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43화
조우, 해후(21)
‘아쉬운 마무리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이상적인 마무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김현성과 1회차의 이기영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다지 반갑지 않게 느껴졌었으니 말이다.
최소한 지금은 김현성이 자신에게 가방을 건넨 것이 1기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한편으로는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건 1회차의 이기영과 김현성의 연결고리 같은 상징적인 물건이었을 터다.
이걸 정이라고 해야 할지, 호의라고 해야 할지, 동정이라고 불러야 할지 나도 갈피를 잡을 수 없고… 심지어 1기영 또한 갈피를 잡을 수 없겠지만, 둘 사이에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별것 아닌 빵 한 덩이가 말이다.
김현성은 뒤늦게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1회차의 이기영이 전해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안에 들어 있는 1기영의 마지막 인간성을 놈이 직접 확인하기도 했을 것이고, 전해준 빵 몇 덩이로 자신과 1기영과 관계의 시작과 끝이 결착되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으로 전하지 못하고 받지 못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김현성은 조금은 이해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회차의 이기영이 건넨 가방을 자신 나름대로 해석했을 것이다.
물론 마냥 긍정적으로 해석하지는 못했겠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자신과 1회차 이기영의 이야기가 튜토리얼의 시작에서부터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
“…….”
아니나 다를까 우울해 보이는 얼굴이 눈에 띈다.
‘그래, 찝찝하기는 하겠지.’
마음이 홀가분할 리가 없다. 앞서 말했던 것들을 깨달았다고는 해도 여전히 마음의 짐은 놈의 머릿속 어딘가 한구석에서 자리 잡고 있을 확률이 높다.
지금 보여주고 있는 표정만 보더라도 답이 나온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 후회와 자책으로 얼룩져 있는 눈이다.
‘조금 정신승리라도 하지… 그런 것도 못 하자너. 저 새끼는… 그저 자책만 하자너.’
터벅터벅 뒤돌아 가는 모습은 힘이 없어 보인다.
‘위로라도 해주고 싶자너.’
참아야 되는 타이밍이었다.
예전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면 녀석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옆에 붙어 있을 테니 말이다.
녀석의 턴이 끝났으니, 이제는 내 차례.
녀석이 1회차의 이기영을 마주했던 것처럼 나 역시 1회차의 김현성을 마주해야 했다.
사실 녀석을 마주한 이후에 뭘 해야 하는지, 무슨 말을 건네야 하는지는 정리된 바가 없다.
그리고, 어째서 내가 녀석을 만나야 하는 것인지, 만약 녀석을 마주하는 것이 이 1회차를 끝내기 위한 열쇠라면 어째서 녀석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보정이 들어간 거겠지. 뭐.’
시스템의 보정이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는 판단이 선다. 이게, 이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서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고, 이게 우리 대륙의 서사를 다시 쓰기 위해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시스템이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베니고어는 언젠가 이 대륙은 이제 자신의 서사 위로 쓰여진 대륙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김현성의 이름 아래에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새로운 1회차는 그것을 위한 과정이며, 이 대륙이 나와 김현성을 완전한 양육자로 인정하기 위한 서사를 만드는 절차라고 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서사의 마침표를 찍는 종장일지도 모른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 시바. 복잡하다고….’
하지만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1회차의 이기영이 마주하고 싶은 것은 김현성뿐만이 아니었는지, 가방을 1회차의 김현성의 거주지 앞에 내려놓은 모양새.
딱히 1기영과의 작별 인사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 역시도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저 녀석이 놓고 간 가방을 집어 들고 조용히 문을 두들길 뿐이었다.
“…….”
“…….”
창밖으로 노을이 피고 있는 린델을 바라보고 있던 1현성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망원경 속에 비친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 같았다고 생각했는지 쉬이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한 번 더 문을 두들기자 허겁지겁 밑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문이 벌컥 열린 것은 순식간,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마음의 준비를 채 마치기도 전에 1회차 김현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
“…….”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지금 자신이 눈으로 보고 있는 광경을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녀석에게 살짝 인사를 건넸다.
“안녕.”
“어….”
“…….”
“…….”
생존자를 만났다고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
“…….”
“당신은… 누구… 십니까?”
약간은 경계하는 듯한 표정, 조금은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은 눈,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마저 느껴진다.
그제야 내가 녀석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을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의 신… 이십니까?”
그래, 아마 초월적인 존재로 비춰지고 있을 것이다. 겉모습은 평범한 인간과 별반 다를 바가 없겠지만, 계속해서 빛을 내뿜고 있는 금안의 눈과 노을 진 배경 속에서 보이는 후광, 그리고 몸 안에 있는 신성, 눈앞에 있는 존재가 인간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이곳에 다른 인간 따위는 없을 거라는 녀석의 확고한 믿음이 내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가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판단에 의심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닌 무언가다.
그것이 김현성이 내린 결론이었다.
“인간으로는 안 보이는 것 같아?”
“…….”
“일단… 걸을까?”
“…….”
“…….”
살짝 먼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고민한 이후에 이쪽을 따라오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녀석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인류는 전부 다 뒈져버렸고 남은 것은 자신밖에 없는데.
눈앞에 있는 자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끈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지성체와 대화하는 것이 그리웠을지도….
“…….”
“…….”
“어땠어?”
“…….”
“…….”
“무엇이… 말입니까?”
