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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506화 (1,504/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506화

소실(16)

‘저 새끼가 더 빡쳤자너.’

표정을 보아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마 돼지 새끼를 잃었다는 대사가 놈의 심금을 울린 모양이다.

‘내가 틀린 말 한 거 아니기는 해. 지도 찔리는 게 있으니까 흥분한 거겠지.’

제대로 정곡을 찔렸으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박덕구는 녀석의 역린이었다.

너무나 명백하게 돼지 새끼의 죽음은 녀석의 실수이자 과오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아마 자기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박덕구의 죽음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자신이라는 생각이 언제나, 항상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는 거다.

그런 상황에서 또 다른 자기 자신에게 팩트로 얻어맞았으니….

‘저러는 게 당연하자너.’

아직까지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이 벽에다가 물건을 집어 던지며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지 않은가.

녀석의 저런 모습을 보아하니 오히려 이쪽이 차분해지는 듯한 느낌.

본래 이런 상황에서는 더 흥분하는 녀석이 패배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월감마저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이겼자너.’

물론 이 유치한 말싸움에서 이겼다고 이 모든 게 끝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하게 설명하기에는 꽤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었으니 말이다.

정보에 대한 우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여러 가지 조건들을 맞춰야 하는 이쪽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무조건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놈이 김현성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이 그러했다. 물론 1기영이 김현성의 행방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내 약점을 알고 있다는 것은 꺼림칙했으니 말이다.

물론 나 역시 놈의 약점을 알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박덕구는 녀석의 약점임과 동시에 내 약점이기도 하다.

녀석은 김현성을 인질로 잡을 수 있지만 나는 박덕구를 인질로 잡을 수 없다.

더불어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없다는 것 또한 불편하게 다가온다.

마음 같아서는 인류 진영을 데리고 외신 놈들을 깡그리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그게 쉬운 것도 아니거니와 리셋 버튼을 누르기 위해서는 대륙이 회생 불가능한 상태로 접어들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예정대로 성검용사는 북부에서 미치광이가 되어야 했고,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과 에베리아 왕국은 마지막까지 세계수를 사수해야 했으며, 캐슬락의 높은 성벽이 무너져야 했고, 린델 최후의 저항군들마저도 모조리 쓰러져야 했다.

결국 1기영 이 새끼를 끝장내기 위해서는 비둘기들의 둥지로 직접 파고들어 놈의 목을 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거다.

“…….”

“…….”

“쉬운 일은 아니야.”

2회차 때야 박덕구가 몰고 온 나이스 보트와 정하얀으로 인해, 놈의 둥지에 순식간에 닿을 수 있었지만 1회차에는 나이스 보트도 없고, 정하얀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안에 박혀서 외신들의 공격을 어떻게든 막아내려고 웅크리고 있는 쓸모없는 놈들에게도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놈과 타협할 수도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새끼는 무조건 죽여야 돼.’

일단은 공화국에서 일어나는 전쟁에서부터 저항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비둘기들의 둥지가 공화국의 바로 위쪽에 있었으니 말이다.

곧바로 망원경을 공화국 전선으로 돌린 것은 당연지사. 녀석이 흥분해 있을 때, 최대한 이득을 보는 게 맞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창 전투 중인 전장이 시야에 비쳐온다. 하늘을 수놓은 것으로 모자라 땅으로 내려온 비둘기들과 그들에게 저항하고 있는 공화군, 얼마 지나지 않아 대패할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후퇴!! 후퇴하라!!!

-움직여!! 당장 움직여라!! 흩어지지 마! 함께 움직여야… 커헉!!

-이 빌어먹을 비둘기 새끼들아!!!

-덤벼!!!! 덤벼!!! 들어와 보라고!! 제기랄!!!

-응전하지 말고 길을 따라 움직여!! 캐슬락에서 지원군이 온다! 그때까지 최대한 웅크리면서 이동하라고!!! 젠장!!!

‘쇠뿔도 단김에 빼는 게 좋자너.’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메슬라 성으로 병력들을 움직여 진지를 구축하라.(0/1)]

[왕 린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뭐… 뭐?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그 밖에도,

[왕 린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어? 어어어어?

