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77화
새로운 일상(32)
“소가주의 유품이 버려지는 것이 문제라면….”
“…….”
“제가 보관하도록 하겠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냐고… 시바… 슬슬 배고프다고….’
이 미치고 팔짝 뛸 상황을 제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그냥 지켜보고만 있기에는 상황이 점점 점입가경으로 흘러가는 터라 당연히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시바 이 넓은 저택에서 정적이 얼마나 흐른 건지 기억이 나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내가 친 대사로 인해 다시 한번 정적이 흐르는 중.
그 와중에 당황스러웠던 건 내 발언이 진 군사의 수족들에게 어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까부터 사특한 뱀이니 뭐니 하던 한 노야와 변성기도 오지 않은 것 같은 꼬맹이, 그리고 조용히 눈치만 살피고 있었던 용월은 더욱더 이쪽을 적대시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마치….
‘그걸 네가 왜 가져가?’
라고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다.
아니, 그것보다는….
도대체 어디까지 자신들을 우롱해야지 직성이 풀릴 것이냐고 묻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한 노야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진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니 잠시 후에는 이십사수 매화검법이라도 출수할 것 같은 모양새.
장담하건대 진청이 없었더라면 이노옴!!! 하는 소리와 함께 도포를 펄럭거렸을 것이다.
오해가 더욱더 깊어진 것 같은 그림이 그려진 것 같기는 했지만….
“…….”
“…….”
‘아니, 버리는 건 싫다고 한 건 너네였자너. 그럼 누군가가 보관해야 하는 건 아니냐구. 이게 합의점이라고….’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녀석의 유품을 보관하는 게 꼭 교국에서 온 사특한 뱀이 될 필요는 없기야 하겠지만 사실 나만큼 진영의 유품을 보관하는 게 어울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소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인 발언에 완전히 압도된 좌중. 천천히 걸어 나가자 화들짝 놀란 왕강이 검을 다시 검집에 밀어 넣으며 황급히 무릎을 꿇는다.
“추… 충!”
‘이… 이 새끼, 아니, 눈치가 빠른 건 둘째 치고 행동력 뭔데.’
“충!!”
“충!!!”
왕강이 무릎을 꿇으니 심지어 그 뒤에 있는 이들도 당연히 차례대로 무릎을 꿇는 중이다.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진 군사의 눈에 황당함이 깃든다.
도대체 시바 이게 무슨 개짓거리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나 역시 녀석의 생각에 공감할 수 있었다. 시바 나도 대체 이게 무슨 개짓거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저도 모르게 발동된 DNA로 인해 저도 모르게 안주인 ‘후보’로 자리가 잡힌 것이 문제인 것일까.
‘그래, 애매하니까 반대 의견이 나오고 그런 거야.’
현 상황에서 가장 확실하게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완전히 도장을 찍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좋은 날에 이 무슨 소란인지….”
“…….”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로군요.”
최대한 카리스마를 꾹꾹 눌러 담아야 한다. 무언가 거부하기 힘든 표독스러운 후궁의 기백과 독기가 느껴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작 객에 불과한 제가 이 자리에서 목소리를 올린다는 것은 이 저택의 주인이신 진 군사님께 실례가 되는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어떻게 목소리를 올리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한 자들을 수족으로 부리고 있는 군사님께 절로 동정심이 일 정도네요.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어떻게 만들어진 자리인지 이해할 생각도 없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수족들이라니… 군사님께서는 참 아량도 넓으시네요. 이런 이들을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계시다니… 진즉에 쫓겨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은 무능하고 눈치 없는 자들을….”
“…….”
“당신들이 진 군사님의 손과 발임을 자처하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울 정도예요. 이게 공화국이 손님을 대접하는 방식인가요?”
당연하지만 할 말을 잃은 진 군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지가 생각해도 뭐라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물론 이쪽이 시발점이 되기는 했지만 사용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될 거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특히나 진영 소가주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있는 게 없으면서 그를 위한다고 하는 모습은 정말로 우스울 정도예요.”
“…….”
“…….”
“감… 감히 당신이 소가주님에 대해 논한단 말이오?!!”
지금까지 잘 참고 있었던 녀석들 발작 버튼을 누르자 아니나 다를까 커다란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한 노야였다.
용월이가 튀어나올 줄 알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용월이는 진 군사님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바쁘다.
큰 소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 군사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곧바로 목소리를 높이는 한 노야를 저지하기 위해 왕강이 출동하기는 했지만 손짓으로 녀석을 제지한다. 한 노야가 뭐라고 지껄이는지 들어봐야 하겠다는 표현이었다.
“소가주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당신이 어떻게 소가주님에 대해 논할 수가 있단 말
이요! 당신이 조금이라도 염치가 있는 인간이었다면 감히 이 저택에 발을 들이지 못했을 것이외다!!!”
‘역시 이 새끼들 뒤끝 있었자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거자너.’
예상했지만 소가주가 파란 길드 안에서 숨을 거둔 것을 아직까지도 마음에 담고 있었던 걸까.
대륙의 위기를 막기 위해 온몸을 던져 희생했다고 진영의 죽음을 포장했고, 실제로도 많은 공화국민들이 그렇게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오매불망 소가주를 기다리고 있었던 이 사용인들은 다른 이들과 같은 스탠스를 취할 수는 없었던 것 같았다.
너무나 당연히 원망할 대상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쪽이 딱 좋은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진짜 웃긴 건 이 새끼들이 진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거지.’
