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69화
새로운 일상(24)
“금발은 아니죠?”
질문에 대한 답을 기다리는 동안 불안한 마음을 추스를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금발은 아니겠지?’
자주 말해왔었지만 금발과는 상성이 그다지 좋지 않다. 언제나 시바 큰 사고를 치고 일을 꼬이게 만드는 것은 금발 머리 남정네들이 아니었던가. 1회차에서 함께했던 이름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녀석이 나의 이론에 방점을 찍게 했다.
이상한 징크스가 생겨난 것 같아 지금은 어디서 뭐하고 있는지도 모를 회색빛의 용사 라파엘도 멀리했을 정도.
물론 예외도 존재한다. 균열박물관 관리인 우리 막아들이 그 훌륭한 예시였지만, 막스 같은 경우에는 계속해서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금발 머리 성인 남성에 해당되지 않는다. 세라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라 걔는 분명히 조금 더 크면 뭔 사고든 크게 사고 칠 거야. 시바… 한번 두고 봐. 진짜.’
심지어 기본적으로 미형인 금발들은 그 위험도가 남다르다. 최면 아저씨의 입이 열린 것은 내가 재차 녀석에게 질문을 던지려 했을 때였다.
“…….”
“…….”
“으음… 제… 제 기억에 금발은 아니었던 것 같았습니다. 분명히 흑발이었을 겁니다.”
“…….”
“…….”
‘그나마 다행이기는 하네….’
마음속에서 점점 커져 가고 있었던 찝찝함이 사라진 것은 당연지사. 새로운 빌런이 금발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게 웃기기는 했지만, 그 찝찝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빌런의 외모와 위험도가 비례한다는 이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현시점에서 정체 모를 빌런의 위험도를 최대로 격상시키는 것은 아직 이르다.
‘최면 아저씨… 심미안을 믿을 수가 없자너….’
정체불명의 남성이 김현성보다 잘생겼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언이 문제.
언제나 외모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 주관성을 띠게 마련이었으니 이해가 가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녀석의 안목에 대한 의심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리라.
‘그래, 모든 인간이 나만큼 객관적이지는 못하자너.’
결국에는 어느 정도 자신의 취향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거다. 본인의 취향을 완전히 제거한 이후 객관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엄밀히 말해 그게 가능한 인간은 이기영 정도밖에 없다.
김현성보다 잘생겼다니,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정도가 아닌가. 보아하니 녀석이 원하는 남성상이 덩치가 큰 멀대인 모양, 단순히 김현성보다 더 키가 크다고 해서 점수를 조금 더 높게 준 것 같은 느낌이기는 했지만….
평범한 인간이 김현성보다 잘생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 얼굴보다 완벽한 얼굴은 존재하려야 존재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 게 시바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다니까?’
“그런데, 정말 김현성보다 잘생긴 거 맞아요?”
“네… 네?”
“아저씨 주관적인 의견을 빼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세요. 진짜로 김현성보다 잘생겼다고요?”
“네? 아… 네. 그렇습니다만…?”
“아니, 그러니까요. 최면 아저씨 주관적으로 생각하지 말라니까요? 일반적인 미의 기준을 한번 따라가 보자고요. 잠깐만 눈을 감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잠깐 아저씨가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모습은 내려놓자고요. 자. 이제 됐죠?”
“…….”
“정말로 김현성보다 잘생긴 것 같아요?”
“…….”
“…….”
“아니…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시바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참… 나….”
“죄… 죄송합니다.”
“아니, 뭐 죄송할 건 없어요.”
“그… 그래도… 죄송합니다.”
“이제 됐으니까. 조금 떨어져서 걸어요. 제가 손짓하면 다시 가까이 와도 되고요.”
“네….”
역시나였다. 물론 최면 아저씨의 입에서 그런 발언이 나온 것은 사실인 만큼 새로운 빌런이 꽤 생겼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어느 정도 주관성이 섞인다면, 누군가에게는 김현성보다 잘생겨 보일지도 모른다. 1,000명이 있다면 한두 명 정도 말이다.
사실 다른 정보 없이, 그것만으로도 놈이 장래에 위험한 인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확신하게 된다.