[제이 프리쳇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신의 목소리다!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청전명 외 99인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뭐… 뭐야… 이건….

-제길 우리를 버리지 않았구나! 아직 하늘이 우리를 버리지 않은 거야!

-뭐야… 어떻게 해? 길을 따라가라며!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대장!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목소리를 들어! 목소리를 들으라고! 이 새끼들아!!!

-목소리를 들어!! 목소리를 들으라고!!

-쏴!! 쏴라!!!!

‘그래도 눈치 빠른 새끼들이라서 다행이자너.’

지휘관들로 보이는 놈, 네임드로 보이는 놈, 목소리가 커 보이는 놈에게 각각 메시지를 뿌리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따른 것은 아마 본능적인 행동이었을 터다. 하지만 눈에 비치고 있는 결과를 보고 있노라면 아마 계속해서 이쪽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갑작스레 하늘에서 후두둑 후두둑 하고 떨어지기 시작한 비둘기들, 정신없었던 전장이 순식간에 정돈되는 것을 느끼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동안 전혀 맞지 않았던 화살들이 놈들의 몸에 박히기 시작하고, 비둘기들이 내지른 창은 아군의 방패와 마법에 막힌다.

하늘에서 끊임없이 마법을 쏘아 보내고 있었던 비둘기들을 최우선으로 떨어뜨리고 있으니, 아군의 진영에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다.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희망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던 전장에 한 줄기 빛이 내려온 상황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문제가 있다면 그들에게 메슬라 성으로 향하라고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메슬라 성으로 병력들을 움직여 진지를 구축하라.(0/1)]

[왕 린 외 140명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메슬라 성으로… 메슬라 성으로 향하랍니다! 병력들을 전부 움직이랍니다!

-제길! 일단 움직여!! 일단 움직이라고!!!

-길을 따라가야 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메슬라 성은… 지금….

‘그래. 거기 완전히 고립됐지.’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병력들에게 불구덩이로 들어가라 주문을 한 셈이었다. 그쪽 근처는 이미 비둘기들에게 밀린 전선이다.

서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제한적인 현 상황에서도 메슬라 성으로 들어가는 게 그리 현명하지 않은 판단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을 터다. 하지만….

[메슬라 성으로 병력들을 움직여 진지를 구축하라.(0/1)]

[왕 린 외 140명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그냥 목소리가 가리키는 곳으로 움직여!!! 메슬라 성으로 간다!!!

-제… 제정신이 아니야….

‘뭐가 제정신이 아니야. 이 새끼야. 다 내가 큰 뜻이 있어서 그런 건데.

-제정신이 아니라고… 지금 이 상황에서 메슬라 성으로 들어가겠다고?! 그냥 전부 죽겠다는 소리야… 그냥 자살하겠다는 소리라고!

-어차피 씨발! 어디를 가도 똑같아! 메슬라 성으로 움직이라고!!!

‘그래. 차라리 그게 생존확률이 높을 거야.’

생각하고 움직이고 있다기보다는 군중심리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퀘스트를 받은 지휘관가 목소리가 큰 새끼들이 너도나도 메슬라 성으로 가라고 외치고 있으니 일반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사실 당장 눈앞에 있는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신이 없는 상황일 터였다.

지정된 장소로 마법을 보내고, 지정된 장소로 움직여 방패를 들어 올린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화살을 쏘아 보내고 있는가 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경로로 병력들이 움직이기도 한다.

부품들은 부품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최대한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분명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들일 텐데도 불구하고 그 결과를 본인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있다.

비둘기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고, 형편없이 밀리던 전장이 밀어내는 국면으로 전환되고 있었으며, 본인들의 공격이 먹힌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말도 안 돼… 이건 정말로… 말도 안 된다고….

‘그래 다들 그런 소리 하더라.’

부품의 입장에서 보자면 말도 안 되는 일이기야 하다. 본인은 톱니바퀴를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고, 볼트와 너트를 가지고 장난질을 치고 있었을 뿐인데, 자동차가 굴러가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것처럼 느껴질 테니 말이다.

저들의 시야가 좁을 뿐이다. 조금 더 넓고, 크게 전장을 바라보고 있다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더 실감하고 있을 터였다.

