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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523화 (1,521/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523화

조우, 해후(1)

멍하니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대충 봐도 고장이 난 것 같은 모습이라고 할 만했다. 재기불능 상태로 들어간 것 같기는 했지만 애초에 원하던바.

놈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의 복수를 한 셈이었다. 육체를 대신해 영혼을 갈기 찢어버린 것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똥 밭을 굴러도 살아 있는 게 더 낫다는 게 이쪽의 지론이기야 했지만, 시간 관계상 딱 적당한 종류의 복수를 했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남은 평생을, 아니, 놈의 수명을 생각해 보면 영겁의 시간을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과 오늘날의 후회 속에서 살아야 할 테니 말이다.

말 몇 마디로 가성비 넘치는 선물을 안겨준 셈이라는 거다.

‘그래. 시바. 그렇게 사는 게 좋으면 살아야지. 뭐 어떻게 하겠어.’

무리한 요구였고,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는 걸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녀석이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화살표와 책임을 떠넘기는 것도 불합리하다는 것을 일부 인정하고 있기는 했지만 어쩌겠는가.

본래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것보다 주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것이 더 편하게 마련이다.

또 엄밀히 말해 미카엘에게 책임 소재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녀석의 지분이 그 누구의 지분보다 크다.

루시퍼와 공모해 대륙에 밀입국한 것부터, 김현성과 별 거지 같은 계약을 한 것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놈이 망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진짜 억지로 믹서기에 넣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돼. 진짜. 적어도 살아 있자너.’

망원경으로 슬그머니 녀석을 다시 한번 돌아본 것은 당연지사.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참을 수 없었는지, 주저앉고 헛구역질을 하고 이는 것이 눈에 보인다.

평소의 표정은 온데간데없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조금 속이 시원해지기도 했지만, 조금 더 이 새끼가 괴로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와 꽂힌다.

“…….”

‘아니야. 시바. 했던 말처럼 완전히 기억 속에서 잊어버리는 게 더 나아.’

그게 놈에게 더 알맞은 복수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이 새끼 신경 쓸 여유도 없자너.’

애초에 버릴 패에게 시간을 너무 많이 썼고, 너무 중요한 정보를 흘렸다. 플랜 B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더 머리가 아파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녀석과 드잡이질을 하는 동안, 시바 김현성을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조금만 더 절망 타임을 가져주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슬퍼할 시간도 없는 바쁜 꿀벌 모드로 진입한 것처럼 보였다.

그야 녀석의 눈이 있었으니 더 이상 지체할 만한 시간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 대륙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북부 쪽에서부터 하늘이, 아니, 세상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미 망원경 속에 비치는 대륙 곳곳에서 이상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화국의 끝에서, 왕국연합과, 연방에서.

그나마 아직까지 인류가 저항전선을 펼치고 있는 곳에서는 이런 현상들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도미노마냥 무너지는 속도가 빠르다고 느껴진다.

타이밍이고 나발이고 녀석이 알 턱이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지금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냥 조금 더 찌질해 있지. 시바.’

심지어,

-아악! 아아아아아악!

-살려….

-피해… 피해!!!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일어서….

-파스텔….

-일어…서….

-파스텔! 파스텔!!

-빨리 일어나서… 도망… 쳐… 페인트… 린델… 린델로 가.

-팔레트!! 루스빌라아!!! 파스텔이… 파스텔이!!!

세계수 전선에서 금색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김현성과 함께 무대의 뒤편에서 봤던 세계수 전선의 마지막 장면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파스텔의 마지막을 굳이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지금은 세계수 전선에 굳이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 의미 있는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개를 돌려 버린다.

마지막에 다다른 세계수 전선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이시여. 승리를! 제발! 승리를!

-언제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물러서지 마라! 물러서지 마라!

-발… 발할라!

이미 피투성이가 된 채로,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억지로 무기를 고쳐 잡고 전진하고 있는 병사들의 마지막도 얼마 남지 않았다.

물론 비둘기들 역시 몸이 성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아직도 승리를 외치고 있는 병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들이 이곳에서 결국 마지막을 맞이할 것임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간혹 신을 원망하며 죽어가는 이들의 목소리도 들려올 정도, 하지만.

