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14화
소실(24)
‘살다 보니까 진짜 별꼴을 다 보자너.’
물론 언제나 말했듯이 대륙은 다중연애나 다중혼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아니, 단순히 관대한 정도가 아니라 이미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그로 인한 사회문제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적극적으로 인구를 늘려나가야 하는 대륙의 상황상, 이미 자리 잡은 문화를 쳐내기보다는 권장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지금이야 좀 나아진 편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 성향이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모든 이들이 이런 상황을 반기는 것은 아니었다.
자연스레 연애 시장, 결혼 시장에서 도태된 이들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미 만남을 잘 이어나가고 있었던 이들이 문제, 실제로 어디에서 칼부림이 낫다는 이야기는 의외로 흔하게 들려오는 편이었다.
당당하게 양다리를 걸치겠다고 선언한 남자를 불에 태운 마법사의 이야기나, 임신한 아내를 두고 새 아내를 맞은 놈이 도끼에 곤죽이 되어 시체로 발견된 이야기가 바로 그 예다.
당연히 유아영의 경우에는 저 다중연애나 다중혼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편이었다.
그녀는 전 남친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파란 길드에서 칼부림 나는 건 좀 곤란한데….’
알프스와 김창렬의 얼굴에 망치가 떨어질 확률이 결코 낮지 않다.
“…….”
“…….”
‘현성이 찾으라고 했더니 여기서 꽁냥거리고 있는 거 실화냐고. 이게 시바 무슨 사랑과 전쟁이냐고. 알프스가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사람이 창렬이였냐고….’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하기는 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김창렬은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 김창렬의 아무렇지도 않은 무심한 손길에 반응하는 것은 알프스뿐이다.
자연스레 머리를 쓰다듬자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은 가관, 심지어 손가락을 배배 꼬고 있다. 얼굴은 헤실헤실거리고 있었고,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고 있다.
정녕 유아영의 대장장이 망치가 두렵지 않은 것일까. 김창렬 이 죄 많은 새끼는 알프스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심지어 시바 흰둥이 역시 김창렬을 향해 맹렬하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단순히 꼬리를 흔드는 게 전부가 아니라 게거품을 물고 기뻐하고 있지 않은가. 한번 쓰다듬어 주자마자 배를 들이 까고 헥헥거리는 꼴은 가관.
알프스의 방에 방문한 유아영이 흰둥이가 김창렬에게 꼬리 치는 것을 발견한다면 높은 확률로 수상한 기운을 감지할 확률이 높다. 아니, 시바 누가 보더라도….
‘너무 티 나자너.’
지금까지 알프스가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게 당황스러운 부분, 그간 모두와 함께 있을 때는 의식적으로 꾹 참으며 생활했다가 갑작스레 단둘이 있게 되니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이쪽을 확인하자마자 딱딱하게 굳어버린 알프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나는 시바 모르겠다. 이건 진짜 응원할 수가 없다. 시바.’
“부길… 부길드마스터!”
화들짝 놀란 알프스. 그리고 그제야 나를 발견한 김창렬.
‘와. 근데 시바 생각해 보니까. 이게 말이 되나. 김창렬보다 알프스가 나를 먼저 발견한 게 진짜 말이 되는 건가. 이 새끼도 시바 마음 다른 데 가 있는 거 아니야?’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부길드마스터.”
‘여전히 표정 변화는 없자너.’
미세하게 나를 다시 본 반가움만이 존재한다. 죄라도 지은 것마냥 눈치를 보고 있는 알프스와는 다르게 말이다.
‘흰둥이 너는 왜 시바 눈치를 보고 있어? 너도 창렬이 좋아해?’
아니, 지금 보니 김창렬의 눈에도 미세한 죄책감이 드리운다. 다시 한번 피로 얼룩진 파란 길드를 떠올린 것은 당연지사.
“창렬 씨.”
“…….”
“저한테 뭐 할 말 없어요?”
