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527화 (1,525/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527화

조우, 해후(5)

알렉스, 캐넌, 조지라고 불리던 놈들이 누군가가 자신들을 이끌어주고 있다고, 퍼즐 조각들이 모이고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아마 녀석들이 느꼈던 감정과 비슷할 것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었지만, 지금 이곳에서 퍼즐 조각들이 모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와 녀석이 만난 것도, 박덕구와 카스가노 유노가 이곳으로 찾아온 것도, 아마 김현성도 이곳으로 오고 있겠지.

모두 출발점은 다르고 각자 지향하는 목표도 다르기는 했지만 결국 종착지는 이 싸구려 여관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슬그머니 1기영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아아. 내려왔다. 드디어 내려오는구만. 뭐 하는지 방에 처박혀서 나오지를 않더라니….”

“덩치 하나는 기가 막힌데 말이야. 겁이 많은 건지… 트라우마 때문인 건지… 참 아쉽네. 아쉬워.”

“어이 형씨들! 여기 와서 같이 한잔하면서 이야기나 들어볼 텐가? 고블린들 좀 잡으러 가려고 하는데 사람이….”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 때문이 아니다. 아마 녀석의 눈에, 혹은 녀석이 설치해 놓은 무언가에, 뭐가 됐든 간에 녀석에게는 지금 박덕구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이거나 느껴지는 게 분명했다.

애초 내가 이곳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 혹시 모를 다른 침입자들을 경계하는 것 정도야 당연하겠지.

녀석의 얼굴에 싸우고자 하는 의지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죽자 살자 달려들었던 얼굴의 독기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바로 옆에 있던 이쪽 역시 신경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버린 모양이다.

순간적으로 놈의 뒤통수를 후리기에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 녀석은 싸울 의지가 없다. 돼지 새끼가 이곳으로 온 걸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돼지 새끼가 2회차에서 안정적이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놈은 변화하는 것보다 박덕구의 현재의 삶을 지켜주는 것을 선택했다.

얼핏 보면 박덕구를 위한 희생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아마 내가 이전에 말했던 대로 자신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김현성 없이 본인이 직접 2회차를 집도한다고 해서 돼지 새끼가 최고의 결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자신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냐고.’

녀석이 세계를 되돌리고 싶은 이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돼지 새끼가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데, 다시 한번 같은 미래로 닿을 수 있을지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치고받고 싸운 거 아니냐고….’

그냥 처음부터 우리 돼지 새끼가 이렇게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이야기 해줬다면 이렇게 피 튀기고 부끄러운 싸움을 하지 않았을 수도… 물론 녀석이 내 말을 믿어줬을지는 미지수다.

지금 1기영이 갑자기 내 말을 믿고 고장 나버린 이유는 아마 직접 박덕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겠지.

1회차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변함없고, 바보 같은 그 모습을 말이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어느새 적막이 감돌고 있는 싸구려 여관의 밖에서 박덕구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니, 그러니까 대관절 여기가 어딘지, 지금은 또 무슨 상황인지 말해줘야 할 것 아니요! 무녀님! 아무 생각 없이 따라오기는 했는데…. 도대체 어디 형님이 있다는 거요?!”

“…….”

“그리고 저 여관은 또 뭐고! 아! 저기 들어가면 형님이 있는 게 확실한 거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니까!”

“…….”

“쓰읍… 이게 갑자기 무슨 상황인지… 아니 쫌 뭐라고 말 좀 해주쇼! 궁금해서 죽을 것 같은데….”

“…….”

소리만 들으면 점점 여관의 안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순간적으로 굳은 1기영이 눈에 띈다.

“거 들어가도 되는 거요?”

‘이 새끼… 무섭구나.’

“아… 어….”

“형님? 형님이요?”

‘겁쟁이자너.’

일단은 이쪽에서 대신 말을 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잠깐 기다려.”

“어?! 진짜 형님이요?! 아니, 여기 뭘 하고 있는 거요? 지금 바깥에 완전 난리 났다니까! 하늘도 무너지고 막! 옛날에 우리가 싸웠던 비둘기들이랑 사람들이랑 서로 죽어 나가고 있는데! 완전 분위기 막장이요.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잠깐 기다리라니까! 이 돼지 새끼야!”