혹시나 이 새끼들의 머릿속에서 진영 소가주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 저도 모르게 재생되고 있는 것은 아닐
까.
누가 보면 얘네들이 진영 소가주를 업어 키운 줄 알 것이다. 실제로 정하얀과 한소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소가주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당신이 아닌가!! 이 저택에 커다란 상처를 만들고 다시 돌아와 그 상처를 불로 지져 도려내기까지 하다니!! 대체 군사님을 어떻게 홀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세 치 혀와 사특한 눈동자에 이 저택의 정신도 현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기개가 있네.’
“이 저택이 당신의 손아귀에 들어가더라도 그 안에 있는 정신과 우리의 충심만은 결코 뒤흔들 수 없을 것이니!!”
‘아니, 저택을 가지면 그걸로 끝이지. 거기에 있는 정신과 충정은 관심 없어요. 할아버지. 이 저택 재산에 당신들은 포함이 안 된다고요.’
“이 저택에 내 피를 흩뿌리는 한이 있더라도….”
‘멀쩡한 저택에 피는 왜 뿌려요.’
저 요란한 입을 닫게 만들어야 하는 타이밍. 저벅저벅 걸어간 이후에는 곧바로 진영의 유품을 두 손으로 잡고 들어 올리니 숨을 멈추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쨍그랑!!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이노오오옴!!!!!!”
“…….”
“당장 멈추지 못할까!!!!!”
“…….”
“아이고오… 아이고!!! 흐윽… 소가주니이이임!!!”
“…….”
“군사님!! 저자를 멈춰주십시오!!!”
“…….”
“차라리 나를 죽여라!!!!! 차라리 나를 베어라!!!!”
저택을 거닐며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던져 부숴 버린다.
쨍그랑!!
우당탕!!!
물론 근력이 부족해 부서지지 않은 물건들도 더러 있었지만 일단은 시바 땅바닥에 집어 던지는 액션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아이고오… 흐으윽… 그만두시오… 제발 그만해 주시오!!!”
“무엇하느냐!! 당장 이걸 놓지 못할까!!! 왕강!!! 정녕 소가주님의 유품이 정말로 부서지는 꼴을 보고 싶은 게냐!!!!”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한 노야!!!! 그게 당신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길이니….”
내가 얼마나 악독해 보였는지 그 충성스러운 왕강조차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을 정도였다. 녀석 역시 근본은 이 저택의 일원이라는 것일까. 하지만 감히 내게 거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흐어어어억….”
“한… 한 노야!!!”
“이노오오오오오오오오옴!!!!”
“당장 멈춰주시오!!! 이렇게 빌 테니… 당장 멈춰주시오!!!!”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하지 않았소!!”
“흐으으으윽… 흐으으윽… 소가주님!!! 소가주님!!!!”
“흐어어어어어어엉…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그만….”
물건이 하나씩 부서져 갈 때마다 비명을 지르는 사용인들, 진짜 농담 하나 보태지 않고 소가주가 고문당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은 리액션이었다.
심지어 몇 명은 오열하다 못해 졸도를 하고 있었고, 몇 명은 참지 못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다 왕강의 부하들에게 제압까지 당하고 있다.
그 와중에 진 군사는 시바 이쪽을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는 중,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 줄 때마다 가끔 저런 반응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이번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당황스러워하는 것이 얼굴에 쓰여져 있다. “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이… 이기영….”이라고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저택 전체가 개판이 나고 있는 터라 녀석의 목소리는 들려오지도 않는다.
‘막상 깨지니까 아까운 거냐고. 이거 비싼 거기는 하자너….’
심지어 김현성도 크게 당황하고 있었지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유품들을 땅바닥에 집어 던진다.
중간부터 정하얀이 합류해 같이 아무 물건들이나 집어 던졌기 때문에 그나마 빨리 끝이 난 것이다.
“…….”
드디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이벤트. 이제는 전부 끝이라고 사용인들이 흐느끼는 가운데,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
“이것은 그냥 물건입니다.”
“…….”
“아무 의미 없는 물건 말이에요.”
“흐윽… 흐으으으윽….”
“소가주의 유산이 아니라…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물건이란 말이에요.”
“…….”
“진영 소가주의 유산은 이런 물건 따위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
“정녕 이렇게 해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신 건가요? 어째서 진영 소가주가 교국에서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그토록 공화국을 사랑하는 진영 소가주가 어째서 교국으로 향한 것인지, 어째서 진영 소가주가 저 먼 타국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정령 아직도 깨닫지 못하신 건가요?”
“?”
“?”
“?”
“?”
“?”
“?”
“?”
“제가 공화국을 찾은 이유는, 그의 유산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잠깐 잊어버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무래도 진영의 죽음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녀석들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너무나 충격적인 상황이었던 터라 나 역시 억지로 그 녀석과의 추억을 삭제시켜 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먼 타국에서 온 진 군사의 아들이 유독 나를 따르던 기억이 난다. 함께 무지개 솜사탕도 먹고, 같이 놀아주기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지 아마.
그 사랑스러운 아이가 언젠가 당돌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던 것이 뇌리에 스친다.
‘화합 그게 제가 원하는 겁니다.’
며칠 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듯… 자조적이지만 슬픈 눈으로 중얼거렸던 것도 말이다.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응? 무슨 일이니? 영아….’
‘아니에요. 그냥 말 하고 싶어서요. 형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후후… 그러니?’
‘저…저기요. 형.’
‘…….’
‘파파를 잘 부탁해요.’
눈물이 왈칵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