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51화
새로운 일상(6)
“어이 배 기자. 좀 쉬면서 하는 게 어때?”
“지금 쉴 시간이 어디 있어요.”
“아직 회담은 시작도 안 했어. 지금부터 너무 힘을 뺐다가는 나중에 가서 퍼질걸.”
“아니요. 선배님. 제가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건 무조건 달려야 되는 상황이에요. 이번 일에 제 모든 걸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니까요. 알고 계시잖아요.”
“알아. 알아. 또 그 말 하려고 그러는 거지? 이게 네 기자 인생을 바꿔줄 역사적인 사건이 될 거라는, 분기점이 될 거라는 그 소리 말이야. 그 말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으니까. 이제 제발 그만하라고….”
“백 번을 말해도 부족하다니까요. 물론 선배님들은 저보다 오랫동안 대륙에 계시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으셨으니 그리 놀라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후우…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실 수 있는 건가요? 희생과 부활의 성자님과 그림자의 영웅이 그의 저택에서 대담을 나눈다니까요? 교과서에 남을 만한 대사건인데….”
“…….”
“…….”
스리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잔뜩 흥분한 자신과 다르게 침착함을 유지하는 다른 기자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소소한 잡담을 나누거나, 평소와 같이 일상적인 루틴을 보내는 것을 보니 오히려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역사적인 사건을 눈앞에 둔 이들 같지 않다는 표현이 어울리리라.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뭔가….
‘다들… 기대하지 않는 건가….’
그래, 딱 그런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오히려 자기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내가… 이상한 건가?’
아니, 결코 자신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대륙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이 대륙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는 안다.
전반적인 대륙의 분위기나 주요 인사 정도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거다.
희생과 부활의 성자 이기영과 그림자의 영웅 진청은 각국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고, 그들이 이루어낸 업적은 터무니없다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모든 이야기들이 우상화를 위해 지어낸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우상화 작업 같은 게 아니었지.’
오히려 소문이나 이야기들이 축소되었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들은 명실상부, 대륙과 대륙민들, 이방인들을 구해낸 영웅이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모두의 존경을 받는 위인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공화국에서, 무려 그림자 영웅의 저택에서 비밀회담을 가진더랬다.
‘절대로 이상한 게 아니야. 흥분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선배들은 아무것도 몰라….’
가슴이 떨리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이번 일정에 참가하지는 못한 김성경 선배님도, 절대로 방심 말고 촉각을 곤두세우라고 분명히 말을 전했다.
다시 한번 주먹을 꽉 쥐고 있었을 때였다. 조용히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선배님이 다시 말을 이어온 것이다.
“왜. 뭐가 이상해?”
“그냥… 이상하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기자들이 너무 태연한 것 같지?”
“…….”
“…….”
“솔직히 그렇게 느껴져요. 둘의 만남이 성사됐을 때는, 평화회담이니, 비밀회담이니, 평화의 시대가 온다느니 그렇게 떠들어 놓고서는… 지금은 이게 뭐예요? 심지어 아직도 그런 기사들이 올라오고 있잖아요. 매번 매초 쉬지 않고 어그로성 기사는 잔뜩 뽑아내고 있으면서… 현장과 기사의 괴리감이 너무 심하다고 느껴지지 않으세요?”
“뭐… 건수가 하나 생겼으니, 다들 달려들고 싶은 거겠지. 배 기자도 여기 생태가 어떤지는 잘 알잖아?”
“아니, 누가 뭐, 조회수에 연연하지 말고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라고 했나요? 저도 알아요. 대중들이 원하는 기사를 뽑아내는 게 중요하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고요. 그냥 현장과 기사의 온도 차가 너무 심하다는 걸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기사에서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잔뜩 격양된 표현들도 거리낌 없이 사용하면서… 저기 졸고 있는 사람 보여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듯이 하품하는 사람은 또 어떻고요? 애초에 이번 일에 저희들 자리는 없었잖아요.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 요청해서 겨우 함께 가는 게 허락된 상황에서… 저런 모습들이 가당키나 해요? 그냥 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왜. 배 기자.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상황 아니에요? 무려… 희생과 부활의 성자와 그림자 영웅의 만남….”
