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89화
새로운 일상(44)
‘이게 도대체 뭐야… 시바… 갑자기 이게 무슨 난리야.’
어째서 겨울잠을 자던 희라 누나가 갑자기 일어난 것일까.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봤지만,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겨울잠에서 깰 만한 일이 있으니 일어난 것이다.
희라 누나가 오욕칠정을 전부 잃고 은거하듯이 붉은용병에 처박혀 있는 것은 아니기는 했지만…
‘조금… 지루해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삶의 방향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조금 침울해져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딱히 물욕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권력이나 명예, 일 그 자체에 집착하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붉은용병도 그녀를 따르는 이들을 돌보다 보니 어쩌다 탄생했을 뿐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녀는 폭군이었고, 전쟁터에서 살아야 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끊임없이 투쟁해야 하는 싸움꾼이었고, 그것 외에는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인간이었다.
‘너무 강해진 게 문제자너….’
정점을 한 번 찍은 이후에는 삶의 방향성을 잃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그나마 내가 주기적으로 붉은용병에 들러서 애첩마냥 술잔을 채워 드리며 그녀의 기운을 북돋아 줘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로 균열을 찢고 들어가 그곳에서 드잡이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한동안 조용했던 그녀가 어째서 그 무거운 몸을 일으킨 것인지를 뻔할 뻔 자.
‘초월자구나.’
그러니까 저쪽 말로는 생사경의 경지에 이른 강자가 튀어나왔고, 그녀가 그걸 감지했을 것이 분명했다. 간만에 신상품이 등장했으니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쇼핑을 나간 것이리라.
스미스 대령과 최영기가 치명상을 입었다는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조혜진이 부상을 입었다는 걸로 모든 게 설명된다.
선에 발을 걸친 그녀가 다쳤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군사님… 아니… 하얀아!!!”
벌컥 문을 열 필요도 없다. 정하얀이 대륙에 이상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테니까.
눈을 깜빡하기가 무섭게 시야가 뒤바뀐 것은 당연지사.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침침한 지하 감옥 속이었는데 지금은 린델에 있다.
주변을 둘러보기가 무섭게 굉음이 들려오는 중, 그 어떤 설명도 들은 적이 없는 한소라는 크게 당황해 “정하얀 님? 정… 정하얀 님? 네? 이게… 어… 네? 갑자기….”라고 홀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진 군사 역시 딸려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녀석 역시 자리해있다. 굳이 정하얀의 마력에 저항하지 않은 것이다.
고개를 돌리자 녀석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장소는 튜토리얼 던전이 자리한 린델의 외곽이다. 본래는 튜토리얼 던전과 린델의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지만 린델의 덩치가 꾸준히 커지다 보니 결국 이쪽 부지까지 흡수해 버린 것.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결코 이쪽 지역을 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그래도 린델의 중심부에는 꽤 멀리 떨어져 있는 터라 피해를 받지 않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기는 했지만….
‘그건 그냥 희망 사항이겠지….’
“하얀아. 린델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수도로 보내줄 수 있겠어?”
“네. 문,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그… 그런데 린델에 있는 사람들을 통째로 옮기려면… 한 20분 정도가 필요할 것… 같….”
“이 근처에 있는 사람들만 이동시키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1분이요. 생… 생명체들을 대상으로 주문을 외우는 거라 사람들 말고도 멍멍이나….”
“응. 문제없을 테니까 그렇게 해줘. 시간 날 때마다 탐지해 주고, 소라 씨는 지금 길드 통신 채널에 린델에 남아 있는 사람들 전부 대피시키라고 전해주세요.”
“네. 부길드마스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이쪽과는 다르게 진 군사의 표정은 여유롭다. 조용히 차희라와 마주 보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쳐온다.
“재미있군.”
‘뭐가 재미있어. 이 새끼야. 재미없어. 지금 하나도 재미없어.’
“정말로 놀랍구나. 허허… 정말로 놀랍다는 말 외에는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야. 아이야. 너만 해도 충분히 놀라운데, 생사경의 경지에 이른 인간이 무려 넷이라니… 젊었을 적의 내가 부끄러워져 고개를 들 수가 없구나… 그래… 그러고
보니 그전에 창을 든 계집은 현경의 경지를 밟아가고 있었지… 거기에다가 무공과는 전혀 다른 힘이라… 더욱더 이 세상이 궁금해지는구나….”
