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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520화 (1,518/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520화

소실(30)

2회차의 천관위였다면 어쩌면 캐슬락을 빠져나가는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홀로 캐슬락을 빠져나가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적어도 새장 속에 갇혀서 죽을 때까지 항전하지는 않았겠지.

원거리 저격수라는 최고의 파트너가 리타이어한 시점에서 이미 캐슬락의 운명은 어느 정도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 누구보다도 천관위 녀석이 그걸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위란의 죽음에 이성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이미 탈출하기에는 늦었다고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평소 캐릭터와는 다르게 끝까지 캐슬락을 지키는 것을 선택했다.

그나마 비둘기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여전히 녀석이 항전한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때였다.

캐슬락을 빠져나가는 작은 인형이 시야에 비쳐온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서는 어째서 녀석이 캐슬락에 남아 있었던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저래서였구나?’

천관위란 주니어가 눈물을 훔치며 캐슬락을 빠져나가는 것이 망원경 속에 비친다. 몇 명의 레인저들과 함께 급하게 캐슬락을 탈출해 린델로 향하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천관위 본인이 캐슬락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천관위 주니어는 이곳에서 죽게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 주니어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니 이곳에서 함께 저항하겠다는 개소리를 했다가 얻어맞기라도 한 것 같았다.

‘유전 특성으로 둘둘 말고 있을 때부터 애가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했자너.’

침착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꽤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내리고 있었지만 분노에 잡아먹히거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중요했다.

어디까지나 지금은 임무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캐슬락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린델에 알려야 했으니 말이다.

‘쟤는 아직 포기 안 했네.’

캐슬락이 무너지고 자신의 아버지가 격전 끝에 전사하기는 했지만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거기에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문 것을 보아하니, 복수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무슨 일이 생기든 간에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물론.

“…….”

“…….”

녀석의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운이 좋으면 린델까지 당도해 캐슬락의 소식을 전한 뒤 함께 저항하다 숨을 거둘 것이고, 운이 나쁘면 린델에 도착하기도 전에 비둘기들에게 붙잡히겠지.

놈의 성장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싶었지만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녀석의 최후뿐이다.

아무리 멸망할 세계선이라고는 하더라도 아이의 최후를 계속해서 지켜본다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 일이었던 터라 곧바로 시선을 돌린다.

사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천관위란 주니어의 생사가 아니라 캐슬락이 무너졌다는 사실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린델과 에베리아가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아니, 에베리아 전선이 밀리고 있는 것을 보니 이곳도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첫 번째 도미노가 무너지면 나머지도 휩쓸려 무너지게 마련, 애당초 잡았던 것보다 대륙 멸망의 진행이 더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는 걸 반쯤은 확신할 수 있었다.

때마침 미카엘이 모든 것이 다 하더라도 이쪽을 위해 희생해 준다고 발언한 참이었으니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몸을 일으키는 흐름으로 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니나 다를까.

“아직 할 수 있는 것들이 남아 있을 겁니다.”

라며 이쪽을 응원하는 멘트를 던져오고 있지 않은가. 언제나 그렇듯 절망하고 무너져 내리는 이는 결국에 마지막에는 일어서게 마련이다.

그건 고슴도치 기영이도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이기영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다.

비록 미카엘의 멘트가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조금 구리기는 했지만, 꼴에 지는 명대사라고 내뱉고 만족스러워하고 있었으니 마음이 움직였다는 리액션을 취해주는 것이 정답이었다.

“…….”

“이기영 님….”

“…….”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어떤 것도 선택하기 힘든 상황이라면… 저를 믿어 주셨으면 합니다.”

‘근데 진짜 멘트가 너무 구려. 마음이 시바 움직여지지가 않아.’

“이런 상황일수록 포기하면 안 된다는 걸… 이기영 님께서 더욱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시바 개소리는 그냥 빨리 끊어야겠자너.’

“네… 네….”