“…….”
“…….”
“죄송합니다. 부길드마스터.”
‘이 시바 새끼! 딱 걸렸어! 뭔가 잘못한 게 있었어. 이 새끼.’
“…….”
“…….”
아니나 다를까 알프스도 황급하게 말을 이어온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이다.
“창… 창렬 선배님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시겠죠. 시바. 창렬이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겠죠. 박수도 시바 손뼉을 마주 쳐야 소리가 나는 거자너. 베니고어시여… 시바….’
“제가… 저 때문에… 제가….”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왜 나한테 벌을 받으세요. 시바. 벌은 아영이한테 받으셔야죠.’
“임… 임무에 지장이 될 정도는 아니었어요.”
‘네. 네. 임무에 지장은 없으셨겠죠.’
“…….”
“…….”
“창렬 선배님은 그냥 평행 세계의 아영 선배님을 구하고 싶어 하셔서!”
“네?”
“그래서 제가 멋대로 행선지를 수정해서… 흰둥이한테… 창렬 선배님을 속여 달라고… 임무를 우선시하지 않은 건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정말로 창렬 선배님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아… 아아아….”
‘아니었자너…’
슬쩍 알프스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열심히 망치질을 하고 있는 평행세계의 유아영이 시야에 비쳐오는 중, 땀을 뻘뻘 흘리며 방주를 만드는 것에 동참하고 있는 모습, 심지어는 작업의 선봉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망치로 커다란 못을 꾸역꾸역 박아 넣다 이쪽에 시선이 닿았는지 김창렬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제야 얘네들이 왜 제 발을 저렸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현 임무와 상관도 없는 1회차의 유아영을 작전 중에 데리고 다니고 있었으니 할 말이 있을 리 만무, 물론 임무에 지장이 없는 한도 내에서 그녀를 케어하기야 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무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근데 안심되자너. 시바… 암살자 실격에다가 유아영 남친까지 실격했으면 진짜 일 날 뻔했어.’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녀석이 옳기야 했다. 의도가 어떻게 됐든 간에 1회차 유아영이 메슬라에 합류함으로써 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녀는 대장장이가 아니었지만 재능이라는 게 어디 가는 것은 아닌지 꽤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주고 있지 않은가.
조선소에서 굴러먹던 몇몇 안 되는 기술자들과 같은 역할을 해내고 있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심지어 체력적으로는 기술자들보다 우위에 있었던 지라 조금 과장해서 말해 50인분을 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징계는 먹여야겠자너.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자너.’
오랜만에 만난 얼굴이 반갑기도 했고, 사랑과 전쟁이 열리지 않아 안심이 되기는 했지만 징계를 아예 먹이지 않을 수는 없다.
김창렬이 너무 1회차의 유아영에 집착하고 있었으니 어느 정도 선을 그어줄 필요는 있다고 여겨진다. 더불어 쓸데없는 의심을 한 걸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고 말이다.
“징계에 대해서는 일이 끝난 뒤에 말씀드리는 게 좋겠네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징계에 대해 논하는 게 더 웃기는 일이니까요.”
“하… 하지만 부길드마스터… 창렬 선배님은… 정말로… 이건 전부 제 잘못인데….”
“창렬 씨. 물론 지금까지 파란을 위해서, 또 저를 위해서 해주신 일들은 너무나 감사하기는 하지만…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창렬이 화났자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네요.”
알프스는 흰둥이를 이용해 자신이 김창렬을 속였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아마 알면서도 속아줬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1회 차의 유아영을 지키고 싶은 건 녀석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니 말이다.
“이 평행세계는 곧 사라질 거예요.”
‘그러니까 집착하지 마. 형이 무슨 말 하는지 알지?’
심지어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다.
“집착해서 좋을 게 없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
“…….”
‘알프스 쟤는 또 왜 울라고 그래.’