“…….”
“가장 신기한 것은 저 검은 머리를 한 아이로구나… 어찌 조금도 단련하지 않은 저 쓰레기 같은 몸에 저리 강대한 기운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허허… 마치 살아 움직이는 영약과도 같지 않은가. 참으로 군침이 도는구나… 군침이 돌아….”
‘미친놈이다. 시바 완전 미친놈이다.’
애초에 이쪽을 공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협상의 여지 따위는 없는 상황, 미친 영감탱이의 발언으로 더더욱 협상 따위는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는다.
“우리 자기가 좀 군침이 돌기는 하지. 근데 영감탱이는 그 나이에 또 뭘 그렇게 이루고 싶어서 우리 자기한테 군침을 흘릴까 몰라.”
“본래 힘을 추구하는 것에 끝이 없는 법이다. 아이야. 그래, 그러고 보니 네 눈에서 권태가 보이고 있었지. 이미 끝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욕심이 사라지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너에게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해주마.”
“…….”
“욕망을 따라가거라.”
“…….”
“…….”
“그렇지 않아도 따라가고 있어. 영감.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또 하고 싶은 게 생겼고….”
“…….”
“지금 당장 영감의 대가리를 부수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을 정도야.”
“허허….”
“자기… 그리고 세컨드랑… 뭐야… 보라 눈깔 쟤는 또 왜 왔어? 아무튼 건드리지 마. 저건 내 거니까.”
“기어이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구나… 그나마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길이었거늘….”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영감.”
흰머리와 흰 수염이 덥수룩한 영감이 조용히 팔을 올린다. 희라 누나는 목을 뚝뚝 꺾으며 천천히 영감에게 다가가는 중이다.
‘광백노사?’
굳이 상태창을 읽어볼 필요도 없다. 녀석을 낱낱이 분석하지 않아도 이미 강자라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희라 누나는 언제나 그렇듯 끼어들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위험한 순간이 온다면….
‘뭐 어쩌겠어. 미움받더라도 개입해야지.’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치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둘의 몸이 부딪친 것은 아니다. 차희라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지만 풍압의 영향을 받은 건물들이 충격을 받고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광백노사의 눈이 조금 커지는 것이 보인다. 그야 이미 그녀를 생사경에 이르는 강자라 판단하고 있었으니 강자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마력도 없이 단순한 근력만으로 이런 광경을 보여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 같았다.
“터무니없는 괴력이로구나. 허허허….”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고 말고 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딱 한 대만 맞으면 바로 황천길이자너.’
그래. 딱 한 대만 맞으면 곧바로 황천길이다. 가드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그녀는 김현성보다 강하다. 순수하게 육체적인 강함으로만 따지자면 말이다.
괜한 잡기 없이도, 쓸데없는 기술이나 검술 없이도 그녀는 강하다.
가장 완벽한 육체와 싸우는 것에 가장 적합한 몸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근력이 높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근력에 어울리는 민첩함을 갖추고 있고, 기술을 뛰어넘는 천부적인 전투감각을 가지고 있다. 차희라는 내가 본 인간 중에서 가장 완벽한 병기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렇기에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이 익숙하지가 않다.
“신기하구나. 형을 잊어버리거나 벗어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있으니. 아이야. 네가 정말 인간이 맞는지 의심이 드는구나.”
“다들 그러더라.”
‘저거…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도대체 저 영감탱이가 어떻게 이걸 빠져나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휘리릭 휘리릭 허공에 팔을 휘젓고 있을 뿐인데, 차희라의 주먹이 애먼 곳으로 휘어진다.
강함을 부드러움으로 제압한다는 개소리는 실제로도 많이 들어왔고, 많이 보기도 했지만 저런 것은 처음이다.
발을 밟는 것도 차이가 있다. 보법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 시바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마냥 발을 한 번 내디딜 때마다 잔상 같은 것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물론 영감 역시 정면으로 희라 누나와 마주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있는지 행동반경을 꽤 넓히고 있는 중이다.
린델 밖으로 좀 나가주면 안 되겠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불평불만을 터뜨릴 수가 없는 상황, 워낙 휙휙 날아다니면서 싸우고 있는 탓에 정하얀과 함께 순간이동을 몇 번이나 더 사용해야 했을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균열이 생기지 않을 것 같은 차희라의 몸에도 균열이 생기는 중.