“이곳, 그리고 네 이야기 말이야.”
“…….”
“…….”
“그런 질문을 하기 위해서, 저를 찾아온 겁니까? 그걸… 그걸 말이라고….”
“…….”
“지금… 이 모든 게 끝난 뒤에… 찾아온 이후에 한다는 말이… 어땠냐고요? 어땠냐고 물었습니까?! 이곳에서의 생활과 삶이 어땠냐고 물은 겁니까? 아니… 애초에 어째서… 어째서!”
“아니, 너와 다른 이들을 이곳으로 불러온 건 내가 아니야. 현성아. 네가 믿을지 믿지 못할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이곳으로 떨어진 건 어떤 우주의 법칙 같은 작용일 뿐, 누군가가 너희들에게 악의를 가지고 한 일이 아니라는 거야. 벌어질 일이었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야.”
“…….”
“네가 내게 화를 내는 것도 이해해.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하고… 하지만 네 의문에 나는 대답해 주지 못할 거야. 나 역시 그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관리자일 뿐이거든. 지금은 말이야.”
“…….”
“현성아. 난 그냥 너랑 짧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야. 다른 목적이나 생각은 없어.”
김현성은 쉬이 이쪽을 믿을 수 없다는 눈치다. 하지만 이내 체념했는지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 눈에 보여 왔다.
지금에 와서 자신이 뭘 어쩔 수 있겠냐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김현성은 이미 지쳐 있다. 화를 내는 것도, 감정적이 되는 것도,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뜨겁게 반응하는 것도 말이다.
꺾였다는 표현이 조금 어울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 말이 맞으면 또 어떻고, 거짓이라면 또 어떻냐는 반응이었다. 내가 악마면 어떻고, 또 신이라면 어떻냐는 반응이었다.
김현성은 살짝 이쪽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지옥… 같았습니다.”
“그래?”
“네. 제게 이곳은 지옥 같은 곳이었습니다.”
“…….”
“저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칼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런 학생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지구에서 넘어온 이방인이라면 누구라도 이곳을 지옥 같은 곳이라고 표현할 겁니다.”
“…….”
“하지만 제게 있어서 더 끔찍한 것은, 제가 이 지옥 같은 장소와 어울리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이었을 겁니다. 당신이라면 알고 있겠군요. 제가 여기까지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을 했어야 했는지, 또 무슨 짓을 했는지 말입니다. 저는 수 없이 사람을 죽였고, 말로 할 수 없는 끔찍한 짓들을 저질렀습니다. 살고 싶다는 것 때문에 말입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도 아니었을 겁니다. 힘을 얻고 싶었고, 다른 이들이 저를 치켜세워 주는 것도 즐거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이후에 제 이름을 불러주는 이들에게 취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뿌듯하다고 느꼈던 적도 있었습니다.”
“…….”
“어느 순간부터는 모르겠더군요. 제가 무엇을 위했던 건지….”
“그래?”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꿈꾸면서… 이곳에 있었던 것인지… 생각해보면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냥 안전해지고 싶었고, 안정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살아남기 위해 검을 들고, 또 검을 들고, 또 검을 들고… 그렇게도 살아남고 싶었지만, 지금 이곳에 홀로 남아보니 이 모든 게 의미가 있었던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이 새끼 입 제대로 풀렸네. 이거….’
얼마나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그리웠으면 입에 모터라도 단 것마냥 와다다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낼까.
“…….”
“…….”
“당신에게, 제 삶은 어떻게… 보였습니까?”
“…….”
“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저는 악인이었을까요? 아니면….”
“인간적이었지.”
“네?”
“좋은 표현도 아니고, 나쁜 표현도 아니야. 이곳에서의 네 삶은 지극히 인간적이었어. 그 어떤 녀석이라고 해도, 너만큼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는 힘들 거야. 넌 네가 선한 사람이었는지, 악한 사람이었는지, 이기적인 사람이었는지, 이타적인 사람이었는지 따위의… 그러니까 흑백으로 너를 평가받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그걸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야. 너 자신이지.”
“…….”
“인간은 본래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해, 이기적이기도 하지만 이타적일 때도 있지. 네 모습이 딱 그랬어.”
“…….”
“자신을 위해서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기도 했고, 그 누구보다도 너 자신이 제일 중요할 것처럼 행동하다가도 자기 목숨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내던지기도 했던 것 같네. 정확히 표현하자면 감정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아. 넌 감정적이었어. 순간의 감정에 쉽게 휘둘렸지… 네게 선택권이 있었을 때도, 선택권이 없었을 때도 말이야.”
‘그냥 아무 소리나 지껄여도 잘 들어주자너.’
무척 진지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몇 마디 단어로 네 삶을 정의할 수는 없어. 어느 쪽에 더 저울이 치우쳐져 있는지 이야기해 줄 수는 있겠지만 그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단순히 개인적인 감상을 물었던 거라면 흥미로웠던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
“흥미… 네. 당신에게는 흥미로웠겠죠. 저 같은 이들이 발버둥 치는 모습이….”
“그런 의미로 이야기한 게 아니야. 현성아. 네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라고 해도, 너와 그다지 다를 게 없어.”
“…….”
“신도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거야. 우리들도… 결코 완벽하지 않아.”
“…….”
“넌 그 사실을 잘 기억해야 돼.”
베니고어가 내게 했던 말을 되돌려 줄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