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85화
새로운 일상(40)
“아! 섬서성의 화산파에서 왔다던데요?”
“화산파 말입니까?”
“네. 제 남자친구 중에 하나가 말하기로는 지구에서 유행하던 무협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문파 중에 하나라고 하더라고요. 중원대륙에 존재하는 구대문파 중에서도 제법 유명한 문파라지 뭐예요?”
“…….”
“혹시나 해서 알아보기는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비슷한 세계관이더라고요. 정파와 사파가 분리되어 있고, 남궁세가, 제갈세가, 뭐 모용뭐시기, 사천당가 하는 종류의 오대세가 같은 것도 존재하고… 북해빙궁이나 천마신궁… 같은 것도 있는 것 같고… 검존이니 뭐니 하는 별호 같은 것들도 있고요. 딱 무협 소설 같은 느낌이었어요. 물론 저는 그쪽이랑은 좀 거리가 멀어서 제대로 아는 게 없기는 하지만….”
“…….”
“혹시 희생과 부활의 성자님께서는 잘 알고 계시려나?”
사실 알고는 있다. 지구에 있을 때 친구가 추천해 준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었으니까. 빠삭하게는 아니었
지만 대략적인 세계관 정도는 꿰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왠지 무협 소설을 패 많이 읽어봤다고 말하기가 좀 그랬다는 것. 희생과 부활의 성자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고착화되어 있기도 하겠지만 정하얀, 심지어 한소라 역시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냐는 듯이 샤오 린을 쳐다보고 있던 터라 선뜻 말을 꺼내기가 꺼려진다.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지구에 있는 그 녀석이 라이트 노벨, 애니메이션, 퓨전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 소설에 대해 말할 때면 잔뜩 흥분한 얼굴로 데시벨을 올리며 중얼거리던 기억 때문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자리를 피하고 싶어지지 않았던가.
물론 건전한 취미를 질타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쪽은 녀석의 취미를 존중하고 함께 토론 아닌 토론을 해줬던 쪽이었다. 녀석과 함께 축제도 같이 가주고, 심지어 축제에 갈 때 이상한 옷을 입어달라고 처절하게 부탁해 와 입어준 전적도 있다.
그래, 뭔가 입을 떼기 어려운 이유는 어디까지나… 멀지 않은 곳에서 데시벨을 올리고 있는 성검용사 성지훈 때문일 것이다.
“제, 제가 알고 있어요! 저… 무, 무협 소설 정말로 많이 읽어봤어요! 특히나 금수저 작가님께서 집필하신… SSS급 모용세가 공자님으로 빙의하다를 정말로 재미있게 읽었어요! 사실 제 본진은 라이트 노벨이기는 하지만 무협 소설도 수백 권 정도는 읽어본 것 같거든요.”
‘아 시작됐다.’
“아까 사천당가라고 하셨죠? 모용세가 공자님으로 빙의하다에서도 사천당가가 나오거든요. 무협 세계관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인 지식이겠지만 사천당가는 독과 암기를 주로 사용하는 가문이에요! 모공빙에서는 사천당가의 막내딸 당영영이라는 히로인 캐릭터가 츤데레 속성을 달고 나오는데… 이상하게 사천당가 출신의 히로인들은 츤데레가 근본이더라고요. 보통은 연하 츤데레로 많이 나와요. 혹시 츤데레가 뭔지는 아시죠? 츤츤 하는 거요. 그… 그리고 꼭 사천당가 히로인 캐릭터의 할아버지가 주인공과 인연이 생기는 것은 필수더라고요. 보통 열에 하나는 독왕이라는 별호를 들고나오는데… 이 클리셰는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어요. 무조건 재미있는 부분이거든요. 또 제가 좋아하는 부분은 삼룡오봉 같은 후기지수들이 모여서 친목질을 하는 부분인데요.”
‘이 새끼는 도대체 무슨 소설을 읽은 거야?’
“하지만 제 최애는 소수마공을 사용하는 소수마녀 소수영이에요. 모두가 그녀를 마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모두가 놀라는 반전이 27권에서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녀는 소설의 빌런이었지만… 이후에는….”
‘도저히… 말 못 하겠자너….’
“물론 금수저 작가님의 초기 작품이고… 좀 논란이 많기는 했지만요. 아! 아까 화산파라고 하셨죠? 말씀하신 것처럼 화산파는 구대문파 중에 하나고요. 주로 매화검법과 자하신공을 사용하는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하는 게 근본이죠. 다른 무공들도 많기는 하지만 매화검법과 자하신공이 무조건 근본이에요. 자하신공은 주로 장문인들만 사용하는 게 상식이고요. 매화검법을 사용하는 이들은 일정 경지에 올라가면 매화향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자너… 이건….’