변화가 생긴 전장은 이곳뿐만이 아니다.

공화국 전체,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곳에서는 병력들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치고 있었다. 이 정도로 넓은 범위에, 이 정도로 많은 병력들을 퀘스트로 움직인 건 이쪽으로서도 꽤 오래간만이다.

아니, 사실상 처음이다. 한마디만 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2회차와는 다르게 여기에 있는 놈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틀을 마련해 줬어야 했으니 말이다.

‘출혈이 꽤 큰데.’

가랑비에 옷 젖는지 모른다고 했던가.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실시간으로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계속해서 숫자가 줄어드는 걸 바라보는 건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망원경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조금은 보상을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공화국 전체에서 인간들이 개미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부딪칠 듯 부딪치지 않을 듯, 보이지 않는 미로를 움직이고 있는 듯했지만 결코 동선이 겹치거나 낭비되거나 하지 않는다.

분열되고, 합쳐지고, 나누어지고, 더해지는 것이 마치 작은 세포들을 보는 듯하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목소리를 따르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며 움직이고 있다.

당연하지만 비둘기들은 전장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시야는 인간들보다 조금 더 높을 테니 말이다.

‘근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놈들이 고도를 낮춘다!

-땅으로 끌어내려! 그물 준비해! 온다!

전력 차는 압도적, 하지만….

‘비둘기들이랑 이쪽 사이에 있는 지능 격차도 압도적이자너.’

-넬레 침엽수림으로 들어간다! 진입해!

-네?

-신의 목소리다!

-아… 네!

‘저 멀리서는 숲 안쪽까지 안 보이지?’

말인즉슨 하늘에서 놀던 양반들이 땅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다는 거다. 거기에….

‘우리 1회차 애들이 다른 건 몰라도 개싸움 하나는 잘하자너.’

소규모 병력들이 진흙탕에서 뒤섞이기 시작하면 오히려 우위에 서는 것은 공화국 병력이다.

-대기해.

-네?

-대기해라.

-지금 그게 무슨… 메슬라 성으로 향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신의 목소리가 이곳에서 대기하라고 하는군, 아무래도 우리 역할은 이곳을 사수하는 것 같다.

-그거… 죽으라는 거 아닙니까?

-누가. 놈들이? 아니면 우리가? 숲 안쪽은 우리 사냥터야. 여기서는 놈들이 사냥감이고 우리가 사냥꾼이다.

‘너 좀 멋있다?’

-준비해라.

‘너 엑스트라치고는 좀 간지 난다?’

-레인저가 숲에서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지 멍청한 비둘기들 머릿속에 똑똑히 새겨줄 수 있는 기회니까.

‘레인저랑 암살자들 좋더라. 묵직하고, 간지 나고, 군말 없이 명령에 잘 따르고,’

수많은 병력들이 침엽수림을 지나간다. 자신들도 모르게 저 병력들을 따라갈 만하건만, 공화국의 레인저들을 침엽수림의 위에서 비둘기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놈들이 하강하는 순간, 나무 위에서 단검을 든 암살자들이 튀어나와 놈들을 붙잡고 떨어져 땅바닥으로 뒹굴기 시작한다.

단번에 목으로 찔러 들어가는 칼날, 신속하고 정확하게 각자의 할 일을 마친 놈들은 다시 숲과 섞여 모습을 숨긴다.

육안으로 쉽게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녹아드는 것이다.

‘일단 병력들은 메슬라 성으로 집결.’

불과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전장의 판도가 완전히 뒤집어진다. 1기영이 흥분해 날뛰고 있는 사이에 만들어진 결과물, 아직도 망원경 속에 보이는 녀석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이래서 흥분하면 지는 거라니까.’

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적습이다! 비둘기들이 왔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제기랄! 적습이다!! 적습이야!!”

“도미니온스다!!”

흥분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 저쪽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비둘기들이 캐슬락으로 순식간에 워프하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다시금 망원경을 돌려 이기영을 바라본다.

‘도미니온스?’

“그냥 바로 목을 치시겠다.”

-뒈져라. 패배자 새끼.

“뒈질 것 같냐? 패배자 새끼.”

*다음 페이지에 위란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위란 일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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