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12화
소실(22)
[류한 이거 완전 속이 비었어요. 튜토리얼 때 던진 멘트 정리 가능하시죠?]
[…….]
[…….]
[…….]
[…….]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을 텐데?]
‘딜레이 한번 길자너.’
[아니, 기억을 안 하려고 하시는 거겠죠. 결국 새로운 경치 어쩌구도 기억해 내셨잖아요.]
[벌써 오래전 일이다.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어떻게 메슬라 성으로 향할 것인지 생각하는 게 먼저 아닌가?]
[이게 왜 쓸데없는 일이에요. 얘 지금 완전히 넋이 나가 있다니까요? 그래도 큰 전력 중에 하나인데 무슨 언데드 소환수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데리고 다녀요?]
[문제 될 게 있나?]
[…….]
[…….]
‘문제 될 게… 없긴 하네?’
딱히 녀석이 자의적으로 판단하기를 원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의식이 있다면 조금 더 활용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겠지만, 기능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지 않아도 적의를 보이는 녀석들에게는 검을 휘두르고, 이쪽을 보호하려는 모습을 취하고 있지 않았던가.
애초 류한에게 바랐던 기능을 그대로 탑재하고 있었으니 놈의 의식을 깨우는 것이 오히려 도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쟤 말이 맞기는 해… 괜히 일어나서 삐뚤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나아….’
오히려 괜히 녀석을 깨웠다가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다는 거다. 혹시 알겠는가. 이 새끼가 갑자기 진 군사의 죽음을 다시 한번 곱씹으며 복수귀로 진화할지, 진 군사의 죽음에 연관되어 있는 모든 이들을 향해 칼날을 겨눌지.
물론 놈의 성격상 그럴 확률은 희박하기야 하겠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상황에서 괜한 변수에 휘둘리느니… 차라리 이렇게 쓰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문… 문제 될 게 없기는 하네요.]
[…….]
[…….]
[그래서, 언제 놈들의 둥지로 들어갈 예정이지?]
[딱히 날짜를 정해 놓은 건 아니에요. 최대한 빠르게, 준비가 되는 즉시 출발하겠죠. 지금 메슬라 성에서 공화국 병력들이 제대로 자리 잡고 있거든요. 아무래도, 린델이나 캐슬락, 에베리아 왕국에 있는 병력들을 빼내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그쪽에 있는 병력이라도 써야 할 것 같아서… 아무튼 저 같은 경우에는 빠르면 오늘 내로 캐슬락을 떠날 예정이에요. 군사님도… 아니, 군사님은 린델에 계시는 게 좋겠네요.]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쓰로누스, 거기서 죽어야 하거든요.]
[예정된 미래로군.]
[네. 쓰로누스는 김현성한테 뒈질 거예요. 본래는 1기영이 거기에 반쯤 손을 보태는 게 본래의 미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이전의 계획들을 강행할지 확신할 수가 없네요. 물론 김현성이 회귀자라는 떡밥을 뿌려두기는 했어요. 반응을 보면, 1기영도 현시점부터 김현성을 회귀자로 점찍어 둔 것 같았고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까지 김현성을 살려 놓은 걸 보면 결국 김현성을 쓸 생각이 있다는 거 아니겠어요?]
[아마 계획을 수정할 가능성이 높지는 않을 거다. 물론 네놈의 존재가 거슬리게 느껴지겠지만 오랜 계획을 수정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점들이 많겠지. 놈은 인류뿐만이 아니라 비둘기들도 적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제 생각도 군사님과 비슷해요. 애초에 그림을 손볼 생각이었으면 도미니온스와 세라핌을 에베리아 전선으로 보내지도 않았겠죠.]
이쪽이 나타났다고 해서 모든 걸 던지기에는 지금까지 투자한 게 너무나 많다고 느껴질 것이다.
아니, 이미 녀석의 계획 안에는 내가 들어가 있다. 시간여행자, 현자의 돌을 가지고 있는 2기영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걸 이미 한참 전부터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계획에 변경은 없어.’
의자에 앉아 계속해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자, 갑작스레 옆자리에 앉는 류한이 시야에 비쳐온다. 저도 모르게 빗을 가져온 이후에 놈의 머리를 빗겨 나간다. 당연히 그 와중에도 진 군사와의 대화를 끊지 않는다.
[그래도, 제 존재로 인해 미래가 너무 많이 바뀌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동의하지.]
