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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590화 (1,590/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590화

새로운 일상(45)

다시 한번 생각해도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혹시 이게 시바 꿈이 아닐까 내 볼을 꼬집어 봤지만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자니 이게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무너져 버린 린델의 한복판에서 고기와 술을 잔뜩 쌓아놓고 우걱우걱 씹어 넘기고 있는 희라 누나를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방금의 싸움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아직도 머리가 으깨진 영감의 시체가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해 있다.

손이 반사적으로 빈 술잔으로 향한 것을 보니 내 정신이 이상해지지는 않은 것 같긴 했지만 솔직히 최악의 상황을 면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갑작스레 린델 한복판에 초월자가 나타난 것과 다름이 없는 상황이 아니었던가. 막말로 27군단 소환 사태가 다시 한번 일어났다고밖에 볼 수가 없다.

아니, 이 경우에는 그것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었다. 벨리알 같은 경우에는 페널티를 받고 넘어온 탓에 제한적으로 힘을 휘두를 수 있었지만 녀석은 그런 페널티를 가지고 넘어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을 온전히 휘두를 수 있는 영감탱이였으니 말 그대로 갑작스레 도시 한복판에 자연재해가 떨어진 셈이었다.

“…….”

“뭐… 솔직히 나보다 더 잘 치는 것 같더라고….”

“…….”

“영감이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내가 당할 뻔했어. 마지막에 조금 더 위쪽을 맞았으면 뇌가 날아가 버릴 뻔했다니까. 솔직히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게 신기하네.”

‘아니야. 누나가 살아 있는 건 신기하지 않아.’

아직 온전하지 않은 얼굴로 사제에게 신성력을 받으며 고기를 씹어 삼키고 있는 것을 보면 차희라가 살아남아 이곳에 있는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얼굴이 재생되고 있는 와중에 어떻게 저게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인지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

심지어 재생도 더디다. 단기간에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 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 관리를 받아야 하는 대미지를 입은 것이다.

온갖 엄살을 떨어도 시원치 않을 상처를 별것 아닌 상처인 양 웃어넘기고 있는 것을 보면….

‘우… 우리 희라 누나가 최강이자너.’

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꽂히기는 했지만 그녀가 위험에 처했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말대로….

‘졌을지도 몰라… 시바….’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정하얀과 진 군사가 개입할 시간조차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약 그녀가 이 자리에서 허무하게 리타이어 했다면 더 큰 재앙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대륙의 가장 큰 전력 중에 하나를 잃어버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린델뿐만이 아니라 교국 전체가 반파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게 도대체 무슨 난리야? 자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본론만 말하자면 다른 차원에서 이쪽 튜토리얼 던전으로 넘어오는 게이트가 열린 것 같아. 누나 혹시 무협 소설이나 영화 같은 거 본 적 있어?”

“대충은 알지.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거 아니야? 손에서 장풍 나가고 그런 놈들. 아. 저 영감은 진짜로 손에서 장풍이 나가기는 하더라. 그러니까 자기 말은… 저기 저 영감탱이가 거기서 온 놈이라고?”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정확히는 그쪽 세계에서 범죄자들을 가두어 놓는 무저갱이라는 장소와 게이트가 연결된 것 같아. 아직 어떤 식으로 게이트가 작동되는지, 뭐가 원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우리가 입수한 정보는 여기까지야.”

“흐음… 다른 튜토리얼 던전에도 저 영감과 비슷한 놈들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저 영감은 저쪽 세계에서도 이레귤러야. 700년 이상 살고 있는 노괴에 별호가 광백노사인가 어쩌구인가 한다고 하더라고… 만약 다른 놈들이 튀어나온다고 해도 저 영감 정도의 임팩트는 남기기 힘들 거야. 실제로 공화국 튜토리얼 던전에 나타난 흡성마군인가 뭔가 하는 놈은 샤오 린한테 죽었으니까. 우리 쪽 대륙이랑 수준이나 레벨도 비슷하다고 봐야지. 이레귤러의 숫자도 당연히 비슷할 테고….”