“아니, 왜 갑자기….”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어째서 1기영이 겁을 집어먹고 있는지는 뻔했다. 아마 지금의 모습을 돼지 새끼에게 그다지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쪽은 1회차와 2회차를 분리할 수 있었지만 녀석은 그게 불가능한 모양, 아니, 적어도 돼지 새끼는 분리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1회차에서도 줄곧 1기영의 브레이크를 잡아줬던 것이 바로 박덕구가 아니었던가.

박덕구는 1기영이 무너지는 모습을 원하지 않았고, 최소한의 선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원했다. 돼지 새끼에게 있어서 1기영은 영웅이었고, 호인이었을 것이다. 한데 지금의 녀석의 모습은….

‘그렇게 안 보이자너.’

누가 보더라도 사이코패스 도끼 살인마처럼 보인다. 얼굴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고, 딱히 다른 묘사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는 모습이다.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이미 너무 멀리 왔고, 너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있을 것이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겉모습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거다.

저런 모습으로, 저런 상태로 돼지 새끼를 마주할 용기가 없는 것이 이해가 간다. 심지어 지금은 이쪽도 함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가. 적어도 선택권은 이쪽에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극단적으로 말해 내가 박덕구에게 놈이 적이라고 호소할 수도 있다. 물론 돼지 새끼가 꽤 혼란스러워하겠지만, 결국에는 이쪽이 진짜라는 것을 알아차릴 확률이 높다.

궁지에 몰렸다면 궁지에 몰렸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1기영이 지금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리 만무, 지금은 꼬리 내린 개마냥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동정심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그런 감정을 보일 여유도 없다. 은근슬쩍 녀석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어떻게 할래?”

“뭘….”

“만나보는 게 좋겠지? 아니, 이야기라도 나눠보면… 포기할 수 있겠어?”

“…….”

“…….”

대답은 들려오지 않지만, 답을 들은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녀석도 단번에 이해한 것이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녀석에게 자비를 베푼 셈이었다. 물론 박덕구와 카스가노 유노가 어떤 선택을 할지 확신할 수 없어 내린 선택이기도 했고, 이전에 무대의 뒤편에서 봤던 1유노가 말했던 ‘옳은 선택’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울리기도 해서 내린 선택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녀석의 지금 심정을 이해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죽자 살자 싸워온 주제에 놈을 이해한다는 게 내가 생각해도 웃기기는 했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내 마음이 그렇다.

갑작스럽게 뜨거워졌던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순수하게 놈에게 동정심이 들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승자가 패자에게 보내는 마지막 자비일 수도, 그것도 아니라면 녀석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여러 가지, 스스로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무척 많았지만 이게 가장 나은 선택지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어떻게 할 거지?”

“너는 돼지 새끼를 만나고, 나는 김현성을 만나는 거지 뭐.”

“목적이 뭐야.”

“목적은 항상 같아. 내 걸 지키는 거. 그냥 이성적으로 판단한 거지. 네가 내 모습으로 돼지 새끼를 만나면 포기해 줄 거라는 확신이 섰으니까. 그리고 김현성은 지금 나보다는 너를 찾고 있을 테니… 나는 네 모습으로 기다리는 게 맞고… 지금 이 상황에서 서로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는 거지… 딱히 다른 이유가 있거나 함정을 파려고 하는 건 아니야. 그럴 이유도 없고.”

“…….”

“네가 내게 유리한 거래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딱히 그런 게 아니라는 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냥 퍼즐들이 모였으니 각자 할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

“돼… 돼지를 나랑 만나게 해줄 이유가 있나? 나는 그것부터가….”

“그건 네가 이해할 부분이 아니야. 나는 이게 옳은 선택이라고 결정을 내렸어.”

“장담할 수 있어?”

“장담할 수 있지.”

“…….”

“…….”

“그럼… 어떻게 되돌릴 거지? 아니, 어떻게 할 거지? 여기에 알타누스는 없어. 네가 가지고 있는 현자의 돌이 완벽하지 않다는 건 이미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고. 어떻게 이걸 되돌릴 건데?”

“현자의 돌이라는 건 없어. 병신아.”

“…….”

“그렇게 지 좋을 대로 기적을 일으켜 주는 물건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어? 뭐가 어떻게 됐든 간에 그건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고, 딱히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지금 내게 있어서 중요한 건, 네가 포기할 수 있느냐 없느냐니까. 아니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기는 해.”