“…….”
“…….”
슬쩍 선배를 바라본다. 아무런 말도 해오지 않고 있었지만 저 표정이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군요… 다들… 심지어 선배도요….”
“…….”
“평화회담이니 뭐니 떠들어대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뭐… 그렇게 나쁘게만 보지 마. 배 기자. 배 기자가 말했던 대로… 기자 생활 하루 이틀 한 거 아니잖아.”
“…….”
“…….”
“무슨 큰일이 일어날 거였으면, 교국에서 벌써 어느 정도 소스를 뿌렸겠지. 애초에 이 회담이 대중들한테 공개된 이유부터가 웃기잖아. 대마법사의 개인 SNS에서부터 시작된 거라니….”
“하… 하지만….”
“괜히 교국에서 기자단을 배제하려고 했겠어? 배 기자,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나, 교국, 교황청에 얼마나 똑똑한 놈들이 많은 줄 알아? 생각해봐. 만약에 정말로 평화회담이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을 거였으면 그 똑똑한 놈들이 가만히 있었겠냐고.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현 정부를 홍보하고, 현재의 상황을 브리핑하고, 알아서 규모를 키웠을 거야. 장담하건대 함께하는 언론의 규모도 서너 배는 더 늘어났을걸. 공화국이라고 다른 줄 알아?”
“…….”
“거기는 우리 쪽보다 더하지, 자기 정부를 어떻게든 우상화해야 되는 놈들인데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어때? 공화국뽕TV 말고 뭐 어디서 말이라도 나온 것도 없잖아. 나도 혹시나 해서 공화국에 있는 놈들을 슬쩍 떠봤는데… 본인들도 별로 아는 게 없는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그렇구나… 했지. 무슨 말인지 알지?”
“…….”
“깜짝 발표 같은 건 아마 없을 거라는 거지. 오히려 사고라도 터지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거 몰라? 평화사절단의 규모가 2만 명이라니… 무려 2만 명이야. 2만 명, 그것도 전원 베테랑으로 구성된 병사들이라고, 웬만한 국가의 병사들 10만보다 나을걸. 그리폰 라이더 100기에 전투 마법사 3,000여 명… 교황청 성기사들과 사제들도 온 걸 보면… 후우… 평화는커녕 아직도 교국에서 공화국을 경계하고 있다는 지표라는 거지.”
“그….”
“더 재미있는 건 뭔지 알아?”
“네…?”
“저 교국의 강경한 대처가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거야.”
“…….”
“나도 교국민이라는 거지.”
다시 한번 선배님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 공화국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다.
선배뿐만이 아니다. 사실 병사들의 표정은 더하다. 대놓고 공화국을 경계하는 이들이 시야에 비쳐온다.
사실 여기까지 이동하는 내내 그러했다. 긴장으로 인해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하지 않은가.
그래, 마치 전쟁이라도 나가는 것 같은 얼굴들이다. 교국과 공화국사이에는 역사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더 노골적이다.
이름만 평화사절단일 뿐, 누가 보더라도 적으로부터 희생과 부활의 성자를 지키겠다는 분위기였다.
“물론, 교국 지도부에서 생각하는 불운한 사고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지. 지금과 같은 분위기, 시대상에서는 말이야.”
“네.”
“하지만 경계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는 거지. 교국의 지도부들 전원이 말이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저 멀리 비쳐오는 공화국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서는 더욱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 역시, 교국의 평화사절단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무장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찬가지로 분위기가 얼어붙어 있다. 마치 무력시위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새이지 않은가.
애초에 워프 게이트로 단숨에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육로를 이용해 오랜 시간 동안 이동한 이유 역시 희생과 부활의 성자의 안전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뭐… 그래도 너무 풀이 죽을 필요는 없어. 그야 희생과 부활의 성자께서 직접 출두하셨으니, 작은 성과라도 있겠지. 이번이 앞으로의 시대의 개막에 시발점이 될 수도 있는 거고… 처음부터 배부를 수는 없잖아? 우리는 우리대로 할 일을 해야지.”
