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66화
새로운 일상(21)
‘왔다.’
지방 낀 목소리가 아니다. 남자가 들어도 멋지게 들리는 중저음의 목소리. 대충 들어도 메인 빌런이라고 할 수 있는 목소리였다. 최면 아저씨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와는 질이 다르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흑막이라고 할 만하자너.’
마치 동굴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려왔던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의 목소리나, 비열하지만 날카롭게 귀에 꽂혀 들어왔던 이토 소우타, 사자나 호랑이 같은 야생동물이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던 바하무트의 목소리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카리스마 있게 들려오는 목소리였던 터라, 긴장감이 샘솟을 수밖에 없었다.
진청과 밥 한번 먹자고 공화국에 왔다가 커다란 사건에 휘말려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아직도 시바 이 대륙에 빌런 새끼들이 남아 있었던 거냐고….’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에서 템플러들의 비밀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교단 내부에 있는 어둠의 손길이 대륙을 향해 드리워진 것일까.
본래 교단이라는 게 언제나 이런 역할이기는 했지만, 도대체 베니고어 교단은 무엇이 문제길래 사건 사고를 떠안고 다니는 것일까.
물론 내가 집필한 신성한 민주주의의 나비효과였으니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니기는 했지만 정말로 교단 전체를 뒤집어 쥐 잡듯이 잡아야 하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
“…….”
지금 베넷을 쥐 잡듯이 잡고 있는 저 정체불명의 남자처럼 말이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베넷 사제.”
‘카리스마 장난 아니자너….’
“그… 그게….”
“…….”
“…….”
‘완전 꼼짝도 못 하자너. 심지어 저런 아저씨한테 존댓말도 써주고 있자너….’
“희생과 부활의 성자님께 무례를 끼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희생과 부활의 성자님께 무례를 끼칠 수가 있겠습니까. 저, 저는 단지….”
“그 입 닥치십시오. 베넷. 지금 당장 당신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은 심정이니 말입니다.”
“…….”
“그는 베니고어의 아들입니다. 지금은 그가 잠깐 잘못된 길로 빠졌을 뿐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눈앞에 있는 베넷은 납작 엎드린 채로 벌벌 떨고 있는 중, 심지어 정체불명의 남자는 희생과 부활의 성자가 베니고어의 아들이라는 설에 힘을 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이쪽에게도 우호적인 것처럼 보인다.
아마 생김새 역시 빌런답게 생겼을 것이 분명, 내가 생각해도 빌런을 외모로 차별하는 이 현실이 조금 가슴 아프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이 대륙에서 큰일을 하는 놈들은 조금 생긴 새끼들이더라.
시스템이나 베니고어, 혹은 관리자들이 전부 외모지상주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심지어 그 찌질했던 송수경조차 미소년이라면 미소년이라 할 법한 외관을 지니고 있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니, 어쩌면 그냥 자연의 법칙 같은 것이 아닐까. 만약에 살인여단 같은 집단을 창설한 게 거대한 덩치를 가진 카리스마 살인마 정진호가 아니라 거대한 지방을 가진 최면 아저씨라고 상상해 보자.
그러니까 최면 아저씨가 갑자기 ‘나를 지켜보고 있나! 어린 죽음이여!’라고 외친다거나, ‘내가 네게 바치는 시와 노래가… 쿨럭… 어떤가!’라고 외치며 검을 휘두른다고 상상해 보자.
심지어 정진호의 최후마냥 질질 짜면서 ‘흐윽… 흐으으… 흐으으으윽… 아쉽구나! 아쉬워… 조금이라도 더 데려가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도 아쉽구나! 겨우 이것밖에 죽이지 못했다는 게… 너무나도 원통하구나… 흐… 아아아아아아악! 조금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죽여야 했… 아아아… 아아아아아!!!’ 같은 소리를 중얼거린다면….
‘진짜… 진짜… 개 소름 끼치자너… 이건 도저히 봐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자너….’
당시 정진호가 보여줬던 모습보다 1,000배는 소름 끼칠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사이코들만 모여 있는 살인여단이라고 해도, 최면 아저씨가 단장인 살인여단은 거를 것이 분명했다.
일단 결정적으로 1지혜와 1기영은 절대로 입단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마 쌍둥이들도 도미로 같은 애들도 입단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괜찮은 빌런들이 모두 그럴듯한 겉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자연의 법칙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슬프지만… 그 누구도 최면 아저씨를 따르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갑작스레 나타난 정체불명의 인물에 더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
‘베니고어 교단에 도대체 어떤 어둠이 숨겨져 있는 거냐고. 젠장….’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된다. 물론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닿았으니 차근차근 놈들의 비밀을 캐낼 수 있지 않을까.
괜스레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조심스럽게 이쪽의 손을 잡아 오는 녀석이 시야에 비쳐온 것.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희생과 부활의 성자시여….”
그리고,
“…….”
“…….”
“하아… 쓰읍….”
“?”
“?”
“…….”
“…….”
‘아… 조금 애매한데…?’
실망했다는 표현은 내가 생각해도 좀 어처구니없기는 했지만….
‘조… 조금… 그런데? 아무래도… 어둠 같은 거… 없는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위험경보를 5단계 정도 축소시킬 수밖에 없었다.
“…….”
“…….”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커다란 코. 그리고 조금은 음흉해 보이는 눈매. 무엇보다 소름 끼치는 눈동자가 눈에 띈다. 피부관리는 언제 받았는지 각질이 일어나 있고… 입술은 전부 다 터져 있었다.
