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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505화 (1,503/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505화

소실(15)

‘난 마음만 먹으면 매일매일 우리 돼지 새끼랑 밥도 먹고, 사우나도 가고, 다 할 수 있어. 기영아.’

“…….”

‘넌 절대로 못 하는 거, 나는 다 할 수 있다고.’

뭐라고 운을 띄우는 것이 좋을까. 사실 딱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돼지 새끼의 이야기를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것부터가 이 연극이 반쯤은 끝났다는 걸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니 말이다.

대놓고 낚싯바늘을 던져도 녀석의 입장에서는 바늘을 물 수밖에 없을 것이 분명, 당연하지만 박덕구와 카스가노 유노가 이미 1회차를 유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아니, 거의 확실할 것이다. 만약 녀석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여기에 와서 이쪽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을 게 아니라 박덕구를 찾으러 갔어야 했을 테니 말이다.

‘그래 너 잘나기는 했어.’

한편으로는 녀석에게 경외심이 느껴질 정도, 아직 필멸자를 벗어나지 못한 녀석이 약간의 힌트만으로 여기까지 닿을 수 있다는 게 대단하게 느껴진다.

계속해서 시간을 되돌린 것을 눈치챈 것도 놀랍고, 허탕을 치기는 했지만 시간 여행의 촉매가 현자의 돌이라는 걸 깨닫고 그걸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 역시 놀랍다.

곧바로 이쪽의 소재를 파악해 진 군사를 연기하며 까마귀를 보낸 것도, 여러 가지 변수에 모두 대응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이쪽을 직접 떠보려고 하는 것도 놀랍다.

내 입장에서 설명해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아무런 정보도 없었던 외딴섬에서 놈이 이걸 위해 해왔던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자면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1회차의 인물이 결국에는 2회차에 닿은 것이다.

‘그래. 너 진짜 대단한 놈이야. 칭찬해. 아주 칭찬해.’

근데 뭐 어쩌라고. 너 돼지 없잖아.

약점이 너무나도 명확하다.

굳이 머리를 굴릴 필요도, 다른 말을 할 필요도 없다.

“아. 그리고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

“…….”

“시간 역설이 아예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니더라고요.”

“…….”

“1회차에 일어났던 일들이 아무래도 2회차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개 구라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녀석 역시 알고 있다. 시간 역설은 일어나지 않는다.

녀석이 앞서 말했듯이 나와 진청이 이곳에 버젓이 존재한다는 게 그 증거였다.

지금에 와서 시간 역설이 일어나고 있다니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었지만… 운을 띄우는 건 뭐가 되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박덕구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빌드업이었으니 말이다.

“아니, 돼지 새끼가….”

딱! 딱딱! 딱!

‘감정 조절 안 되자너.’

갑작스레 부리를 딱딱거리기 시작하는 까마귀, 심지어 제 자리에서 날개를 털고 있기까지 하다.

“…….”

“…….”

“아니다. 괜히 2회차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군사님 이야기부터 듣는 게 좋겠네요.”

앞으로의 1회차에 향방이 걸린 대담을 하는 것치고는 유치하고 치졸하고 치사한 방법이었지만… 본래 이런 게임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이기는 게 장땡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1회차 이기영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

“…….”

‘돌덩이를 금덩이로 바꾸는 수준의 교환이자너.’

이게 연금술이지 다른 게 연금술이 아니자너. 내가 이래서 연금술사자너.

“확인했을 거 아니에요. 1회차 이기영의 위치. 군사님은 이 정도로 못 알아차릴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잖아. 그치?”

“북.부.”

“아아아아. 북부에 있구나~ 정확히 북부 어디에 있는지도 궁금한데. 역시 아직은 비둘기들이랑 같이 있으려나. 지금쯤 쓰로누스는 감아놨겠죠?”

“아.마.도.비.둘.기.들.과.함.께.있.는.것.으.로.추.정.되.는.군.정.확.한.위.치.는.특.정.할.수.없.다.비.둘.기.들.의.성.은.계.속.해.서.움.직.이.니.말.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어디 있냐고요.”

“발.헤.르.임.”

‘진짜 다루기 쉽자너.’

“아아아. 거기 계시는구나~ 거짓말하면 재미없는 거 알죠? 군사님?”

