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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518화 (1,516/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518화

소실(28)

의식이 없는 놈에게 멍청한 새끼라 욕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이 없겠지만, 뭐 어떻게 하겠는가? 실제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게 보이는데 말이다.

단언하건대 류한 하나의 가치가 이곳 병력의 1/3 이상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이었다.

아군 엑스트라 병력들을 지키기 위해 네임드 캐릭터가 몸을 던진다는 것이 난센스였고, 코미디였다.

실제로 저렇게 네임드 캐릭터를 던지는 지휘관이 있다면 무능한 지휘관 중에서도 가장 멍청하고 병신 같은 지휘관으로서 대륙 전쟁사에 길이 남을 것이 분명했다.

“…….”

“…….”

‘시바 잘나가다 싶더니 저거 또 고장 난 거냐고….’

실제로 성검용사와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있었을 때도 놈이 고장 난 것이 일을 그르친 원인이 아니었던가. 막상 내게도 이런 일이 닥쳐오자 진 군사가 통찰력이 있기는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로봇은 고장 나게 마련이자너.’

단순히 저 병력들을 지키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눈에서도 성검용사나 튜토리얼 때의 진 군사를 발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류한은 아군 병력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차라리 자기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는 게 아군의 생환에 더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하는 것일까.

“대협!”

“대협이 움직이셨다!!”

‘너흰 좀 지랄 좀 하지 마. 진짜.’

물론 놈의 등장으로 밀리던 전장이 다시 미는 형국으로 변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찌 됐건 간에 그간 소극적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녀석이 적극적으로 변하기는 했으니 말이다.

실제로도 더 많은 비둘기들의 목이 잘려 나가고 있었고, 더 많은 비둘기들을 전장에서 이탈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됐건 간에 한계는 찾아올 수밖에 없다. 밀려들어 오는 강물을 개인의 힘으로 틀어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물론 류한은 그 강물을 거슬러 오를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이레귤러였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다른 이들도 모두 끌고 올라간다는 건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굳이 녀석을 바라보지 않아도, 녀석의 최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검을 휘두르며 병신마냥 스스로 체력을 깎아 먹을 것이고, 벽에 난 구멍을 메우는 과정에서 상처 입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비둘기들이 죽어 나가겠지만, 결국에는 녀석 또한 비둘기들에게 파묻혀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미치광이 용사와 비슷한 최후가 예정되어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기는 했지만 어쩌면 또 모르지….

‘장래희망일지 누가 알겠냐고.’

이걸 허무한 죽음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의미 있는 죽음이라고 할지, 함부로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는 멍청한 놈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녀석의 죽음이 다르게 비칠 수도 있는 법이었으니까.

사실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패 중, 가장 강력한 패가 망가졌다는 것뿐이었다.

완벽한 호위무사를, 1기영과 마주쳤을 때 보험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녀석을 잃은 셈이었으니까.

물론 알프스, 하연수, 김창렬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패와 버릴 수 없는 패는 쓰임새가 엄연히 다르다.

‘미치겠네. 진짜.’

본격적으로 1기영을 찾아야 하는 시기에 일어난 이탈인지라 더욱더 뼈아플 수밖에 없다.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고 싶기도 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더욱더 움직이기 힘들 거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류한이 전장에서 설치고 있을 때, 녀석들과 1기영의 눈이 류한에게 집중되어 있을 때, 이쪽의 일도 해결을 봐야 했다.

‘시바.’

“알프스 님!”

“네… 네!”

“따라오세요!”

“네!”

곧바로 흰둥이와 함께 이쪽으로 몸을 옮기는 알프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온다.

함께 전장에서 등을 맡기던 이들을 떼고 온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지 연신 뒤를 돌아보고 있었고, 나 역시 알프스가 이 전장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해줄 수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를 부르는 데 망설이기는 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다.