‘립밤 좀 바르고 다녀. 시바.’
관리를 받으면 그나마 개선의 여지가 있을 것 같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신뢰가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못생긴 빌런은 존재할 수 있어도, 관리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 개성조차 없는 빌런은 존재할 수가 없다.
‘결정적으로 샤워 좀 해. 너네 둘 다. 시바. 진짜. 그게 제일 커.’
“희생과 부활의 성자시여…?”
‘쓸… 쓸데없이 목소리만 좋자너.’
최면 아저씨가 신나게 잡아당겨 붉어진 뺨을 바라보는 눈빛이 소름 끼쳐온 것은 당연지사.
‘그… 그냥 집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김이 빠졌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지만 김이 빠진다. 안기모에게 순식간에 최면을 걸어버린 것도 뭔가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안기모가 너무 방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아니면 꽤 개성 있는 트릭을 가지고 있든가 말이다. 딱 그거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뭐 어디서 운 좋게 괜찮은 아티팩트를 발견해서 그걸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등급 측정 불가 던전 최면의 동굴 같은 게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르니까.
혹시나 눈앞에 있는 이 새끼가 메인이 아니라 놈의 뒤에, 혹은 놈의 뒤에보다 더 뒤에 뭐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실망이 커서인지… 더 이상 기대가 되지 않는다.
‘하기사 베니고어 넷에 똥글 남기고, 현성이한테 낚이기까지 한 집단한테 뭘 기대할 수가 있겠어… 그냥 인터넷 트롤들한테 괜한 걱정을 한 거일 수도 있고….’
물론 놈들이 위험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만약 녀석들에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조금 더 카리스마 있는 윗대가리가 있었더라면, 조금만 더 능력이 있었더라면, 대놓고 말해 한 5년 이상의 시간이 놈들에게 있었다면 정말로, 27군단 소환사태와 비견되는 위기가 도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굳이 파란 길드 정도 되는 집단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손을 쓸 정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히기도 한다.
어디 재능 있고, 가능성 있는 초보 용사 파티가 우연히 베니고어 교단 공화국 지부에 들러, 그곳의 비밀을 파헤치는 스토리라고 생각하면 꽤 긴박함이 넘치는 전개가 되겠지만….
‘암만 생각해도 내 선에서 처리할 문제는 아닌 것 같자너.’
“…….”
“…….”
아니나 다를까 새로 등장한 녀석의 능력치도 별 볼 일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정녕 내 자연의 법칙 이론이 들어맞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
굳이 비교를 하자면 상위 모험가 정도의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크게 나쁘지는 않다. 저 정도만 해도 대륙에서 강자로 추앙받기야 하겠지만 극단적으로 벨리에 하나만 튀어나와도 감당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거기에….
‘최면 능력에도…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상식, 상식 운운하며 차근차근 빌드업 하려고 하는 것도 그렇고, 이미 최면에 걸렸다고 판단되는 안기모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았던가.
그리고 어차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황이 정리될 것이다.
‘실수했자너.’
지금의 상태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일단은 녀석들에게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다친 곳은 없네요. 기도실이 포근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요. 냄새가 좀 나기는 하지만… 물론 당신들한테서.”
“네?”
“그런데 정말로 신기하네요. 분명히 전조가 없었는데. 언제 주문이 들어간 건가요?”
“…….”
“…….”
“아니, 주문이 아닌가? 하기사 마력이나 신성력이 움직이는 걸 보지 못했으니까. 당신들 특성에서도 딱히 정신계열 특성이 보이지는 않고… 물약의 효과 같은 거라고 하기에는 제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도 없으니까… 아. 역시 아티팩트인가 봐요. 내 말 맞지? 아티팩트 맞지?”
“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계시는 겁니까. 희생과 부활의 성자시여.”
“아. 냄새나니까. 입 다물어요. 최면 아저씨. 그리고, 당신도 움직이지 말고. 장담하는데 거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이면 죽어요.”
“…….”
“…….”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이면 죽는다니까.”
“…….”
“딱 5초만 거기서 더 기다려요. 그럼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거야.”
긴장감에 땀을 흘리고 있는 두 녀석의 모습이 눈에 띈다.
최면 아저씨는 둘째 치고서라도, 커다란 코를 가지고 있는 남자는 긴장감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몇 걸음만 더 다가오면 이쪽의 목을 비틀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눈에는 공포가 서린다.
“넌… 넌 누구냐.”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을 보니 기선제압에 성공한 모양이다.
“교국의 명예 추기경, 파란 부길드마스터, 희생과 부활.”
“…….”
“…….”
“…….”
“색욕과 영면.”
“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이쪽을 향해 달려 들어오는 커다란 코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동시에.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 구멍이 뚫리며 누군가가 내려온다.
으직 하는 소리와 함께 이쪽에 쇄도하는 커다란 코의 몸이 땅바닥에 쳐박힌다.
‘한 발자국 더 움직이면 죽는다니까.’
노을빛의 날개가 내 몸을 감싸 안는다.
공기가 떨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봐. 내가 실수한 거 맞자너…’
조심스레 날개에 걸터앉은 이후에 말을 보탰다.
“우리들 이제 영혼이 연결되어 있거든요. 최면 아저씨.”
“…….”
“…….”
먼지가 다시 땅바닥으로 내려앉을 즈음에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십니까… 기영 씨?”
‘생각보다 더 빨리 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