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74화
새로운 일상(29)
커뮤니케이션 장애가 없는, 그러니까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김현성 같은 경우는 이런 상황을 버겁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 평범한 사람들도 살짝 꽁기꽁기한 기분을 느낄 만했다. 아마… 10대 청소년이었다면 말이다.
‘너 시바 무슨 청소년이야?’
김현성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아직 10대에 머물러 있다는 그 증거가 여기에 있다. 본인조차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어째서 자신의 기분이 이렇게 좋지 않은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백 퍼센트 질투 비스무리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똥을 씹어 먹은 듯한 표정. 마치 정하얀에게 한소라의 뉴 베스트 프렌드 박미진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처럼 보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물론 김현성이 정하얀처럼 극단적으로 박미진을 죽여야겠다거나, 이 세상에서 지워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확률은 낮다.
정하얀과 김현성 둘 다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김현성의 경우에는 정하얀보다 덜 충
동적이기도 했고, 사회가 용납하는 선을 대놓고 넘는 행동은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대충 봐도 엄청 찜찜해 보이는 얼굴이다. 정하얀처럼 자신의 감정에 몸을 담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던지라 더 답답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저 잘생긴 얼굴에 엄청난 의문이 깃든다.
도대체….
‘왜 친한 거지?’
아니….
‘언제, 어떻게 친해진 거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리라.
보통 아래에서는 진 군사와 사적으로 만나는 일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김현성은 아마 내가 진 군사와 사적으로 대화하는 걸 아예 본 적이 없을 가능성도 높다.
물론 가끔 내가 진 군사를 언급하거나, 녀석에게 김현성을 맡기거나, 공화국에서도 진 군사가 나를 언급한 적이 있어 둘 사이에 어느 정도 끈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겠지만 이 정도로 친근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굳이 내가 이런저런 해석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김현성의 표정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조… 조금 평소보다 과하게 친한 척하기는 했자너…. 우리 베스트 프렌드 아니야. 그냥 앙숙같이 좀 티격태격대는 느낌이지…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마….’
하지만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진 군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는 눈빛이었다.
'사… 사실… 현성이랑 있을 때는 막 대하는 느낌은 아니니까. 그래서 그런 건가?’
그러고 보면 김현성과 나는 살짝 서로 예의를 차리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다. 둘 모두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똑같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진 군사를 대하는 분위기가 더 가볍다.
정확히 말하면 김현성에게는 살짝 내숭을 떨고 있었고, 진 군사에게는 조금 더 가면을 벗어 던진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 알맞을 것이다.
물론 진 군사에게 나쁜 말을 한다거나, 대놓고 도발하고 놀리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 짧은 대화만 보더라도 자신과 진 군사를 대하는 게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녀석이 어떤 방향이 더 좋다고 여길지, 그러니까 조금 더 가벼운 관계를 더 좋다고 여길지, 아니면 살짝 예의를 차리는 게 더 좋다고 여길지가 의문이었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그냥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있었다.
“…….”
“…….”
입을 꽉 다물고 있는 모습.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을 보니 곧 뭐라도 말을 꺼내올 모양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하얀이 그다지 이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한소라와 함께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수다를 떨기에 여념이 없다.
마치 진 군사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오히려 저게 진 군사가 원하는 모습일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인상을 구긴 김현성이 크게 한 발자국을 내디디며 이쪽 라인과 발을 맞추려고 하는 상황은 진 군사가 가장 원하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그… 근데 피할 수가 없자너.’
분명히 나와 진 군사, 그 뒤에 정하얀과 한소라, 그 뒤에 김현성이 걷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빠르게 걸음을 옮긴 김현성이 내 옆에 자리해 있는 게 느껴진다.
덕분에 시바 양산을 씌워줬던 충성스러운 사용인 왕강의 포지션이 애매하게 변해버린다.
그리고 한마디.
“생각보다… 사이가 좋으셨군요.”
“네?”
“진청 군사와 말입니다.”
“아아… 네. 사이가 좋다고 해야 할지….”
“…….”
옆에서 콧방귀를 끼고 있는 진 군사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 내가 왜 시바 김현성의 눈치를 봐야 되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변명이라기보다는 지금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기야 하다.
“아… 가끔 통신채널을 이용해서 연락을 주고받았었거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음이 맞아서 체스를 같이 두기도 하고… 가끔, 만나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공화국에 관련된 이야기는 진 군사님을 통해서 하는 게 편해서요. 주로 일 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이런저런 일로 의견을 나누어야 하는 일이 많았던 터라.”
“…….”
“그렇죠? 군사님.”
“틀린 맡은 아니군.”
“자주 만나신 모양이시군요. 체스를 무척 많이 두신 것처럼 보였는데….”