계속해서 망원경과 마음의 눈으로 사방을 살피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여전히 난장판이 된 둥지의 안이 시야에 비쳐온다. 방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있었지만 아직 1기영이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

“…….”

‘미카엘?’

이를 악물고 있는 금발 머리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이 새끼… 여기까지 언제 왔어?’

방주가 뜨고 나서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어디로 향하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메슬라 성으로 향하고 있는 녀석이었으니, 방주가 둥지에 처박히는 것을 보고 이곳으로 날아온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미카엘을 제물로 바쳐 2회 차를 소환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둥지에서 놈과 재회하는 것이 베스트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또 정확한 타이밍에 둥지에 찾아올 것이라고는 누가 예상했겠는가.

“저는 괜찮을 것 같네요. 전장에 합류해요. 알프스 님.”

“네… 네? 부길드마스터.”

“명령이에요. 전장에 합류하세요.”

‘너가 있으면 방해돼.’

“네? 하지만!”

“저는 확실히 안전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합류해 주세요. 저들에게는 알프스 님이 필요하니까요.”

“부길드마스터! 부길드마스터!”

뒤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지금은 일단 녀석이 있는 쪽으로 달리는 것이 먼저였다.

‘괜한 짐이 있으면 안 되자너.’

2회차의 동료들과 합류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그다지 이롭지 않다. 미카엘의 기억 속에 이기영은 철저히 홀로 우울을 삼키는 사람이었어야 했으니까.

길드원들에게 부둥부둥 위로 당하고 있는 그림은 고슴도치 기영이와 어울리는 그림이 아니다.

‘흑발 장모종한테는 원래 기대하는 거 아니야.’

금발과는 상성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원래 사냥개로 쓰기에는 금발 단모종이 제격이자너.’

허겁지겁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나아가라! 나아가라!”

“부길드마스터!!!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밀집!! 방패 대형으로 밀집!! 신의 목소리다!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보호막! 보호막!!!”

“방패를 세워!!! 길을 만들어라!!!”

이동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눈앞에 보이는 녀석들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공급하는 것으로 벽을 세울 수 있었으니까.

아까부터 집요하게 이쪽을 노리고 오던 비둘기들 역시 류한에게 정신이 팔렸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보이지 않는다. 계속해서 땅을 기어가고 있으니, 이쪽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 전장을 기어가는 게 한두 번도 아니다 보니,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지기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위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퀘스트로 벽을 쌓고, 아무리 이쪽이 잘 피해 다닌다고 한들, 눈먼 화살이나 마법, 그리고 벽을 뚫고 들어오는 비둘기들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아슬아슬해야 한다는 것. 너무 과하게 연출된 위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합류해 줄 타이밍을 기다려 줘야 했다는 것.

‘언제 와.’

시바…

‘언제 오냐고.’

그렇지 않아도 놈과의 거리가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있다. 이쯤 되면 내가 기어서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만하건만, 이 눈치 없는 새끼는 목에 담이라도 걸렸는지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있다. 결국에는….

“아아아아악!”

하는 비명이 터지고 나서야, 내 위치를 파악한 것이 보인다. 때마침 벽이 밀리고 좀비둘기가 내게 무시무시한 이빨을 들이밀고 있는 상황, 별안간….

피슉.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상체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시야에 비쳐온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곳에는 손가락으로 요상한 모양을 그린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미카엘이 자리해 있었다.

‘마법? 이능? 신성술법?’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미카엘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기능이었다. 자연스럽게 녀석에게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해냈구나.’

시바 완전히 지워 버렸구나.

겉모습이 크게 달라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머리카락이 조금 더 백금발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더 신성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기는 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의 녀석이 인간의 탈을 완전히 벗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녀석이 현재 강림한 상태라고는 볼 수 없다. 애초에 타 대륙으로 완전히 강림한다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신성을 요하는 일이었고, 시스템이 놈의 강림을 허락할 리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을 벗어난 상태에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어떤 편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켈레를 잡아먹으면서 본신의 힘도 일부 가지고 온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이건 제물로서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 굳이 제물이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사용할 수 있다.

