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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557화 (1,555/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557화

새로운 일상(12)

‘똑똑히 기억해 놨어.’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지우개로 녀석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지우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은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이 장소를 벗어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하얀이 내뿜은 마력은 이미 그녀에게 회수되기는 했지만 초월자의 분노와 악의를 정면에서 받아야 했던 갤러리들이 상태 이상이라도 걸린 것마냥 아직까지도 멍하니 굳어 있는 중, 어떻게 생각해도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괜히 여기에 있으면 공안한테 붙잡힐 것 같자너.’

아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화국의 마법사들도 현장으로 도착할 것이 분명했다. 단순한 길거리에서 소란이 일어난 정도가 아니라 갑작스레 측정할 수 없는 마력이 터져 나온 상황이었으니까.

근처 마탑에서든, 공화국의 비밀요원이든 간에 조사단을 파견할 확률이 높다.

아마 현장으로 도착한 이후에는 사제들도 함께 파견하겠지. 정면으로 대미지를 받은 이들을 치료해야 했으니 말이다.

‘충격받은 거 아닌지 몰라….’

저 빌런은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었지만 녀석의 동료와 주변의 갤러리들이 문제였다.

언젠가 읽었던 책에서 평범한 인간은 초월자의 편린을 보는 것만으로도 미쳐 버린다고 했던가.

색욕과 영면의 군주를 목도한 이들이 아직까지도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는 사례도 존재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이번에도 일이 비슷하게 진행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

물론, 그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펼치기에는 초월자로서의 정하얀의 존재감이 부족할 것이다.

심지어 그녀가 자신을 드러낸 시간도 짧기도 했으니 이전과 같은 부작용이 일어날 확률은 적겠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책잡힐 확률이 높다.

‘딱 정신계 마법을 사용한 것 같은 모양새니까.’

최근 업데이트된 대륙법상으로 정신계 마법은 불법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규제가 더 높아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알맞을 것이다.

1레벨에서 8레벨로 위험도를 분류, 4레벨 이상의 정신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 등록을 해야 했고, 사용 시에도 무조건 승인을 받아야 했다.

방금 정하얀이 사용한 마법의 레벨을 얼마로 측정할지는 미지수였지만… 범위가 범위인 만큼 4레벨 이상으로 평가받을 확률이 높다.

말인즉슨 몇 분만 지나면 이 거리 자체가 개판이 난다는 뜻이었다.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자리를 벗어나는 게 올바른 행동이라는 거다.

“하얀아. 인식저해마법 한 번 더 걸어줄 수 있을까?”

“…….”

“하얀아?”

“네… 네.”

“근처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소라랑 합류하는 게 좋겠지? 아마 조금 있으면 공화국에서 온 사람들이 들이닥칠 것 같아서… 내일, 아니면 내일모레든 괜찮으니까 시간이 날 때마다 같이 밖으로 나오자.”

“네… 네… 정말요?”

“응. 물론이지.”

‘얘 눈치 보는 것 봐….’

조심스레 정하얀의 머리를 쓰다듬은 것은 당연지사. 네가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알고 보니 눈치를 보는 게 아니었던 모양인 것 같았다.

기분이 상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반성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히… 히히힛… 히히….”

‘웃고 있자너….’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히죽히죽거리는 웃음기를 참을 수가 없었는지 계속해서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다음번 데이트 약속을 받은 것에 기뻐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방금 있었던 사건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

“…….”

심지어 로맨틱한 상황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고 얼굴도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진짜로 이게 로맨틱하다고 생각하고 있나 봐.’

‘오빠도 창놈 아니에요’가 어떻게 로맨틱한 마무리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혹시라도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잠시 후, 주점에서 만난 한소라에게 달려가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정하얀을 보고 있자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 정하얀 님.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셨어요?”

“그, 그, 그게 있잖아… 소라야.”

“네? 네? 어깨를 부딪혔다고요?”

“응… 으… 으응… 그래서 내가 오, 오, 오빠 창놈 아니라고… 막… 소, 소리를 쳤는데….”

“아… 네.”

“오, 오빠가 그 사람 뺨을 때려서….”

“네… 네에?!”

“나, 나보고 호박 아니래….”

“아아….”

“그, 그래서 나도… 오, 오빠도 창놈 아니라고… 말했다?”

“아… 그… 그렇군요.”

‘그래. 봐. 내 감성이 이상한 게 아니었자너.’

리액션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소라조차 정하얀에게 어떤 리액션을 선보여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좋… 좋으시겠어요….”

“그, 그렇지?”

도대체 어디서 감동하고, 로맨틱한 부분을 찾아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고 있는 표정이다.

이미 길드원들과 함께 술을 몇 잔 들이켠 것도 그녀가 애매하게 호응하는 이유 중에 하나였겠지만, 아마 맨정신이었어도 평소처럼 호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제대로 된 리액션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하얀 님한테 호박이라고 했다고요?”

‘내가 남자 구실 못 하는 창놈이라고 욕먹은 건 아무 상관 없는 거냐고. 왜 그건 그냥 넘기는데.’

“어디서… 아니, 이름은 들으셨어요?”

“기,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기억하고 있자너.’

“교, 교국에서 온 것 같았어.”

이미 얼굴이 꽤 붉어진 채로 내가 합류한 걸 환영하고 있던 박덕구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거, 안 그래도 내가 저 친구한테 들었는데… 공화국에서는 교국 모험가들이 골칫거리인 모양이요.”