“아니요. 자주 만난 건 아니고 통신채널로도 체스를 둘 수는 있으니까요.”
“네?”
“E2, E4.”
“C7, C5.”
“이런 식으로요.”
“아… 지금….”
“기물이나 보드가 없어도 체스를 둘 수 있으니까요. 블라인드 체스라고 들어보셨죠?”
“아… 네.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네… 그… 그렇군요. 블라인드 체스를 하면서… 아….”
“…….”
“…….”
‘아. 시바 실수했나.’
자주 만난다는 말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 통신채널로 체스를 둔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는 했지만… 이건 또 이거 나름대로 김현성의 예민한 감수성을 건드려 버린 것일까.
“그렇게도 체스를 둘 수 있었던 거군요….”
“…….”
“…….”
“현성 씨도 가르쳐 드릴까…요?”
“괜… 괜찮습니다.”
“…….”
“어… 어차피 배워봤자… 제대로 하지 못할 테니까요….”
“…….”
‘아니, 시바 왜 이렇게 예민하고 속이 좁아? 시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크게 실망한 모습이 눈에 비쳐온다. 아마 자신은 평생이 가도 이런 걸 절대로 하지 못할 수도 있단 생각에 빠진 것이리라.
정상적인 체스도 잘 두지 못하는 판국인데, 블라인드 체스를 배운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심지어 간혹 김현성과 체스를 둘 때면 내가 대놓고 지루하다는 느낌을 풍기지 않았던가.
김현성에게 지루하다거나 재미없다거나 너랑 하는 거 진짜 개노잼이라서 시간을 죽이는 기분이라고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만, 아마 김현성도 내가 보여주는 모습을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한번 크게 무언의 압박을 한 이후에는 다시는 김현성의 입에서 체스를 두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기물만 봐도 그때의 정적이 떠오르는 모양인지, 체스 보드 자체를 가까이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덕분에 김현성의 방해 없이 조혜진과 체스를 둘 수 있어 이득을 보기는 했지만….
“아무튼 간에… 그렇게 계속 인연이 쌓이고 쌓여서 이렇게 저택으로도 초대를 받게 되네요. 물론 굉장히 중요한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요. 그렇죠. 진 군사님?”
“일 이야기는 나중이다. 일단은 손님으로 찾아온 만큼 제대로 대접해 주는 것이 도리겠지. 내 저택에 머무르는 동안 부디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군.”
‘그래. 나도 오자마자 일 이야기 하기는 싫었어. 스트레스 받자너.’
“…….”
“…….”
김현성이 다시 한번 말을 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글쎄요. 기영 씨가 과연 이런 곳을 편하게 느끼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아. 시바. 현성이 형! 진짜! 아!’
김현성 자기 자신도 모르게 사이에 터져 버린 급발진. 입을 열어버린 걸 조금 후회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일단 입 밖으로 내밸었으니 뭐라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김현성의 절박한 표정이 눈에 띈다.
“…….”
“…….”
“공화국은 정말로 권력자들이 살기 좋은 곳인가 봅니다.”
‘되는대로 말하면 안 돼요. 현성이 형… 아….’
“이렇게 넓은 부지에서 황제처럼 부를 누리고 계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말입니다. 당신에게는 조금 실망했습니다. 진청 군사. 공화국민들이 피땀을 흘려서….”
“공화국민들의 피땀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파란 길드마스터. 애초에 이 토지는 던전의 부지였고, 저는 그 던전의 부지를 구입한 것뿐이니 말입니다. 당신이 뭘 상상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던전의 부지를 구입한 자금의 출처 역시 검은돈 따위가 아닙니다. 제가 벌인 사업으로, 제 능력으로 벌어들인 것으로 만들어진 곳이지요. 공화국의 총통에게 대지를 사사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겠지만 저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땅을 받은 적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반려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군요.”
“…….”
“거기에 애초에 이 지역은 제 저택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개척되지 않은 땅이었습니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저와 제 수족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개척한 망이라는 것이지요.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사… 사용인들을 착취하는….”
“단순히 사용인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내 저택에서 일하며 나의 손발이 되어주고 있는 이들이니 말입니다. 분명하게 이야기해 두겠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언제든지 나가도 좋다 분명히 일러두었고,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순전히 그들의 뜻입니다.”
“그걸 어떻게… 믿….”
“용월.”
“…….”
“…….”
“허락하시니 무례를 무릅쓰고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노을빛이시여. 저희는 튜토리얼 던전에서 낙오한…
흔히 이야기하는… 대륙에 버림받은 인간들이었습니….”
“쓸데없는 이야기는 할 필요 없다. 지금 네가 네 의지로 이곳에 남아 있는지에 대해서만 설명하도록.”