“미… 미카엘… 님?”

“…….”

“…….”

이쪽의 얼굴을 보자마자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는 녀석, 그 와중에 놈을 가로막는 좀비둘기들의 상체가 사라진다. 표정이 꽤 무섭다.

“이… 이… 이기영 님….”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는 아마 역정을 낼 타이밍이 아닐까. 분노와 답답함을 참지 못해 소리를 지르는 그림이 안 봐도 뻔하게 그려진다.

정신을 얻다가 놓고 다니는 거냐고, 제정신이냐고, 얼마나 위험했었는지 인지하고 있는 거냐고 외칠 것이라 생각해 눈을 꽉 감았지만….

“다행… 다행입니다.”

소리치기보다는 오히려 이쪽을 꽉 껴안는 것이 느껴졌다. 나무라거나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사하다는 것에 안심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이쪽을 안심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째서 내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그러니 전부 괜찮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녀석은 아무 말도 해오지 않고 있었지만, 감정이 전해져 오는 것만 같다.

평소와는 좀 다른 리액션, 솔직히 색다르기도 했고, 조금 괜찮은 것 같기도 했었지만….

‘하… 시바… 좀 별론데… 이렇게 잔잔한 거 별론데….’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맛없는데… 시바… 하….’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새끼를 쳐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은 긴장이 풀렸다는 듯이 눈물을 터뜨리는 것이 맞다.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너무 쓸데없는 신파를 오랫동안 지속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본래 신파 씬에서는 귀신같이 외부 요소의 개입이 없는 것이 국룰이다.

아마 적당히 미카엘 녀석이 다른 비둘기들을 쳐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기억상실증 걸린 여주인공 톤으로.’

“저… 흐윽… 흐으으윽… 그냥… 그냥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래서 여기로 무작정 온 거야.’

“정말로… 아무것도… 갑자기…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현성 씨에 대한 것도, 그간 함께 했던 것들도, 얼굴도… 전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흐으윽… 흐윽… 그래서… 그래서….”

‘정말로 기억이 안 난다고요.’

“흐윽… 흐으으으윽… 히끅….”

‘하얀이 딸꾹질 한번 섞어주고.’

변명이라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시바 갑자기 현성이 얼굴이 기억이 안 난다고, 방주를 소환해서, 병력들을 이끌고 비둘기 둥지로 박치기를 했다는 말을 어떻게 납득할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가시가 다 빠진 아기 고슴도치 기영이의 여린 속살을 확인한 녀석에게는 이 또한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다.

녀석의 머릿속에서 지금 이기영이라는 인간은 작고 무해하고 충동적이었으며 시바 여 하튼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는 비련 그 자체였으니까.

심지어 떨어져 있는 동안 증상이 더욱더 심화된 모양이다. 본래 옆에서 말리는 놈이 있으면 더욱더 그리 생각하고 싶어지는 게 우리내 심리란 것이 아니겠는가.

옆에서 말리는 것도 아니고, 한 몸을 공유하고 있던 놈이 말리고 있었으니 여린 고슴도치가 더 여려진 모양, 동료를 잃어본 적이 있었던 녀석이었기에, 그들을 잊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이해하고 있는 녀석이었기에 더욱더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기영 님….”

“정말로… 기억이 안 난다고요.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서 무작정 이 곳으로 온 건데… 흐윽… 흐으으윽….”

했던 말 계속 반복하고, 패닉에 빠지기도 할수록, 녀석은 이쪽을 위로하듯이 어깨를 부여잡는다.

그리고,

‘어?’

“…….”

“…….”

‘저거 뭐야. 시바. 김현성 아니야?’

“…….”

“…….”

‘너 시바 김현성 아니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김현성이 시야에 비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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