눈물을 닦고 비틀비틀 몸을 움직이자,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를 던지는 미카엘이 눈앞에 있다.

아까부터 던지던 구린 멘트들이 전부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스스로 감명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새끼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을 정도였다.

살짝 넘어지려는 이쪽을 꽉 잡아 오는 녀석. 마치 지금부터는 자신이 단단하게 지탱해 줄 수 있다는 걸 말하는 듯했지만 솔직히 와닿지 않는다.

‘그냥 말만 번지르르하고… 아니 솔직히 말도 번지르르하지도 않고, 그냥 이 새끼도 지금 뭘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자너.’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1회차 이기영을 만나러 왔어요.”

“…….”

“분명… 분명히 그가 해답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냥 머릿속에 든 게 없어. 이 새끼는….’

“저도 정확히 지금 어떤 상황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을 내리기 어렵지만… 일단은 그를 만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분명 이곳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이쪽을 꽉 지탱해 주는 녀석, 이후에는 손가락으로 뭔 거지 같은 수인을 맺기 시작한다. 아마도 1기영의 위치를 찾기 위한 술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효과가 확실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녀석의 얼굴에 살짝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뭐든지 다 해결해 줄 것처럼 입을 털어놓은 것에 비해 보여줄 게 없기 때문일까.

눈을 감고 집중 아닌 집중을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은 모양, 그야 1회차 이기영은 벨리알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계약자이기도 했으니, 녀석이 쉽게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벨리알이 72군단의 일원 타이틀을 거저 받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찾기가 쉽지 않나요?”

“단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

“…….”

‘하… 시바… 진짜 이 쓸모없는 새끼….’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다고. 이 쓸모없는 새끼야.

자연스럽게 아직까지 전투에 집중하고 하고 있는 인원들을 시야에 담는다. 아직도 계속해서 여기저기에서는 비둘기들과 인류와 뒤엉키고 있다.

승리를 위해, 빛을 위해 움직이는 우리 내 병사들이 자랑스레 느껴지기야 했지만, 지금 당장 저들에게 소비할 자원도, 여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알프스는 알프스대로, 김창렬은 김창렬대로, 하연수는 하연수대로,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병력이 밀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류한이 버텨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상황, 1기영의 관심도 놈에게 집중이 되어 있을 테니, 놈의 품으로 움직이게 최적의 시기였던 셈이었다.

미카엘 역시 이걸 이해하고 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기회가 한정적이라는 걸, 지금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끼가 이곳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달라지는 게 없다는 사실에 짜증이 일고 있었다.

물론 혼자 움직이는 것보다는 낫다. 최소한 일신의 안전은 보장된 셈이었으니까.

신파극장이 끝나고 기다렸다는 듯이 비둘기들과 좀비둘기 새끼들이 뒤엉켜 닥쳐오는 상황, 놈은 계속해서 밀려들어 오는 적들을 지워 버리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운신의 폭이 자유로울 것 같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최우선을 이쪽의 안전에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염병을 떠네 진짜.’

“이기영 님!”

전장의 한가운데에 들어선 이후에는 더더욱 가관, 물론 놈의 스펙은 압도적이기는 했지만, 물밀 듯이 밀려 들어오는 녀석들에게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세계수 전선에 한쪽 축이 마침내 무너지는 것이 망원경 속에 들어왔다. 아직까지 완전히 무너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애초 상정했던 것보다 더, 더욱더 여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물론, 운이 좋으면 수 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들기는 했지만 대놓고 멸망을 앞당기려고 하고 있는 놈들 덕분에 언제 끝날지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린델이 아직 남아 있기는 했지만, 세계수 전선에 있는 세라핌과 도미니온스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은 채 린델로 복귀한다면, 아무리 진 군사와 선희영이 버티고 있다고는 해도….

‘시바… 짜증 나는데….’

물론 가장 짜증이 일었던 것은 이 새끼가 쉬이 작별 인사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 미안한 이야기인데… 이제… 슬슬 작별인사 할 때 되지 않았어?’