‘이미 결심한 것 같자너.’

“…….”

‘어차피 그건 뭐 돼지 새끼 이후에 지가 판단하겠지 뭐.’

“가면 줘.”

“응.”

“옷도.”

“응.”

갑작스레 이곳에서 옷을 바꿔 입는 것이 조금 웃기기는 하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옷이고 별 의미도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녀석도 지금 이 갑작스러운 상황이 당황스러운지, 조금은 뻘쭘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이미 지쳐서 싸울 체력도 없기는 했지만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는 서로가 좀 우습다.

그 와중에 살짝 신기했던 것은 녀석의 옷이 꽉 맞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들어맞는다.

슬쩍 깨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어느새 완전히 자라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천천히 크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뭐 시바 성장했다는 걸 보여주는 장치라도 되는 거냐고.’

우연인지 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나 자신에게 양보하기로 결정한 순간에, 녀석을 개미 손톱만큼 이해하게 된 순간에, 이쪽의 몸이 다 자란 것을 자각했다는 게 말이다.

혹시나 내가 쓸데없는 의미부여를 한 것은 아닌지 자가 검열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지만, 박덕구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병신이 된 녀석의 모습에서 나를 조금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인형이나 치워. 돼지 새끼 놀랠라.”

“응.”

“네가 현자의 돌이라고 만들어 놓은 건 어디에다 놨어?”

“지하에.”

‘넌 근데 정신 좀 차려야 쓰겠다.’

“형님! 뭐 하는 거요! 도대체! 거기 또 누가 있는 거요! 빨리 이야기 안 하면 이거 문 부수고 들어갈라니까!”

“아 쫌 기다리라고! 이 돼지 새끼야!”

“아… 왜 소리를 지르고… 알… 알았다니까!”

“…….”

“…….”

“난 잠깐 내려가 있는다. 돼지 새끼랑 카스가노 유노 데리고 위로 올라가. 쌓인 이야기를 하든가 말든가. 궁금한 걸 물어보든가 말든가. 난 김현성 만날 준비해야 하니까.”

“응….”

‘아예 병신 다 됐네. 이 새끼 진짜.’

동공이 쉴 새 없이 흔들린다. 숨소리도 이미 거칠다. 숨을 쉬는 방법을 까먹은 것처럼 보였고, 극도로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뭐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지금 녀석의 머릿속에서는 아마 곧 박덕구를 만난다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어가 있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건지, 무슨 말을 들어야 하는지, 계산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 진짜 못 참겠다니까!”

“…….”

“문은 네가 열어줘.”

“어… 어….”

“난 들어간다.”

“어….”

그리고,

이쪽이 지하로 발걸음을 옮긴 직후에, 끼이익 거리는 문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망원경으로 그 모습을 바라본다.

1기영 녀석은 아까부터 꽤 긴장한 모양새. 아마 지금 놈의 눈동자에 평소와 다름이 없는 박덕구의 모습이 눈에 비쳐올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이 사람 좋고, 멍청하게, 병신같이, 바보처럼 웃고 있는 모습 말이다.

“어… 아….”

순간적으로 녀석이 숨을 멈춘다.

“형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감정을 숨기는 게 무리라는 사실을 녀석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덕….”

한 마디라도 내뱉으면 곧바로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얼굴이다.

“뭐요? 살이 빠진 것 같은데! 아니! 눈은 또 왜 그렇고! 왜 이렇게 다친 거요?!”

팔과 다리가, 턱이, 몸이 덜덜 떨린다.

“어… 으… 덕구… 야?”

“아니, 뭐라고 말을 해보라니까. 무녀님. 우리 형님 좀….”

“흐…어…으으어어어…으으윽… 으으끄으어어윽… 으윽… 흐으으으윽….”

“어… 어어어?”

“어…으…흐으으윽….”

“형님?”

“미…흐…어…으으으어어어윽… 미안해… 흐으으윽… 미안….”

그대로 허물어지는 놈과 그런 녀석을 받아드는 돼지 새끼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미안해에… 흐으으으으으윽… 미아내….”

이번에는 놈이 어려진 것 같은 모양새였다.

*다음 페이지에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공화국 3좌 일러스트입니다! 이름은 미정입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