하지만 알프스에게는 굳이 시선을 두지 않는다. 그녀가 어떻게 하든 간에 책임은 무조건 상급자에게 있다는 걸 인지시켜야 이후에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파란 길드원들의 기강을 잡은 적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창렬이한테는 왠지 미안하자너.’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팔도 잘리고 몇 년을 허송세월하지 않았던가.
“그럼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네요. 굳이 담아둘 이야기도 아니니.”
“네.”
“흐윽… 흐으으윽… 네에에….”
“딱히 보고하실 것도 없으실 테지만….”
“…….”
“…….”
“일단 약식으로라도 메슬라 성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싶네요. 더불어 현성이 쪽에는 어떤 차도가 있었는지도요.”
“네.”
“…….”
“…….”
‘확실히 일을 허투루 하지는 않았네.’
메슬라 성 근처를 돌아다니며 김창렬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심 이 정도 했으면 됐다는 마음이 샘솟기는 했지만, 일단은 성에 차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인다.
“헤르엔에서 끊긴 흔적이 있다.”
“네.”
“그리고 다음 흔적이 발견된 곳은… 공화국 전선 쪽이었고….”
“네.”
“프로스트 월을 넘어 북부로 향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요.”
“네.”
“부족하네요.”
‘아니야. 충분해. 비둘기 둥지로 향하고 있을 거라는 걸 알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이 정도만 해도 수고한 거야.’
“후우….”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미안해. 창렬아….’
“실망스럽네요.”
“…….”
“…….”
“메슬라 성 근처는….”
“종종 정찰병들이 오가고, 공급도 몇 차례 있었습니다만, 적어도 메슬라 성은 크게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적의 게릴라 부대는 메슬라 성에 모이는 병력들을 차단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병력들이 모이는 게 걱정되기는 하나 보네.’
그만큼 비둘기들의 현 상황도 그리 좋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공화국의 집결하고 있는 병력들의 숫자도, 또 타이밍도, 반갑지 느껴지지 않은 것이리라.
린델에서의 공습으로 쓰로누스와 많은 비둘기가 죽기도 했고, 실시간으로 캐슬락과 세계수 전선에서도 병력들과 비둘기들이 갈려 나가고 있는 중, 메슬라 성에서 준비되고 있는 특공대를 막을 때는 막더라도 최소한 둥지 안쪽을 정리하고 맞이하고 싶을 것이다.
“…….”
“전투 준비하세요.”
“네.”
“최소한의 작업원들만 남겨 놓고요. 어차피 명령은 제가 내릴 테지만… 창렬 씨는 네임드들의 암살에 집중해 주세요.”
“네.”
전쟁이 벌어진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평온한 분위기다. 마치 잔잔한 호수 같은 느낌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김창렬은 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당연히, 지금 한참 방주를 만들고 있는 이들 역시 의문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온다면 오는 거자너.’
“신의 목소리다! 공습 대비! 공습 대비!!”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마법사들… 뭐?”
“마법사들은 대기하라! 마법사들은 대기!!”
“화살 가지고 와! 제길! 화살!”
‘얼마나 걸리려나.’
물론 방주가 제대로 완성이 되려면 한 달은 넘게 걸리겠지만, 그냥 띄우기 위한 구색을 갖춘다고 한다면 몇 시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위험부담이야 따를 수밖에 없지만….
‘부담을 가지고 있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니까.’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대규모로 날아 들어오는 비둘기들이 시야에 비쳐왔다.
“비둘기들이다! 공습! 공습!”
“화살 장전해!”
“작업을 멈추지 마라! 작업을 멈추지 마!! 우리는 방주를 완성시킨다!”
“끝까지 망치를 놓지 마라!”
“전투 직업군들은 움직여! 움직여어어어어!!!”
‘지금부터는 타임어택이야.’
“…….”
“…….”
망원경을 다시 하늘로 올리기 시작한다. 대륙 전체의 모습이 시야에 담기기 시작했다.
*다음 페이지에 대륙 지도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대륙 지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