조각들을 모아 녀석을 소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시간 여행을 통해 놈을 되찾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가능한 건, 오롯이 1회차를 버리고, 2회차를 시작하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야 했다. 그래야 괜한 헛짓거리를 할 확률이 현저히 줄어들 테니 말이다.
1기영 녀석의 아집으로 인해 일이 꼬일 상황을 미연에 방지해야 했다는 거다.
녀석이 납득할 수 있는 정보, 녀석에게도 이득이 되고, 내게도 이득이 되는 정보를 풀고.
본래의 1회차로 향하도록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
“게다가… 현자의 돌이라… 뭐… 아주 틀린 방법은 아니지만….”
‘두 집단이 공멸해야 하는 것도 맞으니까. 굳이 현시점에서 불가능하다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비둘기 쪽 동향은 어때요?”
“공.화.국.쪽.,총.공.세.에.집.중.하.고.있.는.것.같.더.군.”
‘그래? 거짓말 아니야?’
“또.한.북.부.도.함.께.북.부.전.선.은.그.리.오.래.버.티.지.는.못.하.겠.지.물.론.비.둘.기.들.의.피.해.가.아.예.없.지.는.않.다.만.”
‘당연히 그러시겠지.’
“그나마 제국 쪽은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는 건가 봐요.”
“그.렇.게.볼.수.있.을.것.같.다.”
“어차피 급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네요.”
“그.래.나.쁘.지.는.않.지.”
“1회차 김현성 쪽은요.”
“린.델.에.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1기영과 비둘기가 역시 김현성 쪽을 최우선적으로 노릴까요?”
“확.률.이.낮.다.고.말.할.수.는.없.다.”
‘아직 김현성을 회귀시키겠다고 결정하지 않은 시기구나?’
“곤란하네요. 여기서 김현성한테 문제가 생기면 안 되는데… 진 군사님이 잘 케어해 줄 수 있죠?”
“물.론.이.다.”
“…….”
“…….”
‘이거 연극 하는 것 같자너.’
그냥 가설일 뿐이지만, 서로 상대방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냥 적당히 서로의 정보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상대방을 모르는 척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실제로 결코 확률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방을 곧바로 믿기 보다는 일단 의심하는 것이 우리 같은 인간들의 특징이 아니었던가.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해도 그건 딱히 달라지지 않는다. 별것 아닌 대화이기도 하고, 실제로도 티격대고 있기는 했었지만 외줄을 타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하면 체급이 더 커 보일지, 정보를 어디까지 흘려야 할지, 만약 흘린다면 흘렸을 때 내게 가장 이득이 되는 정보인지,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것만 같다.
‘진짜 개 답답하자너.’
이 새끼 진짜… 드럽게 쪼잔하네.
조금만 더 풀지.
진짜 괜찮은 정보는 없고, 그냥저냥 쓸모없는 정보들만 맴돌고 있으니, 사실상 둘 다 시간을 버리고 있는 셈이었다.
눈앞에 있는 까마귀도 이쪽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지, 자색의 눈동자를 계속해서 굴리고 있는 중, 차라리 서로 정체를 까고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렇지.’
이럴 때는 역시 본인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정보를 푸는 것이 맞다. 이쪽은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지만… 녀석이 가장 궁금해 마지않아 하는 그런 정보 말이다.
‘넌 돼지 새끼 없지?’
“…….”
‘난 돼지 새끼 있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싸움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하지만 녀석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정보를 팔아서라도 꼭 듣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2회차 우리 돼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아?’
“…….”
‘난 마음만 먹으면 매일매일 우리 돼지 새끼랑 밥도 먹고, 사우나도 가고, 다 할 수 있어. 기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