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32화
조우, 해후(10)
어떤 각오로 녀석이 이곳에 섰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솔직히 김현성의 심정을 깊게 이해할 생각이 없기는 했지만, 발걸음을 주저하고 있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녀석이 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야 마침표를 찍는 것은 녀석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힘들어하는 일이다. 저명한 화가도, 작가도, 모두 마침표를 찍는 것을 어려워한다.
물론 김현성은 화가나 작가 같은 것이 아니었지만 아마 압박감은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김현성이 찍으려는 마침표는 쓸데없는 편지나, 연설문 따위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1회차, 2회차를 포함한 본인의 삶, 인생, 그 자체였다.
“…….”
“…….”
‘아무리 그래도 너무 우물쭈물거리기는 하자너.’
“…….”
“…….”
한걸음이면 달려올 수 있는 거리를 몇 분째 걷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도 머릿속으로 쉴 새 없이 본인이 해야 할 말을 정리하고 있는 도중일 터였다.
1기영을 만나는 건 녀석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조금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면….
‘이 새끼 눈치채는 거 아닌가?’
내가 진짜 1기영인지, 2기영인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김현성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쪽을 알아보는 건 김현성 쪽이 박덕구보다 더 낫다. 조금 복잡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실제로 김현성은 꽃기영과 이쪽을 구별해 낸 전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때보다 녀석이 알아차릴 확률은 적다.
김현성이 알고 있는 이기영은 아직 전부 다 자라기 전이었고, 지금 이쪽은 전부 다 자란 상태였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가면에도 인식저해 마법이 걸려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했고, 지금 김현성이 심신미약 상태로 접어들었다는 것도 놈이 날 알아차릴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다.
물론 가장 커다란 이유는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끊겨 있다는 것이었다. 김현성의 눈도, 내 눈도 여전히 되돌아오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영혼은커녕 아무것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김현성은 돼지 새끼마냥 후각이 발달하지도 않았다.
‘회귀자 사용설명서 때문이었나 봐.’
어쩌면 회귀자 사용설명서 때문에 녀석과 내가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에 들어온다.
지금 이곳까지 오게 된 데에는 수많은 이유와 원인, 또 우연이 겹쳐 있겠지만 어쩌면 정말로 원인이 되는 것은 오히려 회귀자 사용설명서 때문일지도 모른다.
회사설 아래에 서로가 서로를 전부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천막을 걷어내자 눈에 보인 것은 미지가 아니었던가.
무대의 뒤편에서 확인한 것도 그냥 편린에 불과하다. 대화를 하지 않아도, 굳이 함께 있지 않아도, 서로를 알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고름이 터진 것이다.
어쩌면 이번 기회가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기는 했고, 그것이 이상적인 해결책이라는 생각도 함께 들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한테는 아직 어려운 일이야.’
지금 당장 가면을 벗고, 녀석과 허심탄회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이미 상황이 꼬인 현 시점에서는 가면을 벗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도 없고 말이다.
‘다시 도망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뭐.’
“…….”
여러 가지 잡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김현성이 이쪽의 앞에 당도했다.
아직까지 여관에서 그 듀오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진지해지기 힘들기는 했지만 정면에서 본 김현성의 표정을 보자 괜스레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오랜만이네. 김현성 백작.”
“…….”
“아니, 처음 뵙겠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해야 하나. 2회차의 김현성?”
“…….”
“아! 이것도 아니지. 처음 뵙겠습니다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 너는 나를 만났었고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너희가 어쩌다 이곳으로 흘러들어오게 된 건지, 그리고 이 대륙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왜 이곳에 온 것인지 알아. 아마 네가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온 것일 테지.”
“죄송하다는….”
“웃기는 소리야.”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웃기는 소리라고.”
불같이 화를 내며 또라이처럼 구는 것보다는 지금 이런 스탠스가 더 어울린다. 실제로 1기영 역시 위와 같은 태도를 취했으니 말이다.
조금은 통달한 것 같은 모습이었지 아마. 이 모든 상황에 조금 허무함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어. 현성아. 당시에 느꼈던 분노는 모두 풍화되었고, 지금은 그 기억마저도 흐릿해. 물론 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던 적도, 내 몸이 타 버릴 것 같은 화에 미쳐 날뛴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불길이 일지가 않아.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미쳐 있었거든. 솔직히, 지금은 네가 저지른 일들을 전부는 아니지만 조금은 이해해. 너를 그렇게 미워하지도 않아. 1회차의 네가 아니라 2회차의 너이기 때문에 더욱더.”
“…….”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네 사과는 그다지 받고 싶지 않아. 1회차의 김현성의 사과라면 모를까.”
“…….”
“결국 네가 원하는 건, 어떻게 이걸 되돌릴 수 있는지에 대한 답 아니야?”
“그건….”
“정확히는 네가 어떻게 해야 알타누스를 대신할 수 있는지 아니냐고… 네 본심이 어떻든, 본의가 어떻든 간에, 달걀이 먼저든, 닭이 먼저든 간에 네가 무언가를 얻기 위한 사과를 받고 싶을 리가 없잖아. 그런 사과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너와 내가 사과를 주고받을 만한 관계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주눅이 든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당연히 정곡을 찔렸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놈이 이곳으로 온 이유는, 1기영에게 자신을 이용해 이 대륙을 구해달라 부탁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물론 나름대로의 결착을 짓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단언하건대 그 마음도 무척 컸을 것이다. 무대의 뒤편에서 모든 진실을 확인한 이후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다른 목적이 있다면 어떤 마음이든 간에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법이다.
