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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536화 (1,534/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536화

조우, 해후(14)

김현성이 마침표를 찍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저게 작별인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한테는… 2기영한테는 작별인사 안 해?’

정말로 이걸로 끝이야? 이게 진짜 마지막이라고?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하지 마. 시바. 죄송하다고 하지 말라고.’

스스로 흥분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게 당연하다. 구태여 김현성이 내게 작별인사 같은 걸 하지 않는 이유도 알 수 있다.

미련이 남는다고 자신의 입으로 지껄였던 녀석이었으니 혹시라도 자신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웠을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깔끔하게 떠나는 게 맞다고 판단한 거겠지만….

‘시바… 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고. 시바 새끼야. 남겨진 사람들은 어쩌려고.’

진심으로 녀석을 도끼로 후려치고 싶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렇게 해서라도 이 새끼의 거지 같은 생각을 뜯어 고쳐주고 싶다.

이곳에 찾아온 이유가 정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 멍청한 새끼를 너무 과소평가 한 것이다. 1회차의 이기영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건지, 솔직히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은 맞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만 김현성을 가지고 도박을 할 수는 없다.

자신이 자격이 있다는 것도 깨닫고 있을 것이고, 스스로를 갈아 넣으면서 지금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닫고 있었다.

방법을 모르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기에 문을 열어주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알타누스가 누군가에게 배우지 않아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김현성 역시 누군가에게 배우지 않았지만 깨닫고 있었다.

대륙이 수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 스스로를 갈아 넣어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저 멀리 있는 하늘을 바라본다.

당연하지만,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하늘은 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현상에 의문을 느끼는 이들은 없다. 애초에 대륙에 살아 있는 생명체들이 거의 없었을뿐더러, 무너지는 하늘에 세상이 삼켜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화국도, 왕국연합과 연방도, 중립국 라이오스, 심지어 제국의 대부분도, 남아 있는 곳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삼켜지고 있다.

비둘기들의 둥지에서 마지막 혼을 불태웠던 이들이 일부, 또 대륙 곳곳에 남아 전쟁터에서 신을 부르짖던 이들도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다.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리셋 버튼에 걸려 있던 잠금장치를 대륙이 풀어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얼마나 남은 거지?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린델에서 일어났던 전쟁 역시 끝이 난 지 오래다. 죽은 자들은 무너지는 하늘에 가장 먼저 삼켜져 시신조차 남기지 못했다.

2회차에서 넘어온 이들과 1회차의 이기영, 1회차의 김현성은 아직 삼켜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마저 내게 선택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린델에서 폐허가 된 도시를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있는 진청,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선희영. 나를 찾기 위해 비둘기의 둥지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는 김창렬과 알프스, 하연수.

싸구려 여관 안에서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카스가노 유노와, 박덕구와 함께 쓸데없는 수다를 떨고 있는 1회 차의 이기영, 멍하니 서서 린델을 바라보고 있는 1회 차의 김현성. 그리고 나와 녀석까지.

지금 대륙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아마 이게 전부일 것이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이들도 완전히 대륙에서 소실되어 버렸다. 1회 차의 정하얀과 빅보이 패밀리, 정진호와 여단, 제니스 후작, 류한, 성검용사,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 그들의 흔적,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전부 사라져 버렸다.

어째서 회귀가 진행되었어야 했는지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이 모든 이들을 기억할 이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김현성이 얼마나 큰 짐을 떠안고 있었는지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앞을 바라본다. 여전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멍청이가 눈앞에 있었다. 뭐라고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 이 순간 녀석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위로를 건넬 수도 있다. 너를 용서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마지막 작별인사 같은 말들은 건네고 싶지 않다. 지금은 이 순간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이 먼저였다.

‘답이 분명히 있을 거야.’

정답이 없는 문제는 없다. 대륙은 분명히 나와 김현성을 이 대륙의 부모로 생각했더랬다. 김현성이 노을이 되는 것이 정답일 리가 없다.

물론 개연성은 충분하다. 노을이 녀석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만큼 이게 어울리는 엔딩이라 판단하고 있을 수도 있다만, 내가 그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 미카엘이 아니더라도 이걸 다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은 시간을 끌어야 했다. 끌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고, 갑작스레 김현성이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

리셋 버튼을 누르는 것은 김현성이 아니라 내가 되어야 한다.

“나는 네 사과를 받지 않을 거야. 현성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너를 이해하지만 너를 동정하지도 않을 거야.”

“네. 그 또한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준비가 됐어?”

“네. 준비라면 한참 전에 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정말로 네게 주어진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해?”

“네.”

‘그거 아니야. 시바. 그거 아니라고.’

“정말로 이게… 네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남길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속죄할 수 있는 마지막 길이라고 생각해?”

“네.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합니다.”

‘아니야. 확고하지 않아. 확고하면 안 돼.’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어?”

‘후회될 것 같지? 그렇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김현성 역시 조심스럽게 이쪽을 따라나서고 있었다. 정적만이 감돌고 있는 장소에서 김현성이 후회할 것 같다는 대답을 기다린다.