-목소리로 답을 주시옵소서! 신이시여!!

‘대답 못 해줘.’

저들의 목소리에 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내게 조금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조금이라도 저 병사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을지 모르겠지만, 이미 필요 이상으로 투자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계속해서 대륙 단위로 일반 퀘스트를 내렸고, 하늘을 나는 방주까지 이곳에 불러왔다.

아껴 쓴다고 아껴 쓴 자원이었지만 정말로 동나기 일보 직전의 상황까지 치달았던지라 망원경을 유지하는데 사용할 자원도 부족하다.

애초에 쥐꼬리만 했던 마력은 동이 나버렸고, 비축분으로 가지고 왔던 포션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남은 것은 항상 품에 가지고 다니는 단검과 방어구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겉옷 정도, 이름도 기억 안 나는 호위무사도 쳐낸 상황이었으니, 농담으로라도 상황이 좋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현 시점에서 1기영을 찾아서 홀로 헤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다.

‘김현성한테 합류해야 하나.’

“…….”

“…….”

‘괜히 시바 돌아가게 생겼네. 시바 처음부터 둘이 마주쳤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니야.’

아니, 이름 모를 새끼가 옆에 없었더라고 하더라도 꼭 이야기가 잘 풀릴 거라는 보장도 없다.

김현성이 이쪽과 만나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언제나 그렇듯 도망치거나 하는 종류의 음흉한 짓거리를 하지 않을까.

지금 녀석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1기영과 마주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사실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필수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당연히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죗값을 치르고 싶다거나, 녀석에게 사과하고 싶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 새끼도 잘 모르는 거야.’

정확히 어떻게 해야 회귀라는 절차가 이루어지는 건지, 어떻게 해야지 스스로 갈려 나갈 수 있는 건지에 대한 해답을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1기영이 자신을 회귀시킨 사람이었으니 녀석이 무언가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시간은 촉박하고 선택지는 제한되어 있다.

일단은 어디로든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발걸음을 재촉했을 때였다.

조금씩 조금씩 주변의 풍경이 바뀌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뭐야?’

발걸음을 내디딜 때, 순식간에 시야가 뒤바뀐다. 전쟁터에서 으레 들릴 만한 소음은 들리지 않았고 시체와 피, 혈육 같은 것들도 보이지 않는다.

갑작스레 풍경이 변한 상황이 마치 육망성을 탔을 때와 유사했던 터라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진다.

육망성을 탄 것은 상관이 없지만, 혹시나 거지 같은 시간 축으로 이동되어 다시 태초 마을로 돌아간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던 탓이다.

당황해 곧바로 망원경을 돌려보자 다행히 시간 축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너진 캐슬락도, 무너져 가는 세계수 전선도, 눈물을 닦고 일어나는 김현성도,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이름 모를 작자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내가 있는 장소는 비둘기의 둥지 안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 장소는….

새장 안의 새장,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장소였다.

자연스레 루시퍼가 이쪽을 알 수 없는 장소로 이동시킨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뇌리에 스친다. 아니, 어쩌면 시스템의 의지일지도 모른다.

둘 중 누구의 작품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나를 이곳으로 이동시킬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

내게 무엇인가를 원한다기보다는 이곳에 도착하는 것이 마치 필연처럼 느껴졌다는 것.

자연스럽게, 아니, 어떻게 생각해도 부자연스러웠지만 이 복도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무엇이 존재하는지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속도를 천천히 줄여 저벅저벅 걸어 나간 것은 당연지사.

‘도와준 거야? 아니면 분탕 치려는 거야?’

“…….”

“…….”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쁘지는 않자너.’

강제로나마 선택지를 줄여준 셈이다. 그녀는 내가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어떤 거래를 걸어오지도 않았다. 다만 이 극의 마지막을 보고 싶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겼다가.

멈춘다.

장소와 어울리지 않은 작은 싸구려 여관이 시야에 비쳐온다. 당황스러운 풍경이기야 했다.

누가 봐도 비둘기의 둥지처럼 보이는 장소 안에 굳이 저런 여관을 지어놓을 생각을 하는 게 우습기는 했지만 어째서인지 한 번 정도는 본 것 같은 건물이기도 했다.