‘이걸 어떻게 1기영 앞에 내놓겠냐고.’
피해자에게 원하는 게 있어서 찾아온 가해자의 사과라니, 단언하건대 풍화된 분노도 다시 되돌아오게 만드는 스펙타클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적어도 염치가 있다면 녀석은 이곳에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슬그머니 놈을 올려다보자, 김현성이 다시 한번 우물쭈물거리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여전히 뭐라고 말을 이어나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넌 끝까지 너만 생각하는 구나. 현성아.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알 것 같아. 네가 내게 이렇게 온 이유도, 결국에는 2회차 때문이잖아. 나를 바보로 아는 건 아니지?”
“…….”
“아니, 널 이타적이라고 말해야 하는지, 이기적이라고 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녀석의 표정도 잠시였다. 이윽고 조금 생각을 정리한 듯한 모습을 취한 김현성은 한층 더 단호해진 얼굴로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야?”
“단순히 원하는 게 있기 때문에 이렇게 찾아와 구걸하듯이 사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대로 당신과 제 관계가 일방적으로 사과를 받고 줘야 할 관계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나도 네게 같은 상처를 줬다는 거야? 그건 복수이며 집행이었어. 나는 내 행동에 대해 후회한 적은 있지만, 이 집행과 복수에 대해 후회한 적은 없었어. 오히려 아쉬웠을 정도야. 너를 포함한 다른 멍청한 놈들을 더 고통스럽게 죽이지 못했다는 게 너무나도 후회 돼. 조금 더 그놈들의 비명 소리를 들었어야 했는데. 아니, 아예 죽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었어야 했어.”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가 당신에게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당신의 복수가 정당하지 않았다는 뜻도 아닙니다. 당신의 복수는 이유가 있었고, 정당했으며, 저 역시 만약 당신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당신과 같은 일을 벌였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저 역시 2회차를 시작한 직후에, 당신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
“그리고 여전히, 당신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과 동시에, 당신을 증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기영 씨가 아니었다면, 아니, 만약… 아니었다면, 저는 당신이 제게 저지른 일들을 용서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당신에게 저지른 일과는 별개로 말입니다. 이성적으로는 제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시작이 저로 인해 비롯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건가 봐? 염치없는 새끼. 네가 감히 누구를 증오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이라는 건 대개 자신의 입장을 더 우선시하게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김현성의 말대로, 또 1기영이 겪은 대로, 시작은 김현성이었고, 1기영은 복수와 집행을 한 것에 불과하기야 하다.
그래, 1기영의 복수는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 분노와 악의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에서, 네가 한 짓이 있으니 1기영을 증오할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1기영 또한 많은 일들을 겪었듯이 김현성 또한 많은 일들을 겪었으니 말이다.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지옥 같은 시간을 한순간에 잊는 것은 부처가 아닌 이상에야 불가능하다. 김현성의 안에 1기영을 향한 증오가 남아 있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했다.
돼지우리 발언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진짜 돼지우리로 쳐넣을 생각 만만이었자너.’
김현성이 염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녀석은 자신의 감정에 무척이나 솔직해져 있는 상태였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네게 오는 심판을 받아들이면서 구걸하는 것이 전부야.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라고 지시한 개새끼야. 네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증오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제가 저지른 죄는 평생이 가도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그걸 되돌릴 방법이 없다는 것도, 갚을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걸 실수였다고, 막으려고 했다고 자기변명을 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곳에 있었다고 해서, 당신이 저지른 모든 일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어? 나라고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결국 이곳에 온 게 나를 비난하기 위해서였다, 복수는 정당했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과했다고 말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네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 나는 지금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현성아. 뭘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 네가 내가 왜 이런 말들을 하고 있는 건지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넌 이해할 수 있겠어? 지금 우리가 왜 여기서 이런 거지 같은 대화들을 나누는 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새끼 병신 아니야?’
“뭐?”
“제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분명히 사과할 생각도 있었고, 당신의 말처럼 알타누스를 대신하게 만들어 달라고 말할 작정이었지만,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화도 나고, 지독하게도 제가 했던 일들이 후회됩니다. 당신이 증오스럽기도 하고, 그립기도 합니다. 당신을 죽이고 싶기도 하고, 위로해 주고 싶기도 합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너무나도 휘몰아치는 터라…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냥 당신과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걸지도요. 목적 없이 말입니다.”
“…….”
“꼭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겁니까?”
“…….”
“꼭 무슨 목적이 있어야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까?”
“우린 친구도 아니고, 평범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사이도 아니야. 나한테서 이기영을 투영하지 마. 네가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건 내가 아니라 아마 2회차의 이기영일 테니까. 여기까지 찾아와서 한다는 게 겨우 네….”
“아니,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당신입니다. 처음에는 저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지금 이곳에서 당신을 보니, 모든 것이 명확해진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거야 시바 내가 2회차의 이기영이니까 그렇지. 병신아.’
아무래도 이 새끼도 뭔가를 느끼기는 한 모양인가 보다. 지금 착각하는 거라고, 잘못 찾아오신 것 같다고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당연히 그걸 대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
“…….”
“처음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야?”
김현성은 조금은 우물쭈물거리는 표정으로, 또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하지만 꼭 전하고 싶었다는 듯이 한참을 망설이다 말을 이어나갔다.
“…….”
“…….”
“감… 감사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고.”
“그날, 튜토리얼에서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 했습니다.”
“…….”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