그녀가 다치는 것을 보고 쿡쿡대고 있는 정하얀을 보고 있으니 좀 무섭게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희라 누나가 더 무섭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온몸이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심지어 얼굴은 조금 부어 있었고,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있다.
“단단하기까지 하구나. 허허허허… 내공으로 몸을 보호한 것 같지도 않을진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길이 이는 눈이 보인다. 마치 용광로를 부은 것처럼 불게 타오르고 있는 눈이 시야에 비쳐왔다.
그 눈에는 분노와 짜증이 담겨 있다. 지금의 싸움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리라.
“어이 영감.”
“…….”
“제대로 해.”
“허허허….”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다음에 영감은 죽어.”
“광오하구나.”
“농담하는 게 아니야. 오랜만에 만난 상대가 허무하게 죽는 걸 원하지 않아서 하는 소리야. 간 보지 말고 제대로 해. 장난치지 말고, 거지 같이 가르치려는 말투도 집어치우고, 제대로 하라고. 나는 영감이랑 수다나 떨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야.”
“허허… 허허허허허허… 아이야. 네가….”
“난 분명히 경고했어. 제대로 하라고.”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차희라가 튀어 나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너무나 움직임이 빨라 눈에 힘을 꽉 줘야 했을 정도, 지나치게 출력을 올렸던 것일까. 이상하게도 둘의 움직임이 느리게 느껴진다.
곧바로 몸을 움직이는 영감이 시야에 비쳐온다. 이상한 보법을 사용해 그녀의 사정거리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몇 번의 부딪침 끝에 영감의 움직임을 학습한 차희라가 곧바로 영감을 쫓아간다. 다시 한번 발을 밟아보지만 그것 역시 파악한 차희라가 손을 뻗는다.
휘릭 하는 소리와 함께 영감의 두 팔이 이상한 원을 그리더니 차희라의 팔이 꺾여 버린다. 그녀의 꺾인 팔에서 뼈가 튀어나오며 핏방울들이 튀는 것이 느릿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희라는 뻗었던 손을 거두지 않는다.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고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계속해서 손을 뻗고 있다.
“…….”
이대로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영감이 손을 모은 이후에 팔을 휘두른다.
퍼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당연지사. 마치 소리를 길게 늘어뜨린 것처럼 들려온다.
그다음 충격과 함께 그들 주변에 있는 건물들이 전부 허물어지고, 희라 누나의 아름다운 얼굴의 반쪽이 날아간다.
그냥 하는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반쪽이 뜯어진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희라는 손을 뻗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고개를 꺾어 뇌까지 대미지가 닿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저 상태로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차희라는 한 번 더 손을 뻗었고 기어코 그 손이 영감에게 닿았다.
그대로 영감의 어깨를 붙잡은 채로 함께 땅바닥을 나뒹구는 중, 직후 몸을 돌리며 뱀처럼 영감의 몸을 옭아맨 차희라가 영감의 몸 위에 올라탄다.
내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움직임, 아니, 엄청나게 익숙한 포지션이기는 했지만 영감은 처음 보는 그녀의 주짓수에 당황한 듯하다.
“…….”
“…….”
[내가 말했지. 제대로 하라고.]
“…….”
“…….”
[이럴 것 같더라니.]
“어… 잠… 잠깐….”
[그래도 즐거웠어. 영감.]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지면이 완전히 무너지고, 그 대미지를 그대로 도시가 받는다. 시바 당연하지만 파란 길드도 다르지 않다.
진 군사 이 새끼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왜 이렇게 아니꼬울까. 심지어.
“아쉽게 됐군. 이기영.”
‘이 새끼 진짜 시바 지금 상황이 상황인데 이러고 싶나?’
“정말로… 아쉽게 됐어.”
‘진짜 이 상황에 시바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나? 지금 자기 저택 부서졌다고 나한테 이러는 거 맞지?’
“네놈의 도시가 무너지는 것 말이다. 파란 길드도… 네놈이 그리 열과 성을 쏟았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버렸군. 말 그대로… 푸… 흣… 모든 것이 말이다.”
한마디 하고 싶기는 했지만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
“…….”
머리가 완전히 으깨진 채로 죽어있는 영감이 시야에 비쳐왔기 때문이었다.
“…….”
“…….”
[자기. 사제 좀 불러줘. 고기랑 술도 준비해 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