“네… 그래야죠.”
“교국민들의 궁금해하고 있는 것 대해서도 열심히 취재해야 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는 기대감을 서서히 줄일 필요도 있는 거고….”
“네….”
“아. 이제 들어간다.”
희생과 부활의 성자를 태운 마차가 갑작스레 멈춘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모두가 짤막한 의문을 표현하고 있는 사이, 희생과 부활의 성자가 마차에서 나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뭐… 뭐야?”
맨발로,
공화국 국경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플래시 세례가 터진 것은 당연지사. 그의 공화국 방문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공식적으로 직접 대중들 앞에서 공화국 국경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설마 그가 직접 마차에서 나와 두 발로, 그것도 맨발로 걸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성자, 그야말로 성자라고 할 만한 모습이지 않은가.
“찍어! 찍어!!”
“뭐야! 뭐야!!! 도대체… 뭐… 뭐냐고!”
마침내 국경을 넘어서고, 장벽을 넘은 이후에는….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커다랗게 들려온 함성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사방에서 꽃잎이 날아 들어온다.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공화국의 안전요원들이 어떻게든 공화국민들을 제지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잔뜩 흥분한 군중들은 어떻게든 희생과 부활의 성자가 공화국 국경을 넘는 순간을 바라보기 위해, 그가 공화국을 방문하는 순간을 바라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희생과 부활의 성자다!!”
“교국의 명예추기경이 직접 국경을 넘었어! 맨발로 넘었다고! 이게 무슨 일이야?! 어?! 하하하하하하핫!”
“사랑해요!!!! 사랑해요!!!!! 희생과 부활의 성자!!!!!”
환영 인파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의 인파가 모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 이 많은 군중들이 전부 공화국뽕TV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래, 분명 좋은 상황일 터였다.
평화사절단과 희생과 부활의 성자가 공화국에서 이렇게 환영받고 있다. 이 정도로 환영받고 있다. 어쩌면 다른 이들도 모두 평화의 시대가 열리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기대감보다는 불안감이 더 차오른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선배에게 들었던 말 때문이 아니다.
양국의 병사들 사이에 있는 미묘한 긴장감이 여기까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많은 군중들이 몰렸고, 그만큼 예기지 못한 상황에 노출된 희생과 부활의 성자 때문에 예민해진 것이 분명하리라.
몇몇 병사들은 방패에 손을 올리고 있었고, 몇몇 이들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혹시라도 있을 암살시도나 테러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평화사절단의 변화에 공화국의 병사들 또한 침을 삼켜 넘긴다.
함께 온 기자단에게도 그런 분위기가 느껴졌는지 선배 또한 명백하게 긴장한 얼굴이었다.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 심지어 군중들은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선… 선배….”
공화국 진영에서 한 인형이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
“…….”
놀랍도록 주변이 조용해진다.
그 많은 군중이, 그 많은 인파가 숨 쉬는 것도 잊은 것처럼 침묵하고 있다.
교국에서 온 이들 또한 말 한마디 꺼내지 않고 있다. 마치 이 두 사람의 만남을 머릿속에 각인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마치 이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냥 분위기에 압도되어서인 걸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커다란 존재감을 지닌 두 위인의 만남에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공화국의 군사가 조용히 입을 열어왔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희생과 부활의 성자시여.”
교국의 명예추기경 또한, 이에 화답한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그… 그림자의 영웅이시여.”
동시에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어처구니없었지만 선배도 카메라를 집어 던지고 소리를 내지른다.
“미쳤다!! 미쳤어!!! 배 기자!!! 미쳤다고!!!! 일어나려나 봐!!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 봐!!!”
다시 한번 저도 모르게 생각하게 된다.
‘이건… 이… 이 사건은 내 기자 인생을 바꿀 거야.’
그래, 이게 내 삶의 분기점이 될 거라고,
누가 뭐라고 하든 간에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래, 분명히.
대평화의 시대가.
완전한 화합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