녀석은 계속해서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다. 아니, 이미 답은 나왔을 것이다. 다만 어떻게 이걸 풀어 설명해야 하는지 고심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멈춰 선 곳은 마치 독립문처럼 생긴 건축 양식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단지 녀석을 낚을 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찾은 것뿐이었지만, 김현성은 아마 이게 2회차로 향하는 문이라고 판단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아마 이 문을 지난다면, 자신은 노을이 되고 새로운 회차가 시작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아니, 어쩌면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장치가 아니다. 장치 따위는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의지다. 녀석이 정말로 후회하고 있다면 어쩌면 놈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김현성은 커다란 문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문 앞에 서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 역시, 계속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두고 정답을 찾고 있었다.

“후회….”

“넌 모두에게서 잊혀질 거야. 의지도 남기지 못할지도 몰라. 네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결국에는 너를 잊게 될 거야. 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라고. 그런데 정말로…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어?”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저는 제가 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을이… 노을이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영 씨가 사랑하는 장소를 비추는 노을이 말입니다.”

‘병신 같은 생각 맞아. 시바.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는 생각이야.’

“그 누구도 저를 기억하지 않게 된다고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요. 제가 모든 것들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요.”

“네 입장에서 멋대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잖아. 현실은 그렇지 않을 거야. 너는 노을이 되지도 않을 거고, 그 누구도 노을을 바라보며 너를 떠올리지 않을 거야. 너는 네 마지막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뒈지는 데 의미 같은 건 없어. 의미 같은 걸 부여하지 마. 정말로 이게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해? 아니. 도대체 뭘 믿고 거기에 서 있는 거야? 내가, 내가 네가 원하는 걸, 네가 원하는 걸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어? 이게 함정일 거라는 건 정말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거야? 이 멍청한 새끼야.”

“…….”

“이것 속죄 같은 게 아니야. 그냥 회피고 자기만족이라고. 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정말로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고, 염치없는 행동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이야. 정말로 이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답이라고 생각해? 이게 네 이야기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 죄를 속죄하기에는 이건 너무나도 간단한 벌이야. 나는 네가 살아남아 고통받기를 원했지, 모든 걸 떠안고 떨어져 나가길 바란 적은 없어.”

“…….”

“넌 정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거야. 네가 바라는 결말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을 거야.”

조금이나마 김현성의 의지를 꺾을 수 있을 만한 말들을 중얼거린다. 녀석이 의심이 들게 할 만한 말들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끼는 도통 흔들리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쉽게 흔들렸던 녀석이 완고함 스킬이라도 장착했는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다.

그렇게 갈대 같은 새끼가 자신의 생각에 확신하고 있다. 아마 저 거지 같은 문까지 녀석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녀석에게 직접 주도권을 넘겼더라면 이미 하늘에는 노을이 피어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도 1회차 이기영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다.

금방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김현성이 정말로 훌쩍 떠나버릴 것 같아 녀석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정말로 이게 정답일까? 정말로 이게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언성도 조금씩 조금씩 높아진다. 아마 정말로 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에, 그걸 떠올릴 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 화가 나 소리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멍청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머릿속에 백지장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정말로 녀석이 떠날 거라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웃기지 마. 새끼야. 웃기지….”

김현성은 이 모든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마치 1회차의 이기영이 자신을 시험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모양새였다.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문득 다시 한번 녀석의 얼굴에 시선이 닿는다. 어처구니없지만 녀석이 성장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이게 올바른 대륙의 관리자가 되기 위한 튜토리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했었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지금의 김현성을 보자, 녀석이 준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에 꽂혔다.

이게 튜토리얼이라면 어쩌면 녀석은 그 튜토리얼을 완료한 셈이었다.

문득 다시 한번 녀석의 얼굴에 시선이 닿는다. 녀석의 눈동자 속에 비치고 있는 내 모습에도 시선이 닿는다.

‘나는 어떻지?’

무너지는 둥지에 시선이 닿는다.

‘뭐가 정답이지?’

박덕구와 함께 웃고 있는 1기영에게도 시선이 닿는다.

‘대륙이 정말로 이걸 원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린델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성에게도 시선이 닿는다.

‘정답이 없을 리가 없어.’

그리고 폐허가 되어 있는 대륙에도 시선이 닿는다.

이미 사라진 이들에게도 시선이 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이게 정답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느껴졌다.

그것은 직감이고, 본능이면서도, 아집이었고, 계산된 행동이었으며,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그래, 후회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절대로, 절대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혹여나 잘못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행동이라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했다.

가면을 벗는다.

“기영… 씨?”

녀석이 내 한쪽 눈동자를 바라보고서는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나는 녀석의 손을 잡는다.

“기영… 씨… 어… 어?”

직후에, 나는 한 걸음을 문 앞으로 내디뎠다.

“현성아.”

“네? 아… 아니, 지금… 여기서….”

“가자.”

눈앞이 노을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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