“…….”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화끈하게 갈려 나가겠다고 이야기할 때 안 됐냐고.’

“…….”

‘지금이 그 타이밍인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보이는 것 같지도 않고, 지금 계속 몇 분째 같은 자리만 뱅뱅 뱅뱅 돌면서 비둘기들이랑 드잡이질이나 하고 있고, 시간은 계속 가는데 시바 네가 하는 게 없잖아.’

착각하는 게 아니라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대륙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게 본능적으로 들기 시작한다.

평소와 같이 해가 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주황빛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 아무런 전조도 없이 어두워지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치고 있다.

‘이거 괜찮은 거 맞아?’

“…….”

‘진짜 괜찮은 거야?’

“…….”

‘아니야. 시바 초조해하지 말자.’

이처럼 대륙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게 멸망의 신호탄이 맞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다.

구태여 분류하자면 초저녁 즈음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기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다.

“미카엘 님?”

“…….”

“미… 미카엘 님?”

‘너 진짜 이럴래? 슬슬 작별 인사 해야 하는 거 아니야?’

“……”

‘1기영 찾기는 일단 포기하고… 좀 막 눈물 흘리면서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것 같다고 고백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괜스레 머리를 부여잡으며 숨을 헐떡였을 때였다. 이제는 정말로 얼마 남은 시간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였고, 아직까지도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미카엘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녀석의 눈에도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보이고 있을 터다. 지금 대륙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마지막 항전이 분명히 시야에 비치고 있을 터다. 이 둥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투들 역시 눈에 비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당연히 김현성 역시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김현성보다 이쪽이 빨라야 한다는 것에 있다. 아직까지도 놈은 청승을 떨고 있는 중이지만, 이쪽 역시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둥지마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저 먼 북부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씩 조금씩 세계가 떨어져 내리려고 하는 것 같다.

‘시발… 시발 진짜….’

아니나 다를까 그 모습을 본 미카엘이 마침내 입술을 꽉 깨물며 입을 열었다.

“이기영 님.”

“네… 네?”

“…….”

“…….”

“일단 이 둥지를 벗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

“위험합니다. 계속해서 이곳에 머무르다가는 어쩌면 삼켜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

“…….”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이 새끼는….’

“지금은 일단 안전한 장소를 먼저 확보하고, 이후에….”

‘그러니까 시바 뭔 개소리를 하는 거냐고.’

“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지금 이 방주 안으로 들어온 것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요. 지금 몸을 내빼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거예요. 만약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이 시점으로 이렇게 당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고요.”

“…….”

“거기에다가 나… 기억이 안 난다니까요? 점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잖아요. 믿어달라고 하셨잖아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면… 미카엘 님을 믿으라면서요. 포기하면 안 된다면서요?”

“…….”

“지금은 물러서면 안 돼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저는 이곳에 남을 거예요.”

“…….”

“…….”

“김현성 님에게 따로 부탁받은 것이 있습니다.”

“네?”

“만일 이기영 님께서 위험에 처한다면, 무조건적으로 이기영 님을 보호해 달라는….”

“…….”

“…….”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리고 내가 시바 그 말은 또 어떻게 믿어?’

“하지만 지금은 어떤 의무감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이런 곳에서 져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대륙과, 아니, 이 차원에서 당신이 필요하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단순히 김현성 님의 부탁이나 계약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최악의 상황이 생긴다고 해도, 이기영 님께서는, 최소한 지금은 이 무대에서 나가셔야 합니다. 힘드실 거라는 걸 압니다. 그 어떤 것보다 견디기 힘드실 거라는 걸 저도 이해합니다. 긴 여정이 될 수도 있고, 긴 싸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김현성 님을 완전히 잊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그 여정에는 언제나 제가 이기영 님의 옆에….”

“…….”

“옆에…서….”

“야.”

“…….”

“…….”

“네가 어떻게 개새끼야. 감히 김현성을 대신하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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