“저의 보잘것없는 육신과 혼이 지옥 불에 타들어 가 바스러지더라도, 저는 군사님과 함께할 것입니다.”
“…….”
“…….”
“또다시 쓸데없는 소리를….”
‘그러니까. 쓸데없는 사족이 많이 붙어 있자너.’
분명히 네 의지대로 이곳에 남아 있는지에 대해서만 설명하라고 일렀는데, 뭔 놈의 육신과 혼이 지옥 불에 타들어 가는 이야기까지 나와야 하는지 모르겠다.
당연하지만 진 군사는 그녀의 말에 감동한 것 같지도 않다. 말 그대로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는 느낌이었다. 아마 본인이 과거에 혹은 지금도 해오고 있는 일들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모양새.
‘이 새끼 딱 보니까 낙오자들 중에서 쓸 만해 보이는 애들 데리고 가서 키우고 있는 거네.’
안목은 귀신같은지 마음의 눈으로 둘러봐도 딱히 모난 곳이 있어 보이는 녀석들이 보이지 않는다. 나름대로 중급 모험가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이들로 성장한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딱히 진 군사가 손을 쓰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다단계네. 이거.’
녀석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원에 유지되고 있는 생태계처럼 녀석도 손을 쓰지 않고 코를 풀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한 거겠지.
용월이나 왕강 같은 애들을 먼저 키워 놓으면 나머지는 일사천리다. 굳이 말하기도 입 아프겠지만 이곳의 사용인들이 여기를 떠날 리도 만무하다.
애초에 튜토리얼에 제대로 참가하지 않은 낙오자들이라고 했으니, 성향도 도전적인 걸 선호하지 않은 부류이지 않을까.
‘돈 많이 주지. 좋은 곳에서 등 따시고 배부르게 지내지. 보통 안전하지. 훈련도 시켜주고. 같은 동향 사람들 만나서 마음도 따뜻해지지. 고향 냄새 나지. 시바.’
나라도 이곳에 평생 눌러앉고 싶을 것이 분명했다.
녀석들이 진 군사를 은인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 저택은 살기 좋은 천국이기도 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갑작스레 궁지에 몰린 쪽은 이상한 소리를 지껄인 김현성 쪽. 녀석도 크게 당황했는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녀석에게 한마디를 해오는 진 군사가 시야에 비쳐온다.
“종종 그런 오해를 하는 이들이 있더군요. 이해하겠습니다.”
‘진… 진짜 원숭이를 바라보는 것 같자너….’
지혜 누나가 진 군사가 다른 이들을 원숭이로 본다고 하는 이야기가 이미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기는 했지만 저 표정을 실제로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저건 원숭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마치….
‘장구벌레… 라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자너… 장구벌레자너….’
말은 김현성의 실수 아닌 실수를 덮어주고 있는 것 같았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아니, 표정도 정상처럼 보이지만, 저 눈빛이 문제였다.
원숭이 취급을 받지 않은 자들만 느낄 수 있는 차별적인 눈빛이다. 아마 지금의 내가 저런 눈빛을 받았다면 실제로도 상처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김현성이 눈치채지 못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표현이 더 필요하겠는가.
“제가… 경솔했던 것 같군요.”
그 와중에 김현성도 존심이 상했는지 사과는 해오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경솔했던 것 같다고 뭉뚱그려 실수를 표현할 뿐이었다.
‘왜 혼자 기 싸움 하고 그래.’
마치 시간이 얼어붙은 것 같은 느낌. 솔직히 풍경이 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 와중에 진 군사는 시바 아까 내가 외친 E2, E4의 체스게임을 그대로 이어나가고 있는 중.
아이나 페넬로티와 제니스 후작의 뜨겁고도 불같은 사랑이 떠올라 발작이라도 일으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체스는 두고 싶었던 것일까.
본채에 도착하기 전까지 한 게임은 마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손님에게 즐거움을 선사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가는 상황.
그렇게 한두 시간을 걷자 얼떨결에 본채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시바 본채의 모습을 제대로 눈에 담을 새도 없이 말이다.
솔직히 한 20분이 지난 시점부터는 힘들어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더라.
‘시바 힘들어 죽겠네.’
곧바로 응접실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싶었지만….
‘어?’
한쪽 구석에 있는 익숙한 물건에 저도 모르게 손을 대다….
쨍그랑!
저도 모르게 그걸 깨뜨리고 말았다.
‘어어? 어어어?’
진 군사의 아들, 진영의 유품.
그러니까 내 물건이었다.
“아… 안 돼!!!”
창백해진 사용인 용월이의 비명 소리와 표정이 가장 먼저 눈에 비쳐왔다.
‘어? 아니야…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