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쾅-!! 콰앙-!!
그 순간 환상이 깨졌다.
콰가가강--!!!
자줏빛의 낙뢰가 사방에서 떨어졌고 규류는 그것을 피하려 여기저기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감히 인간이 위상에게 날을 세워? 네놈은 당장에라도 죽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화를 내야 할 주체를 잘못 잡은 것 같은데. 내가 너를 때렸다는 것은 화를 내야 할 게 아니라 놀라워해야 하는 일 아닌가?”
[……뭐?]
“이 힘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
[어째서 그 힘이 네게 깃들어 있는 거지? 설령 회귀를 했다 하더라도 과거의 능력이 남아 있을 리가 없는데.]
“역시…… 제아무리 위상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닌가 보지?”
남궁은 그를 향해 냉소를 지었다.
“모르지. 어쩌면 그 지옥을 살아 온 내 집념에 대한 보상일지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힘이 나의 회귀를 증명해 준다는 것이겠지.”
남궁은 말했다.
[계시자가 아니면 넌 뭐지?]
“최휘수. 네가 뽑을 계시자. 나는 놈으로부터 네 힘을 물려받았었다.”
[재미있군. 클클…… 그래. 한편으로는 기쁜걸.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시간축이 비틀렸다는 것을.]
‘변화는 느낄 수 있지만 그게 누군지는 모른다는 것인가.’
남궁은 그의 말에서 자신의 회귀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캐내기 위해 집중했다.
[솔직히 궁금했다. 네 말대로 우리들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거든.]
콰가가가가강---!!!!
콰가가강--!!
그 순간, 마치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남궁이 서 있던 주위가 금이 가며 새하얀 조각들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말이야. 그런데 소문이 자자한 666,666 마족의 목을 대가로 시간축을 비튼 회귀자가 나의 종속자였다니.]
어쩐지 목소리의 분위기가 바뀐 것 같았다.
“…….”
칠흑 같았던 어둠은 사라지고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백색 공간이 나타났다.
[너는 대화를 나눌 자격이 있겠군.]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공간은 이상하리만치 소름이 끼쳤다.
공허한 그곳에 덩그러니 놓인 옥좌 위로,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666,666 마족의 시공진이라…… 확실히 그런 게 있었지. 아마 그걸 만든 녀석은 ‘해와 달의 관망자’였을 거야.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했건만 설마 그걸 완수한 인간이 있을 줄이야.]
8명의 위상 중 한 명, 해와 달의 관망자.
별해검의 주인이자 그나마 인류에게 관대한 위상 중 하나였다.
‘하지만 우호적인 위상이란 존재마저 관망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
그것만으로도 위상들이 인간을 대하는 눈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던 위업을 달성한 회귀자가 언제 모습을 드러낼지 궁금했는데…….]
소년은 히죽거렸다.
[이렇게 제 발로 나를 찾아오다니. 감개무량하군. 하지만 안타까워. 나는 이미 계시자를 정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지옥문이 열리고 25년간의 기억. 과연 매력적인 것이지만…… 신의 결정엔 모두가 이유가 있는 법. 네가 정말로 뛰어난 자였다면 일찌감치 우리의 눈에 들어왔을 거다.]
“때로는 뛰어나지 않아서 살아남을 때도 있지.”
[나는 아둔한 자보다 뛰어난 자가 필요하다.]
소년의 체구는 작았지만 남궁을 향한 말투는 꼭 그를 어린아이 대하는 것 같았다.
[너는 반대로 위상들의 공통된 적이 될 수 있다. 그건 더 나쁜 출발선이 될 수도 있단 의미야.]
취익- 취이익-!
옥좌의 주위엔 뱀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남궁을 경계하듯 고개를 바짝 들고서 혀를 내밀었다.
[한데 내가 왜 너를 선택하리라 생각해야 하지?]
“그래야 이 판의 승자가 될 수 있으니까.”
남궁의 말대로 이 끔찍한 아포칼립스를 게임이라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이는지는 알 수 없다.
애초에 이유를 알아도 의미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그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놀이일 수도 있고, 혹은 피조물들이 고통받는 걸 즐기는 걸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건, 그 지옥 속에서 살아남으면 일말의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위상들이 플레이어고, 그들이 저마다 게임 속에서 자신을 대신할 8개의 아바타를 고른 것.’
그것이 팔무성.
하지만 플레이어와 캐릭터가 준비되었다고 게임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하나.
그것은 게임의 결과였다.
바로 승자(勝者).
남궁은 25년간 살아오며 8명의 위상들이 이 지옥문을 통해 서로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나는 내 기억을 가지고 너와 거래를 하러 온 게 아니다. 그건 그저 하나의 조건일 뿐.”
[그럼?]
“시공진의 조건을 알고 있겠지. 내가 회귀했다는 얘기는 뭘까?”
남궁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네가 선택한 자, 아니, 모든 위상이 선택한 계시자들이 나보다 빨리 죽었다는 뜻이지.”
자신감 가득한 그의 모습에 그를 바라보던 위상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결국 가장 강한 자는 재능이 뛰어난 인간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은 인간이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이것만 해도 네가 날 선택해야 할 메리트는 충분하지.”
남궁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거기에 미래까지 알고 있다.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클클…… 과연 대단한 배짱이로구나.]
“나를 선택하지 않겠다면 그걸로 좋다. 난 다른 위상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면 그만이니.”
그가 말을 이었다.
“네가 뽑을 계시자는 이미 누군지 잘 알고 있으니까. 너는 8명의 위상들 중 가장 먼저 탈락자가 되겠지.”
[내 계시자를?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냐. 내가 널 여기서 죽인다면 어쩌고?]