지금은 덩치가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갑작스레 제2의 육망성 같은 일이 터질 수도 있는 만큼 조금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너무… 대놓고… 잡으려고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
‘이미 바퀴벌레마냥 다시 숨어버렸을 가능성도 높겠지. 아니, 무조건 숨었을 거야.’
그야 으깬 감자가 으깨지지 않았던가. 정황상 간부로 보이는 녀석 하나가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으니 녀석들도 지금 상황에서 뭘 더하기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
아마 최면 아저씨에게서도 손을 뗄 확률이 높다. 곧바로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도마뱀처럼 녀석들은 자신들이 파놓은 구덩이의 존재를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했다.
갑작스레 머리가 아픈 상황이 찾아온 것 같아 인상을 찌푸렸을 때 마침 김현성이 뒤를 돌아보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여전히 잘생긴 얼굴로 말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기영 씨.”
“…….”
본래대로였다면 그냥 숨겼겠지만….
‘너무 숨기는 게 안 좋다는 걸 알았으니까.’
김현성도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기도 했고, 알아둬야 할 일이기도 했다. 이걸 성장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쪽 역시 힘겹게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방금 그 일 있잖아요. 으깬… 아니….”
“아… 네.”
“후우… 너무 심각하게 듣지 마세요. 현성 씨.”
“네? 무슨 일이시길래….”
“…….”
“…….”
“아무래도 루시퍼가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서요.”
“네?!”
아니나 다를까 화들짝 놀라는 녀석이 시야에 비쳐온 것은 당연지사. 루시퍼와 계약까지 해서 어둠진화를 마친 전적이 있는 만큼 녀석도 방금의 발언이 꺼림칙하게 들려올 것이다.
물론 모든 걸 전부 이야기해 준다는 것은 아니다. 너무 많은 정보를 풀면 김현성이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푸는 정보는 제한적으로.
“물론 아직까지는 확실하지는 않아요. 저도 아직 정보가 없고…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는 상황이라서요. 자세하게 말씀드리기는 힘들지만… 아무래도 대륙 내에 루시퍼를 추종하는 이단세력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아니요. 지금 당장 뭘 할 수는 없어요. 아마 그쪽도 저희가 자신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면 곧바로 숨어버릴 것 같아서… 실제로 모습을 드러낼 만큼 덩치가 큰 것도 아닌 것 같고요.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잠잠하게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겠죠.”
‘아. 시바 이거 괜히 말했나.’
그렇지 않아도 걱정거리가 많은 녀석이었는데, 갑작스럽게 루시퍼의 이야기가 들려오자 창백해지는 얼굴이 눈에 들어오는 중.
내가 아무리 현시점에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해도 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야 다른 인물도 아니고 루시퍼가 연관되어 있는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놈들의 본거지로 쳐들어가 깽판을 치고 싶겠지.
문제는 그렇게 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것 정도. 사실상 현시점에서 김현성이 무언가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 기영 씨… 아무래도 이 일은 제가….”
“아니요. 아니요. 제가 말했잖아요 너무 심각하게 듣지 말라고요.”
“심각하게 들을 수밖에 없는 사안입니다. 기영 씨.”
“아니, 물론 심각한 상황이기는 하죠. 제 말의 뜻은, 당장 무언가를 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였어요. 말씀드렸잖아요. 지금은 그쪽의 세력이 크지 않은 것 같다고요. 세력이 크지 않을 때 잡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건 일리가 있지만 세력이 작다는 건 몸을 내빼기도 쉽다는 뜻이거든요. 장담하건대 저희 쪽에서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순간 몸을 숨기고 몇십 년은 튀어나오지 않을 거예요. 특히나 현성 씨 같은 사람이 자신들을 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더욱더요. 저희 쪽도 조심스럽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
“이해하신 거죠?”
“네. 대충… 기영 씨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방금 제가 말씀드린 건 기억 속에서 지우셔도 돼요. 저희는 평소대로 일상을 보낼 거예요. 지금 이런 상황에서 라헬이나 다른 문제에 집중하기 힘드실 거라는 건 알지만 그렇게 하셔야 해요. 저도 최대한 그렇게 할 생각이고요. 물론 그냥 가만히 있겠다는 뜻은 아니지만요. 퍼즐을 맞추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저희는 아직 퍼즐 조각을 이제 막 하나 찾은 상황인데… 어떻게 그림을 완성시킬 수 있겠어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아니요. 그렇게 해야 해요. 이 장기적인 임무에서 현성 씨의 역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 거예요. 보란 듯이 말이죠. 연기를 한다고 생각해 주시면 아마 편하실 거예요. 저는 그동안… 아니, 오해하실까 봐 하는 말씀인데, 제가 직접 적들의 본거지를 파헤치겠다는 건 아니고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퍼즐 조각을 조금 모아보려고 해요.”