녀석이 손가락을 가리킨 곳에 자리한 것은 꽤나 먼발치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공화국 모험가들. 박덕구와 눈을 마주친 녀석이 잔을 들어 올리고 박덕구도 과장되게 웃으며 술잔을 흔든다.

친화력이 좋아서인지, 이 주점에서 먹고 마시는 동안 주점을 이용하는 공화국 모험가와 안면을 튼 것 같았다.

‘친화력 실화야?’

“그, 그러니까. 뭐라고 했더라… 그러니까… 그 예전에 파란 길드에서… 뭐….”

김예리가 녀석의 말을 이었다.

“파란 길드 공화국 지부.”

“아! 맞다! 거! 예전에 현성이 형씨가 파란 길드 지부를 만든다고 공화국으로 파견 가지 않았소! 그때 현성이 형씨만 간 게 아니라, 다른 교국 모험가들도 같이 공화국으로 유입됐었던 것 같더라고… 그리고….”

“비자.”

“아아아! 그렇지. 비자. 사실 저 양반들도 자세한 사정이 뭔지는 잘 모르는 것 같던데… 좌우지간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느니 뭐 어쨌다느니 하는 말들을 하더라고… 그 뒤로 교국에서 온 모험가들이 자꾸만 사고를 치고… 뭐 어쩌고… 하니까.”

“…….”

“…….”

오래전 일이라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이거 현성이 탓은 아니지?’

일단 김현성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교국 모험가들에 대한 편견이 생긴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예전에 템플러 젠과 함께 했던 공화국 여행을 떠올리자 다시금 곰곰이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때 공화국 지부의 신입들이라고 뽑아놓은 새끼들이 쓰레기였던 것은 기억에 남는다. 최대한 빠르게 성과를 만들기 위해 능력 외에 다른 외부 요인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었다고 했지.

물론 공화국에 들어간 교국 모험가들이 모두 쓰레기라고 해서 마냥 김현성을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지부를 신설하는 과정이나, 파견단을 꾸리는 과정에서 조금 더 조심스러웠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와 꽂힌다.

사과 하나가 썩어 있으니 함께 옮겨진 사과들도 전부 썩어버린 것이리라.

‘아냐… 그래도 이게 현성이 탓이라고 하기에는 좀 뭐하지.’

내게 제대로 된 정답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인지, 김현성을 실드 치고 싶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박덕구가 빠르게 말을 이어왔다.

“뭐… 나는 그런 어려운 건 모르겠고… 결론적으로 저 양반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건 이거요.”

“…….”

“…….”

“뭔데?”

“교국 모험가들이 자기들을 무시하는 것 같다고 합디다.”

“응. 분명히 무시받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어.”

‘그래. 근본적인 문제가 따로 있었자너.’

이미 아카데미 때 한 번 겪었던 일이었다.

“그래…?”

“확실하다니까! 잠깐 만난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진실된 친구들의 입에서 나온 진실된 목소리였소!”

“…….”

“…….”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몇몇 교국민들은 자신들이 공화국민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게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파란 유소년 아카데미의 녀석들이 철이 없었던 게 아니다. 다 큰 모험가들도 은연중에 공화국민들을 무시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들이 더 문화적으로, 기술적으로, 경제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격이 더 높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모험가들의 수준도, 마법사들의 수준도 전부 다 교국이 우위에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전히 국뽕에 절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사실 일반 대중들이 저런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 것도 이해가 간다. 아니, 이해할 수밖에 없다. 사실이었으니까.

현 대륙은 그야말로 교국 1강 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그 뒤를 공화국이 따라오고 있었지만 사실 꽤나 차이가 나는 부분이 많다.

기술의 발전은 물론이거니와 전반적인 생활 수준도 마찬가지다. 연금술도, 마도공학도, 던전 공략과도 같은 모험가들의 생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분야도 다르지 않다.

공화국에서도 따라온다고 이를 악물고 있기는 하지만, 절대로 따라올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야 대놓고 이쪽과 지혜 누나가 교국을 밀어주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심지어 교국민들의 자긍심을 고취 시킬 만한 사건도 한두 가지가 아니지 않은가.

교국은 희생과 부활의 성자, 노을빛의 검신, 대마법사, 붉은 전신 보유국이었고, 위 상징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공화국이 괜히 그림자의 영웅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마 이쪽이 그림자의 영웅을 만들지 않았더라도, 지들끼리 뭔가를 만들었을 확률이 높다. 아니, 분명히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거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한 건가….’

썩은 사과 한두 개가 문제가 아니다. 교국 전체에서 이런 종류의 우월주의가 성행한다면 당연히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이런 우월주의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에게는 더욱더 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주 예전에 생각 없이 만들어버린 신성한 민주주의의 문구가 스쳐 지나간 것은 당연지사.

‘베니고어 여신 아래에….’

“…….”

“…….”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바꿔 말하면 베니고어 여신을 믿지 않은 이들은, 베니고어 여신의 아래에 있지 않은 이들은 자신들과 평등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정말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 같아 인상을 찡그리며 의자에 앉는다.

“후우….”

무심코 고개를 올리자 바로 정면에서 쌍둥이들을 양쪽에 끼고 수다를 떠는 안기모 새끼가 시야에 비쳐왔다.

“헤… 헤헤헤… 아? 부길드마스터… 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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