진 군사도 본고장에서 온 만큼 뭔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었는데 지금은 말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닐 것이다.
심지어 성검용사에게 큰 호감을 보였던 김현성도 녀석에게 몇 발자국 떨어지는 중. 저게 정말로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성검용사가 맞는지 의심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성지훈의 갑작스러운 급발진에 샤오 린의 시선도 녀석에게 쏠린다.
“쟤는 뭐예요? 저기 왜 잡혀 있는 거고요?”
“신경 쓸 필요 없다. 샤오 린.”
“신경 쓸 필요가 없긴요. 딱 보니까. 쟤가 저택을 박살 낸 주범 같은데… 제법 하는 짓이 귀엽네… 얼굴도… 괜찮고. 너 이름이 뭐니? 누나랑 친구 할래?”
“네… 네?”
“어때?”
“누… 누나도 모공빙… 좋아하세요? 최애는… 누구….”
“…….”
“…….”
“…….”
“…….”
“쓸데없는 짓은 그만해라. 샤오 린. 본론만 이야기하도록.”
“…….”
“…….”
“네. 뭐… 본론만 이야기할게요. 아무튼 간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 사람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무협 소설의 세계관 같은 곳에서 모종의 이유로 이곳으로 넘어왔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지금 저희가 처한 사정을 생각해보니 딱히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더라고요. 이곳의 세계관도 사실 어디에선가 많이 들어본 것들이잖아요. 오크나 엘프, 고블린이 존재하고, 마력이니 뭐니 하는 것들도… 이 넓은 우주에 그런 차원이 하나쯤 더 존재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잖아요.”
“…….”
“물론 저 꼬맹이가 알고 있는 기본적인 지식과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일정 부분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건 확실할 거예요.”
‘신기하기는 하네.’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기야 한다. 물론 일이 이렇게 된 와중에 현실감각을 찾는다는 게 웃기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구에서 유행하는 서브컬쳐와 비슷한 세계관이 존재한다는 것이 재미있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도 힘들어, 사실은 차원여행자 같은 놈이 소설을 써 팔아먹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김현성도 중얼거린다.
“신기하군요….”
“역시 현성 씨도 그렇게 느끼세요?”
“네. 물론입니다. 대륙의 존재를 인정했을 때, 다른 차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예상하기는 했지만… 무공 같은 것이 실존하는 곳이라니 이 차원이 얼마나 넓은지 새삼스럽게 실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네.”
“만약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현실이라면… 반드시 대륙 차원에서 조사를 벌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후에 어떤 혼란을 초래하게 될지 알 수 없을뿐더러… 기영 씨도 아시다시피….”
‘루키페르 이야기지? 너도 그쪽이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김현성이 고개를 끄덕여왔다.
이쪽 역시 샤오 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자는 지금 어디에 있죠?”
“공화국이 자랑하는 무저지하감옥이요.”
‘그런 게 있었어?’
“혹시라도 위험한 짓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만큼 철저하게 격리시켜 놨어요. 방심은 독이니까. 어떻게 하시겠어요? 곧바로 직접 보시겠어요? 아니면 조금 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까요?”
‘당연히 시바… 지금 당장 가야죠.’
사실 여기서 더 이상 시간이 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물론 시간이 오래 지난 것은 아니었지만 이쪽뿐만이 아니라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를 곧바로 소환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 선다.
튜토리얼 던전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게이트를 조사해야 했고, 공화국에 있는 튜토리얼 던전 외에 다른 던전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지 확인해 봐야 했으니 말이다.
당연히 일은 비밀리에 진행될 것이다. 이후에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만큼 대중들에게 공개하는 것은 시기상조였으니 말이다.
마침 타이밍도 딱 좋다. 모든 이목이 평화협정에 집중된 상황이었고, 때마침 진 군사의 저택에 테러가 일어나기도 했으니 대중들의 관심을 돌리기에 딱 좋은 시기다.
튜토리얼 던전에서 일어나는 일 따위는 아마 언급도 되지 않을 터였다.
“직접 보는 게 좋겠네요. 지금 당장이요. 이후에는 튜토리얼 던전에도 한번 들려야 할 것 같고요. 당연히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 조사팀이 파견될 거예요. 공화국의 입장도 있는 만큼 공화국의 감찰 하에 조사가 진행될 거고요. 당연히 조사 중에 나오는 모든 정보들을 공유드릴 생각입니다.”
“…….”
“…….”