“아….”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케루, 도미, 쓰로한테 일을 좀 맡겨보려고요. 당연히 창렬 씨나 리안 씨도 함께 활동할 거고요. 지혜 씨를 비롯한 검은 백조의 핵심 인력들에게도 말을 전할 거예요. 이런 일은 전문가들한테 맡겨야죠.”
“그렇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간단하기는 했지만 지금 이쪽이 할 수 있는 조치 중에 가장 강력한 조치였다.
특히나 외신 3남매를 움직인다는 것에서 그러했다. 어느덧 청소년기를 맞은 녀석들을 말이다.
이제 슬슬 녀석들을 제대로 활동시킬 계획이었는데 마침 딱 적절한 시기가 온 것 같은 느낌.
아직은 조금 불안정한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았던지라 사실은 조금 더 묵히고 싶기도 했지만…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번 임무에 제격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격이 높으니….’
혹시 모를 적들의 능력에도 면역이 있을 테고, 심지어 정식으로 데뷔도 하지 않은 상태다. 능력에 대해서는 굳이 의심을 여지도 없다.
쓰로누스와 케루빔이 가지고 있는 능력도 그렇고, 온갖 유틸을 담당하는 도미니온스의 유능함은 웬만한 대륙의 마법사들을 찜쪄먹을 정도다.
제한적이지만 지금은 전생처럼 자유롭게 순간이동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정하얀 이후에 최초의 순간이동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기 캐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셋 모두 완벽하게 준비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애매하기는 했지만, 본래 상황이라는 건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법.
막말로 이후에 무슨 일이 터질지 예상할 수 없는 만큼 지금부터 미리미리 경험치를 쌓아 둬야 했다.
‘사실 이런저런 일이 있을 때마다 써먹기도 했었자너.’
김현성이 내 말에 납득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녀석 역시 외신 3남매의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쓰로누스가 아직 준비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아니네. 신뢰하지 않네.’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충분한 것 같던데.”
“아니요. 아직 한참이나 부족합니다. 미흡하고요. 전투기술을 흡수하는 속도가 빠르고, 본인이 의지도 있지만… 인정욕구가 강하고, 충동적이며, 유약합니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 말입니다. 솔직히… 이런 종류의 임무에 투입되었을 때 과연 제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가… 의심됩니다만….”
“…….”
“…….”
‘조금 평가가 박하네.’
“기영 씨의 판단이니 믿고 맡기겠습니다.”
하기사 김현성은 매번 쓰로누스에 대한 평가가 박하기는 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쓰로누스뿐만이 아니지, 라파엘에 대한 평가도 박했고, 다른 녀석들의 대한 평가도 박했다.
사실상 김현성의 입에서 누군가를 인정하는 것을 들어본 것은 1회차 성검용사 성지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든다.
“네.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현성 씨. 제게 올라오는 보고서는 정기적으로 현성 씨에게도 보내드릴 테니 정보가 업데이트되는 대로, 아니면 시간이 날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네요.”
“네….”
“그럼 지금은….”
“네.”
“일단 오셨으니 여행을 즐기시죠? 제가 아까 말했던 것처럼요.”
“네. 기영 씨.”
‘근데 솔직히 마냥 즐길 수는 없기는 해.’
당연하지만 김현성에게 활짝 미소를 지어준 이후에는 곧바로 통진 채널을 열 수밖에 없었다.
-군사님.
-…….
-군사님?
-무슨 일이지?
-루시퍼예요.
-?
-정확히 말하면 루키페르의 신도들이 공화국에 있었네요. 방금 제가 꼬리를 밟았고요.
-…….
-…….
-대답할 가치도 없는 블러핑이군. 그렇게나 이기고 싶나?
-?
-네놈의 장단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