곧바로 망원경으로 시선을 돌리자 녀석의 말대로 비둘기들의 둥지가 시야에 비치기 시작한다. 도미니온스의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이쪽의 눈을 속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망원경을 가지고 있는 것까지 알고 있나?’

애초에 들킬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건지, 아니면 다른 건 몰라도 돼지 새끼에 대한 건 도박을 하지 않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순순히 핵심정보를 이야기해 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거.짓.말.을.할.이.유.가.있.나.”

“아. 굳이 없기는 하겠죠.”

“또.궁.금.한.것.이.있.나.”

“궁금한 거야 많죠. 너무 많아서 오늘 안에 다 물어보기 힘들 정도라니까요. 1기영이 현자의 돌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도 궁금하더라고요.”

“인.간.이.라.고.말.했.던.것.같.은.데.”

“특별한 공정 과정이 있냐 이거예요.”

“특.별.한.공.정.은.거.치.지.않.는.다.생.명.들.을.모.아.압.축.시.킬.뿐.”

‘까마귀 힘들겠자너.’

“그걸로 안 될 거라는 거. 알고 있는 거겠죠?”

“그.래.서.네.게.접.촉.하.려.고.하.는.것.같.더.군.까악!”

“아이씨! 깜짝이야. 접촉하면, 제가 순순히 공정하는 과정을 알려주기라도 한데요? 설사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그쪽에서 그걸 실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또 다른 이야기잖아요.”

“지.금.은.할.수.있.는.일.을.할.뿐.결.과.적.으.로.이.회.차.가.진.행.될.것.임.을.녀.석.역.시.알.고.있.다.그.방.법.을.지.금.은.정.확.히.알.수.없.을.뿐.아.마.현.자.의.돌.이.그.방.법.중.하.나.가.될.가.능.성.을.상.정.해.놓.고.있.는.거.겠.지.”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까요?”

“대.륙.의.끝.”

‘이것도 알고 있었구나.’

대륙을 완전히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방향도 함께 진행 중인 것 같았다.

‘생각보다 그냥 막 하고 있는 건 아니구나.’

물론 녀석은 아직 알타누스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걸 모른다.

‘제물로 다른 걸 준비한다는 걸 모른다는 거지.’

“…….”

“그.래.서.2.회.차.는.어.떻.게.됐.나.”

이 정도로 교환하는 게 맞으려나. 다시금 까마귀에게 시선을 돌리자 불안해 보이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비쳐온다.

내가 다른 정보를 요구할까 봐 불안한 것이 아니다. 혹시라도 박덕구에 대한 정보를 풀지 않을까. 겁을 집어먹고 있는 모습이었다.

당연히 녀석이 1회차와 2회차를 제대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2회차의 박덕구든, 3회차의 박덕구든, 박덕칠이든 박덕팔이든 간에 녀석은 돼지 새끼를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

하기사 회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녀석 때문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심지어 자신을 기억하는지에 대한 여부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나중에 써먹을 수 있겠는데.’

“뭐. 돼지 새끼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

“튜토리얼 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성장했는지, 아마 진 군사님도 보시면 깜짝 놀랄걸요.”

‘일단은 이 정도만 풀자.’

“다.른.소.식.은.또.없.나.”

“다음에 이야기해 드릴게. 다음에.”

‘많이 실망했자너.’

물론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에는 안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 군사님이야말로 제가 군침을 흘릴 만한 정보… 뭐 없어요?”

‘더 듣고 싶으면 선 제시하세요. 정보의 가치에 따라, 우리 돼지 새끼 개인정보 풀어드립니다. 아. 혹시 사진도 가지고 있었나. 좋은 거 주시면 사진도 보여드립니다. 아기 돼지 필체가 그대로 쓰여 있는 편지도 있어요. 어디에서 돈 주고도 못 구하는 애장품들입니다.’

“…….”

‘그건 알아? 우리 돼지 새끼 여자친구도 생겼어. 곧 결혼도 하자너.’

히죽 입꼬리를 올린 것은 당연지사. 마음 같아서는 내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겠지만, 녀석이 쉽게 이쪽을 건드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정작 나에 대해서 아는 게 없지?’

막말로 시간 여행을 할 줄 아는 미친놈을 건드려서 득이 될 게 뭐가 있겠는가. 물론 페널티가 조건 같은 게 아예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현자의 돌로 이 시간, 저 시간을 활보할 수 있는 놈이었으니 굳이 이런 자리에서 척을 지기에는 부담스러울 것이다.