2회차에서 봤던 것이 아니다. 그래, 언젠가 카스가노 유노의 기억 속에서 본 것 같은 건물이다.

아마 박덕구와 이기영이 가장 처음, 그리고 가장 오랜 시간 머무른 싸구려 여관이었을 터다.

녀석의 심신안정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추억팔이를 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의도적으로 예전에 머물렀던 여관과 비슷한 여관을 올렸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녀석의 미적 감각이 완전히 제로라는 사실을 말이다.

녀석의 보금자리 안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영 꺼림칙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일단은 발걸음을 옮긴다.

싸구려 여관을 눈앞에 둔 이후에는 곧바로….

‘문을 두드려야 되나?’

똑똑. 문을 두드리자마자 열리는 문, 함정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여관이 파손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조금은 긴장한 느낌으로 안에 들어서자, 싸구려 여관들이 으레 그렇듯이 접수대와 식당이 눈에 비쳐왔다.

빅보이 새끼들과 자주 다녔었던 여관의 냄새가 그대로 풍겨 온다. 싸구려 럼주, 스튜 냄새, 씻지 않은 새끼들의 땀 냄새.

가장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식당의 점원들과, 식당의 머무르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비쳐왔다는 것.

당연히 진짜 인간이 아니다. 이미 죽은 이들이었고, 프로그래밍된 대사만 지껄이는 새끼들이었다.

“하하하하핫! 건배! 건배!! 오늘도 힘찬 하루를 위하여!”

“저희 잠자리 여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몇 분이신가요?”

“요즘에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있나?”

“괜찮은 의뢰가 있기는 한데… 저번주에 파티원이 뒈져서. 제길… 혹시 여기 위층에 머무르는 신입들, 덩치 큰 전사랑 같이 다니는 비실비실한 놈에 대한 정보는 있나?”

“이제 막 튜토리얼을 졸업한 녀석들인 것 같더라고… 의외로 덩치 큰 쪽보다는 비실비실한 쪽이 더 쓸 만하다는 평가야.”

“잘 키우면 괜찮을 것 같은데… 한번 데려가 볼까?”

“그러든지.”

‘이 새끼는 진짜 또라이 같자너. 진짜 무섭자너. 무서워.’

“하하하하핫! 건배! 건배!! 오늘도 힘찬 하루를 위하여!”

“저희 잠자리 여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몇 분이신가요?”

“요즘에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있나?”

“괜찮은 의뢰가 있기는 한데… 저번주에 파티원이 뒈져서. 제길… 혹시 여기 위층에 머무르는 덩치 큰 전사랑 같이 다니는 비실비실한 놈에 대한 정보는 있나?”

“이제 막 튜토리얼을 졸업한 녀석들인 것 같더라고… 의외로 덩치 큰 쪽보다는 비실비실한 쪽이 더 쓸 만하다는 평가야.”

“잘 키우면 괜찮을 것 같은데… 한번 데려가 볼까?”

“그러든지.”

‘이게 정신병 걸린 새끼가 아니면 뭐냐고 도대체.’

“…….”

“…….”

“아아아. 내려왔다. 드디어 내려오는구만. 뭐 하는지 방에 처박혀서 나오지를 않더라니….”

혹시나 박덕구까지 만들어서 데리고 다닌 것은 아닌지 싶기도 했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다.

“덩치 하나는 기가 막힌데 말이야. 겁이 많은 건지… 트라우마 때문인 건지… 참 아쉽네. 아쉬워.”

당황스러웠던 것은 1층 식당에 있는 놈들이 마치 박덕구를 실제로 보고 있는 것마냥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있지도 않은 돼지 새끼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내는 것이 들려온다.

“어이 형씨들! 여기 와서 같이 한잔하면서 이야기나 들어볼 텐가? 고블린들 좀 잡으러 가려고 하는데 사람이….”

짝, 하는 손뼉 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떠들고 있는 시체들이 동시에 고개를 위로 올린다.

“…….”

“…….”

그리고….

“어떻게… 찾아왔구나? 병신 새끼.”

한쪽 손에 도끼를 든 채로 나를 바라보는 1기영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시바… 쫌… 세 보이는데?’

“…….”

사연 있는 히든 보스 몬스터 같은 등장이었다.

*다음 페이지에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황정연 일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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