“그 이레귤러가 몇 명이나 있는 걸로 추정되는데?”

“몰라. 확실하지는 않아. 최소 한 명은 더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정말로 광백노사 같은 이레귤러가 존재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어디에서인가 정보를 들었다는 거네. 우리 쪽에서 먼저 튜토리얼 던전에 남아 있는 게이트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있나?”

“지금 조사 중이야. 게이트는커녕 그 비슷한 거 흔적도 못 찾았다는 게 문제지만.”

“…….”

“…….”

‘이 누나 지금 거기 들어갈 생각 만만이자너.’

오랜만에 일어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더 몸을 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하기사 고대하고 고대하던 싸움이 다소 허무하게 막을 내렸으니 그녀 입장에서는 조금 찝찝함을 느낄 만도 했다.

하지만 이쪽의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이 다시 한번 나타나는 걸 최대한 지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대응은 어떻게 하고 있는데?”

“전 대륙에 있는 튜토리얼 던전을 통제하고 봉쇄하는 거지 뭐. 이게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지속적으로 대륙에 일어날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혹시라도 같은 일이 또 터지면 안 되니까. 그렇지 않아도 여기로 사람들 좀 불렸는데… 누나도 괜찮지?”

“나를 교보재로 삼으려고 그러는 거구나? 자기?”

“안… 안 되면….”

“아냐. 별로 상관없어. 대신 그쪽으로 갈 일 있으면 나도 무조건 끼워주는 거야. 응?”

“그… 그건 약속은 못 할 것 같기는 한데….”

“아 몰라. 몰라.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거다. 응? 아… 저기 걸어오고 있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오자너.’

회라 누나가 손으로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시야에 비쳐왔다.

“…….”

‘스즈미야 이부키.’

“이기영 님을 뵙습니다.”

‘카스가노 유노.’

“오랜만입니다.”

‘천관위.’

“언니… 이게 다 무슨 일이래요? 그, 그리고 얼굴은 또 왜 그래요?”

‘위란.’

이 자리에 차희라, 정하얀이 있으니 사실상 교국 10강 중에 여섯이 모여 있는 셈이었다. 교국 8좌에서 내가 빠지고 10강으로 개편이 된 이후에도 최다 인원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순간이지 않을까.

“그리고… 저 공화국 새끼는 왜 여기에 와 있는 거고요?”

“…….”

“군사님은 곧 돌아가실 거예요.”

“…….”

“…….”

“대충 전문으로 들으셔서 알고 계시겠지만, 다시 한번 작금의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한 것 같아 다들 호출한 거고요. 이건 지금 대륙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에요. 지금 이 현장이 언제까지 갈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교국 아니, 대륙 전체에 협력이 필요한 것처럼 보여서요.”

다 무너진 린델도 린델이지만, 천관위와 위란은 얼굴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차희라가 신경 쓰이는 것처럼 보였다.

저 괴물한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 리가 없다는 듯한 표정.

멀지 않은 곳에 도복을 입고 있는 시체가 저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조금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왜 저희만 부른 거예요? 파란 부길드마스터? 파란 길드마스터는 그렇다고 치고… 검은백조의 박연주 님도 임무 뛰러 가셨다고 쳐도 남은 두 명이 안 보이는데….”

“어차피 교국 10강 같은 건 의미가 없다는 거겠지. 바보 같군.”

“뭐? 방금 뭐라고 했어?”

“…….”

“이마에 화살 꽂히고 싶으면 더 지껄여봐. 천관위.”

“바보 같다는 말은 사과하지.”

“받… 받겠어. 근데 교국 10강이 의미 없다는 말은….”