[언제나 결과는 같다는 걸 이해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도 없고요. 또 마냥 손을 놓고 있기도 애매하다 이거죠. 애초에, 진 군사님은 저랑은 다르게 육망성을 타고 이곳으로 왔잖아요.]
[…….]
[이번 시점, 이번 사건에서 개연성을 충족시켜야 하는 건 제가 아니라 군사님일지도 모른다는 거죠.]
[이번 사건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곧 1기영이 린델 쪽에 모습을 드러낼 거예요. 쓰로누스는 뒈지기 전에 이기영의 이름을 들을 거고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녀석뿐만이 아니라 4대 천사가 모두 뒈지겠네요. 일반 비둘기들도 태반이 뒈져 나갈 거고, 인류의 멸절이 눈앞에 오게 될 거예요. 대륙이 완전히 회생 불가능한 상태로 빠지는 거겠죠. 최후의 저항선은, 세계수 전선, 캐슬락, 린델, 종국에는 린델만 남아 소수의 인원으로 비둘기들에게 맞설 거예요.]
[의미 없는 소모전을 계속 진행하라는 건가?]
[그거야 군사님 마음이죠. 결과적으로 1회차가 예정된 미래만 맞이하게 된다면 방법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류한의 머리카락을 전부 다 빗자 그나마 그지 같이 비루한 모습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이제야 예전의 얼굴을 조금 되찾은 듯한 느낌, 문제가 있다면 너무 류한처럼 보였던 터라 남들이 알아볼 가능성이 높다는 것뿐이었다.
눈 가리고 아웅이기는 했지만 조금은 스타일 변화를 줘도 나쁘지 않을까 싶어 이번에는 놈의 머리를 따주기 시작한다.
오랜만이기는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일이었던 터라 금방 손에 익는다. 아직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벌써부터 만족스럽다.
[내가 개연성을 충족시켜도 문제가 일어날 여지가 없는지가 관건이로군. 이곳은 네놈과 김현성을 위해 마련된 장소가 아니었나?]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봐요. 제가 군사님에게 부탁했다는 시점부터 이번 일에 개입했다는 판정이 내려줄 가능성도 있고, 엄밀히 말하면 군사님도 어느 정도 지분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물론 시스템이 판단하기 나름이겠지만, 저 없이 군사님이 홀로 육망성을 타고 들어왔다는 것부터 입국허가를 받았다는 것과 진배없지 않아요? 워킹비자를 어떻게 발급받는지는 군사님의 능력이죠.]
[…….]
[안 될 것 같으면 방법을 찾아요. 그래도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요.]
[어처구니가 없군. 네놈이 그리 다그치지 않아도, 알아서 결과를 가져올 생각이었다.]
[아. 희영 씨랑 벨리에는 보낼 필요 없어요. 그냥 창렬이랑 알프스한테 연락 넣어서 메슬라 성 쪽으로 보내줘요. 어차피 김현성은 1기영한테 닿게 되어 있으니까.]
[특이사항 있으면 다시 연락하도록 하지.]
[…….]
[…….]
[잘 부탁드려요. 군사님만 믿고 있을게요.]
‘한 번씩 이렇게 칭찬도 해줘야 되자너.’
[새로운 경치 보여주실 수 있죠?]
[뚝.]
아니나 다를까 냉정한 통화 종료음이 들려왔다. 마침 류한의 변장 아닌 변장도 거의 다 끝나 갔던 상태였던지라 딱 알맞은 타이밍에 대화가 끝난 셈이었다.
슬쩍 머리를 땋은 류한을 바라보자 확실히 이미지가 조금은 변한 것처럼 느껴진다.
자세히 보면 몰라도, 아마 대충 보고 지나가면 이게 그 공화국의 류한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적당히 모포까지 씌우면 금상첨화. 낑낑거리며 짐을 넣어놓은 가방까지 놈에게 채우자 금세 일반 모험가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다음 할 일이야 뻔했다. 곧바로 문을 열자 깜짝 놀라 얼어붙어 멀뚱멀뚱 이쪽을 바라보는 그 3인조가 시야에 비친다.
“알렉스 님?”
“네? 아! 네!”
“지금 곧바로 캐슬락을 나가 메슬라 성으로 향할 거예요.”
“네? 네… 네? 네?! 지금 말입니까?”
“캐슬락을 나갈 수 있는 출구 알고 계신가요?”
“네? 알… 네? 저는….”
“제… 제가 알고 있습니다요. 배수로로 들어가야 하지만 확실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뭐? 캐넌? 정말이야?”
“…….”
“…….”
“챙기실 짐이 있으면 챙겨 주세요.”