“그러지 못할걸.”
남궁이 그를 향해 말했다.
“네놈들은 그저 평온한 우리들의 삶을 짓밟은 지랄 맞은 새끼들일 뿐이지만…….”
“나, 남궁 님…… 조금 진정을…….”
규류가 그의 모습을 보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으로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너의 선택을 구걸하러 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네게 기회를 주러 온 것이니까.”
‘분위기가 바뀌었어?’
둘을 지켜보던 규류는 남궁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에 몸을 움츠렸다.
“나라는 가장 확실한 승리의 카드를 두고 다른 놈을 고르겠다고? 글쎄,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길 바라지.”
[나머지 위상들은?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회귀자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리고 분명 너를 의심할 텐데.]
“의심만으로는 위상들은 움직일 수 없지. 그것이 너희들의 규율이잖아.”
남궁은 대답했다.
“아무리 내가 회귀자란 의심이 들어도 위상들은 먼저 자신의 계시자에게 그것을 얘기할 수 없거니와,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인간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도 못하지.”
[클클클…… 잘 알고 있구나.]
“내가 설령 회귀자라 떠들어대도 그건 증거가 되지 못해. 그 이유는 네가 가장 잘 알겠지.”
[인간은 신과 달리 거짓말을 할 수 있으니까.]
“그래.”
씨익-
그 순간 소년이 웃었다.
[마음에 드는군.]
딱-!!
그때였다.
소년이 손가락을 튕겼다.
우우우웅---!!
쿵!!!
그러자 공간이 일그러졌고 차원문 속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여, 여긴?”
그 순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는 한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
남궁은 그의 모습을 살폈다.
헤드셋을 쓰고 있는 정리를 하지 않은 덥수룩한 머리. 며칠째 깎지 않은 듯 지저분하게 자라난 수염과 목이 늘어난 티셔츠.
손에는 무선 마우스를 쥔 채 어딘가 모르게 나사가 빠진 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남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최휘수…….’
남궁은 기가 막혔다.
어수룩하게만 보이는 이 남자가 희대의 사이코패스, 자신을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년 동안 끔찍한 실험을 자행했던 자라니…….
믿기 어려웠다.
‘변해 버린 세계가 그를 미치게 만든 걸까. 아니면 변해 버린 세계 덕에 본능이 깨어나게 된 걸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상관은 없었다.
인간이 바뀔 수 있다는 하찮은 기대감 같은 건 25년 동안 지옥 속에서 살아온 남궁에겐 존재하지 않으니까.
얼마나 많은 서로를 속고 속이려고 하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장 먼저 죽여야 할 자.
남궁에게 있어서 그게 최휘수라는 것은 변치 않은 진실이었다.
콰앙-!!
그 순간, 거대한 기둥이 내려친 것처럼 최휘수의 육신이 짜부라졌다.
“……!!!”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고 바닥에 붉은 피만이 주르륵 흥건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남궁은 그 모습에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복수…….
같은 사사로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지옥문이 열리기 전, 마물들은 절대로 사람들에게 손을 대지 못한다.’
하지만 과연 위상은 달랐다.
그는 거리낌 없이 최휘수를 죽여 버렸다.
남궁은 오랜만에 전신을 휘감는 긴장감에 고개를 들었다.
묘한 일이지만 그의 입꼬리는 오히려 씨익 하고 올라가 있었다.
[계시자를 바꾸겠다.]
촤르르륵……!!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궁의 손목에 납으로 된 팔찌 하나가 채워졌다.
[너를 따르마.]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의 팔찌.
‘됐다.’
남궁은 감회가 새로운 듯 팔찌를 꽈악 움켜잡았다.
▶ 일곱 뱀을 다루는 자가 당신을 인정합니다.
▶ 뱀의 계시자가 되었습니다.
▶ 계시자의 특권, 뱀의 보고로 이동합니다.
시야가 역전되며 남궁의 앞에 나타난 문은 모두 세 개였다. 하나는 동으로 되어 있었고, 하나는 철로 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금으로 되어 있었다.
뱀의 보고(寶庫).
위상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보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무구들은 결코 평범한 것들이 없었고 하나하나가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계시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래 봐야 지금 네가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저거 하나뿐이겠지만.]
소년은 동으로 되어 있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삼독문(三毒門). 최휘수에게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남궁은 3개의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가져가도 좋다. 너를 포함하여 앞으로 있을 8명의 계시자들은 카니발(Carnival)이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을 이끌 선구자가 돼야 하니까.]
“카니발이라…… 우리에겐 그저 지옥이 시작된 날을 너희는 축제라 말하나? 태평한 소리군.”
[너무 날을 세울 필욘 없다. 네 말대로 어차피 축제는 시작될 것이고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까. 즐기는 것이 어떠냐.]
“……즐겨?”
남궁은 입안 가득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큰 숨과 함께 분노를 토해내고는 고개를 돌렸다.
[클클, 요르(Jor)라고 불러라.]
소년은 남궁을 향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름 따위 별 상관없다만…… 앞으로 우리가 함께한다면 불러야 할 호칭은 있어야 하니까.]
그는 장난을 치듯 손짓을 하며 말했다.
[싫든 좋든 이제 한 배를 탔으니까. 안 그래?]
“요르…….”
남궁은 그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최휘수가 죽고 그의 사령술을 쓸 수 있게 된 남궁이었지만, 회귀를 할 때까지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계시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는 건…….
‘계시자로 인정받았다는 소리겠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상황에 남궁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시작이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할 뿐.’
그는 동으로 된 문을 있는 힘껏 밀었다.
▶ 삼독문 – 동(銅)에 입장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