위험을 감지한 이쪽이 과거나 미래, 혹은 2회차로 도망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테니 말이다.

‘머릿속 한쪽 구석에 희미하게 박혀 있는 색욕과 영면도 부담스러울 거야.’

완전히 기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녀석은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 분명히 실감했을 거라 믿는다.

녀석 어느 한 편의 무의식 속에서는 틀림없이 이쪽을 경계하고 있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실상은 자의적으로 원하는 곳으로 시간 여행을 하는 것 따위는 불가능하고, 색욕과 영면을 쉽게 강림시킬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부풀릴 수 있을 때 부풀려 놔야지. 언제 이렇게 또 부풀려 보겠어.’

이 상황을 최대한 오래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리고.

“글.쎄.네.가.군.침.을.흘.릴.만.한.정.보.라.”

“네… 네.”

“…….”

“…….”

“그.거.야.당.연.히.”

“…….”

“김.현.성.이.어.디.있.느.냐.겠.지.”

“…….”

“까악! 까아아악!”

“…….”

“까아아아아악! 까아아아아아악!”

‘그냥 블러핑이자너.’

“까아아아아아악! 까악! 까아아아아아악!”

‘알고 있을 리가 없지. 그래도.’

“까아아아아아아아악! 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2현성이 여기에 있다는 건 알고 있는 거구나?’

“까아아아아악! 까아아아악!”

‘그 새끼도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눈에 한 번 띄기는 했나 보네. 심지어 미카엘도 같이 있었지?’

“까아아아아악! 까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건 도박이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주사위를 던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기지 못할 싸움에 주사위를 던질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최소한 김현성의 이야기를 던진 것은 본인의 생각에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2기영은 2현성을 찾고 있다. 아마 1회차를 유영하고 있는 이유가 김현성 때문일 것이다. 라는 결론에 닿은 것이리라.

“까아아아악! 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표정을 숨겨야겠지.’

“까악! 까아아아악!”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야 했지만….

“까아아아악!!!!!!”

“입 다무세요. 미친 까마귀 새끼야.”

“웃.기.는.군.지.금.네.모.습.말.이.다.”

저도 모르게 까마귀의 목을 손으로 대뜸 붙잡게 된다. 목을 붙잡힌 까마귀는 어떻게든 내 손을 빠져나가기 위해 푸드덕거리고 있었지만 목을 조여 오는 손아귀에 점점 추욱 늘어지고 있었다.

“김.현.성.을.찾.고.있.나.”

“그건 네가 알 바가 아니야. 멍청한 새끼야. 내가 왜 널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네게는 빚이 있는데 말이야.”

“흐.릿.한.기.억.이.있.다.잘.기.억.은.나.지.않.는.다.만.내.가.네.게.무.언.가.를.한.모.양.이.네.몇.년.전.린.델.에.서.였.나.정.하.얀.때.문.이.었.나.”

“네가 그걸 기억하느냐에 대한 여부는 별로 상관없지만. 아무래도 넌 여기 있으면 안 되겠다. 기영아.”

“내.가.하.고.싶.은.말.이.야.기.영.아.넌.아.니.너.희.는.여.기.있.어.서.는.안.돼.”

“그걸 결정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넌 현재를 위해서 존재하는 망령이거든. 구역질 나는 새끼.”

“네.가.1.회.차.에.있.는.이.유?.실.패.했.기.때.문.에.”

“네가 돼지 새끼를 잃은 이유? 실패했기 때문에. 내가 너였으면 그런 실수는 안 저질렀어.”

“병.신.새.끼.”

“병신 새끼.”

“김.현.성.이.꽤.소.중.한.가.봐.나.는.아.니.거.든.”

“내가 너랑 무슨 이야기를 더 할까. 근데 이거 하나만 알아둬. 너 사람 잘못 건드린 거야.”

“네.가.잘.못.건.드.린.것.같.”

퍼억! 퍼억!

까마귀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옆에 있는 촛대로 곧바로 녀석의 머리를 찍어버렸으니까.

시선을 돌리자.

마찬가지로 책상 위의 물건들을 집어 던지고 있는 이기영의 모습이 망원경 속에 비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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