“딱 저희가 생각하는 조건과 일치하는 것 같네요.”
자리에서 살짝 몸을 일으킨 샤오 린이 악수를 건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온다. 이쪽 역시 곧바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맞잡은 것은 당연지사.
그 와중에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내 손등을 문질러와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계약을 맺은 셈이었다. 현장을 정리하는 것도 떠넘겼으니 말이다.
아마 박기리는 곧바로 풀려날 것이고, 언론은 곧바로 통제되기 시작할 것이 분명했다. 사실 언론 통제야 공화국이 전문가였으니까.
적당히 주동자들을 잡아 처벌하고 평화협정에 관한 이야기를 떠벌리기 시작하지 않을까.
그 누구보다도 평화협정이 진행되기를 바라고 있는 한소라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이쪽을 지켜보기는 했지만 괜찮을 것 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자 크게 안심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갑작스레 무림인이 나타났다고 해서 숙원사업을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평화협정에 대한 공문은 교국에서 정식으로 공화국으로 서신을 보내드리는 게 좋겠죠. 적당한 타이밍에 발표해 주시면 될 것 같고… 그리고, 아마 잡혀 있는 인원 중에 베넷 사제라는 인물도 있을 거예요. 그 사람도 다른 인원들과 함께 파란 길드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당연히 그렇게 해드려야죠. 그럼… 저 꼬마는 어떻게 할까요?”
‘글쎄다….’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괜스레 고개를 숙여오는 녀석, 분명히 기세 좋게 저택에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물불 안 가리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진짜 호랑이 굴에 들어와 있으니 얌전해진 것 같은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모용세가 어쩌구에 대해서 설명할 때도 흥분했을 뿐, 존댓말을 사용하며 진청과 정하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가.
어처구니없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두 눈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대륙에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고,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마치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받아들이는 느낌이었다.
‘하… 저거 그냥 풀어주면 골치 아픈데….’
그렇다고 지하감옥에 처박아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진 군사도 알고 있겠지만 녀석은 장차 대륙을 이끌어 나갈 인재 중에 하나였으니 말이다.
적당히 키워주기도 해야 했고, 물도 주고, 가지도 쳐줘야 했다.
“군사님은 어떻게 하셨으면 좋겠어요?”
“네놈이 알아서 판단해라. 다만 놈이 오늘 이후로 절대로 공화국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줬으면 좋겠군. 어차피 다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을 가능성은 제로겠지만 말이다.”
“…….”
“…….”
“처우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일단 현성 씨가 잠깐 데리고 있으실래요?”
“네? 제가 말입니까? 저는….”
“라헬로 가 보셔야죠.”
“아….”
‘그래. 너 잠깐 휴가 온 거야. 그쪽 사업은 마무리해야지.’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없어요.’
“라헬뿐만이 아니라. 돌아가서 따로 조사를 해주셨으면 해요. 기억하고 계시죠?”
‘케루빔, 쓰로누스, 도미니온스한데 맡긴 일들 있잖아. 루키페르 쪽 뒤지고 다니는 거.’
그제야 녀석이 고개를 끄덕여왔다.
“네. 일단 라헬로 돌아가야겠군요. 밀린 일들이 많이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기영 씨를 공화국에 두고 라헬로 돌아가는 것이 반갑지는 않습니다만… 일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 합류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루키페르 쪽을 조사하는 외신남매들이 가져올 정보나 진행되고 있는 작전의 상태도 신경 쓰였겠지만 아마 라헬 사업도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지금 김현성에게 있어서 라헬도시계획은 단순한 사업이 아니었으니까.
‘현성이는 일단 안심이고….’
사설 진 군사의 정신건강을 위해 정하얀도 보내고 싶기는 하지만, 아마 정하얀까지 함께 돌아가라고 한다면 내 안전 문제로 한 차례 난리가 날 것이다.
무엇보다 한소라가 이곳에서 계속해서 평화도시에 대한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 만큼 저들은 공화국에 남을 수밖에 없다.
정리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된 것만 같은 느낌. “저, 저도 도움이 될 거예요. 오드아이의 천사님… 제 지식이 분명히 도움이… 아무래도 제가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이라고 중얼거리는 성지훈의 목소리를 애써 못 들은 척한 이후에는….
“…….”
“…….”
“그럼 하얀아. 부탁할게.”
“네.”
살짝 그녀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
“…….”
확실히 대륙에서는 보기 힘든, 무복을 입고 있는 남자 하나가 시야에 비쳐왔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매화검룡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운현이라고 합니다.”
‘별호도 간지나고….’
“…….”
“…….”
예상외로 좀 생긴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