“네? 아… 네! 어이, 조지! 1분 안에 짐 챙겨서 이쪽으로 퍼뜩 뛰어와.”
“알겠네.”
한눈에 보기에도 당황한 것이 시야에 비쳐온다. 심지어 조지라는 녀석이 허겁지겁 짐을 챙기러 나간 사이에 다 들리는 귓속말을 주고받고 있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캐넌? 지금 나간다고? 미쳤어?”
“알렉스. 네가 네 입으로 먼저 퍼즐 어쩌고 하지 않았어? 신의 뜻이라며, 우리가 모르는 뭔가 무슨 뜻이 있을 거라며? 윗분들이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라며, 그러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지금 전부 다 망해서 뒈지기 일보 직전인데, 여기에라도 걸어야지.”
“나, 나는 캐슬락 본대와 함께 움직이는 줄… 알았다고… 이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나가게 될 줄은 몰랐단 말이야. 고작 다섯 명이서 메슬라 성에 닿을 수 있을까? 그, 그래 그리고 미… 미카엘 님은…? 어?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지금 바로 가는 거야? 차라리 조금 기다렸다가 합류하는 게….”
“신의 목소리가 캐슬락 성으로 향하라고 했어. 알렉스. 진정 좀 해.”
“그러니까 대략적인 시기는 정해지지 않은 거 아니냐고. 일단 조금 더 상황을 차분히 살펴본 이후에… 다른 병력이나, 천관위 님, 그래. 최소한 미카엘 님이라도 함께.”
“미카엘 님은 함께 가지 않을 거예요.”
“아….”
“…….”
“…….”
“지금 곧바로 준비해 주세요. 만약 가지 않으실 거라면 이곳에 남으셔도 상관없고요.”
“아니요. 함께 가겠습니다.”
“캐넌. 너.”
“가기 싫으면 넌 남아 있어, 알렉스. 나는 퍼즐이니 뭔지 한번 걸어 봐야겠으니까.”
“그래… 그럼 나도 간다.”
‘너희 돌아가면 전부 1계급 특진이야. 작렬하게 전사하면 2계급 특진시켜 줄게.’
“그런데 정말 미카엘 님은 함께 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래도 조금만 기다리면….”
“시간이 없어요.”
물론 녀석을 기다릴 시간은 있다.
하지만,
딱히 함께 갈 이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떨어져 있는 게 더 베스트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차피 정신분열이 오기 시작했으니까.’
돌아왔을 때, 내가 자리에 없다면 아마 더욱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본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미 비둘기들의 1차 공습이 있었던 상황, 단언하건대 지금 이곳으로 향하고 있는 와중에도 똥줄이 다 타고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물론 이쪽을 위해서 내려야만 했던 어쩔 수 없는 결단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슬픔에 빠져 언제든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을 홀로 내버려 둔 상황이 아니었던가.
작고 무해한 고슴도치 기영이는….
‘공황에 빠지면 다소 충동적인 행동을 하는 경향도 있자너.’
녀석으로서는 최악의 실수를 저지른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캐슬락으로 다가오고 있는 병력들에 섞인 미카엘의 얼굴에 짙은 수심이 드리운 것이 보인다.
계속해서 혼잣말을 주고받고 있는 꼴은 가관, 놈의 정신분열증에 끊임없이 떡밥과 먹이를 던져주고 있는 셈이었다.
-제길….
-…….
-조금 더 빨리 갈 수는 없겠습니까?
-…….
‘아마 점점 더 심해질 거야.’
하루,
-이기영 님?! 이기영 님! 제길!
‘제길 봇 되어버렸자너.’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미켈레! 이기영 님께서 지금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 제가 계속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이틀,
-전부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이 일을 망친 겁니다.
‘그래. 처음에는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모른단 말입니다. 우리를 이해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일주일,
-입 닥치십시오. 미켈레. 더 이상 한 마디도 지껄이지 마.
‘얘 좀 성격 변한 것 같은데?’
-지금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야!!
‘이렇게 보니까 진짜 미친놈이 따로 없자너.’
이쪽 일행이 메슬라 성에 가까워지고 있는 그 순간까지도….
홀로 이쪽을 쫓고 있는 녀석의 혼잣말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더 이상 당신 말은 듣지 않을 겁니다. 미켈레.
그리고,
마침내.
미카엘이 미켈레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이게 악마랑 다를 게 뭐가 있겠냐고… 남의 몸에 기생하더니 이제는 빼앗으려고 하고 있자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