“조금은 머리를 굴려봐라. 위란. 정말로 교국에서 제일 강한 10명의 인원을 뽑으려고 한다면, 조혜진이 들어와 있는 게 당연하지 않나. 아니 기실 그녀뿐만이 아니지. 파란에 강자는 많으니 말이다. 그나마 이곳에 있는 넷은 각 도시를 대표하는 세력을 지니고 있는 강자라는 상징성이라도 있지만… 나머지 둘은 린델에 집중 편향되어 있는 힘을 분산시키려는 용도로 뽑힌 녀석들이라는 거다.”

“…….”

“이제 막 루키에서 벗어나 아직도 자기 주제도 모르고 설치고 다니는 놈들에게 이런 상황을 설명한다고 한들 알아들을 리가 없다.”

‘예리하기는 하자너.’

슬쩍 이쪽을 바라보는 천관위가 보인다. 자기 말이 틀리느냐는 표정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정하지는 않을게요. 어차피 남은 공석은 자주 바뀌기도 하고… 교국에 있는 튜토리얼 던전을 통제하는데 필요한 인원은 여기 전부 모여 있으니까요.”

“…….”

“딱히 거창하게 회의를 진행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럴 시간도 없고, 또 그럴 상황도 아니거든요. 사실 드리고 싶은 말은 이거 하나예요. 각 도시에 튜토리얼 던전을 엄중히 관리하라고요. 아주 약간의 이상현상만 보여도 곧바로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 전하세요. 혹시나 상황이 터져도 마찬가지고요. 추가로 이건 교국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에요. 공화국, 그리고 연방이나 연합도 함께 공조하기로 결정을 내렸으니….”

“잠깐, 그 결정은 누가 내린 겁니까. 파란 부길드마스터.”

“제가요.”

‘관위 형 다소곳해지는 거 봐.’

“특히 다완… 그러니까 천관위 님과 위란 님은 기본적으로 공화국의 지원을 받거나 지원을 하는 일도 있을 거라는 걸 미리 말씀드릴게요. 갑자기 대륙이 소란스러워진 것 같기는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여러분들은 잘 헤쳐나갈 거라고 믿어요.”

“…….”

슬쩍 카스가노 유노를 바라보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비쳐온다. 아무래도 이번 일에는 그녀의 눈에도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인 것 같았다.

“그럼, 각 지역으로 돌아가도록 하죠. 어차피 워프게이트를 타고 오셨을 테니… 시간을 빼앗았다고 죄송해하지는 않을게요.”

“아니요. 오히려 오길 잘했어요. 솔직히 말로만 들었다면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니까… 뭐… 그동안 너무 평화로웠으니까요… 긴장해야겠네요. 그럼 또 봐요. 언니.”

“그래. 잘 들어가라.”

“그리고 천관위 님은 저 좀 보시죠.”

“네.”

‘그래, 까먹을 뻔했자너.’

살짝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곧바로 이쪽을 따라오는 녀석. 지금의 상황에서는 조금 뜬금없기는 했지만…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이었으니 더욱더 녀석을 몰아붙여야 했다.

“천관위 님.”

“네.”

“여자친구 있어요?”

“네… 네?”

“여자친구… 있으시냐고요.”

“아니… 아직 없습니….”

“슬슬 짝을 만드셔야죠.”

“…….”

“저는 천관위 님의 짝으로 위란 님이 참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천관위 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무슨 의도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말 그대로예요. 저는 두 분이 이어지는 걸 보고 싶네요.”

“…….”

마치 미친놈을 보는 듯한 표정이다.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슬하에 자식도 하나 두셨으면 좋겠고요. 아니,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지금… 무슨….”

“문뜩 참 잘 어울리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완을 더 끈끈하게 만들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고요. 혹시 조금 힘드시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두 분의 연애. 제가 중매 하나는 기가 막히게 서거든요.”

“그… 그건… 일단 제….”

“…….”

“일단….”

“1년 안에.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죠?”

기다란 웃음을 짓자.

홀린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놈의 모습이 눈에 비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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