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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5/270)

5화

쿠그그그그…….

구리 문이 열리자 그 안에는 수백 가지의 보구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게 위상의 보물 창고 중에 가장 낮은 단계라니…… 철과 금의 문을 열 수 있으면 엄청나겠군.’

남궁은 창고 안에 있는 물건들을 살폈다.

[저건 어때. 【머리 수집가의 반지】라고 한다. 사냥한 마물의 헤드의 수를 올려주지. 마물 등급에 따라 적용되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초반에 이만큼 유용한 것도 없어.]

요르는 보구들 중 해골 모양의 반지를 꺼내 남궁에게 보여줬다.

[카니발을 겪어봤으니 누구보다 잘 알겠지. 헤드를 모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말이야. 아니면 이건 어때?]

스르릉-

그는 검 한 자루를 꺼냈다.

검집에서 얼굴을 내민 검날은 마치 물결처럼 구불구불했는데, 그것이 파도를 본뜬 것인지 뱀의 꼬리를 본뜬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회귀 전에 무슨 무기를 썼지? 이건 【아르고니안의 날】이라고 하지. 검날에 독이 묻어 있어. 아주 맹독이야. 적어도 3번째 문이 열리기 전까지 널 당할 자는 없을 거다.]

“아르고니안…… 폭식의 군주뱀. 내가 알기로 너의 다섯 번째 분신이었지?”

[이야, 거기까지 알고 있나? 너…… 생각보다 정말 오래 살았구나? 하긴, 그랬으니 마족의 수급을 모았겠지. 크클, 내가 이번에야말로 패를 제대로 잡았군. 좋아, 아주 좋아.]

요르는 남궁의 대답에 어쩐지 기분이 좋은 듯 상기된 표정으로 이것저것 자신의 보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들뜬 그와 달리, 남궁은 이미 봐둔 물건이 있는 듯 다른 것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거.”

남궁이 선택한 것은 낡은 투구였다.

아니, 녹이 잔뜩 슬어서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은 고철덩이로 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게 뭐지?]

심지어 요르조차 자신의 보고 속에 있는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까먹고 있었던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아…… 이게 여기에 있었나. 너도 정말 괴상한 녀석이로군. 이걸 찾다니.]

요르는 기억이 났다는 듯 낡은 투구를 꺼내 툭툭 치며 말했다.

“이걸로 하겠다.”

[진심이야?]

“그래.”

[흠…… 뭐,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남궁이 고른 물건을 보자 요르는 어쩐지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잔뜩 상기되었던 얼굴이 실망스럽다는 듯 차갑게 시들어 버렸다.

[딱히 지금 쓸모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이거면 됐다. 다른 건 지옥문이 열리고도 구할 수 있지만 넘버링이 한 자리수인 레전더리급 보구는 오직 하나뿐이니까.”

[네가 회귀자라 하더라도 나의 계약자가 아니었다면…… 이걸 보진 못했을 것 같은데. 너 설마 그냥 넘버링만 보고 고른 거 아냐?]

남궁의 말에 요르는 어쩐지 썩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오직 하나뿐인 보구가 여기 있다는 건, 여기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이란 뜻이잖아.”

[끄응…… 네 말대로 세계관을 통틀어 딱 하나뿐인 물건이긴 하지.]

[등급의 단계를 따져도 단연 최고긴 하지. 레전더리 등급이니까. 하지만 저게 네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쿠득…… 쿠드드득…….

남궁이 손가락을 그어 나뭇가지 위에 핏방울을 떨어뜨리자 메말랐던 가지들이 순간 생기를 찾은 듯 풍성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쿠그그극……!!

부풀어 오른 둥지는 어린아이 하나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넘버링 8.

이름 : 군주 레오릭의 투구

등급 : 레전더리(최초)

▶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장 오만한 왕의 투구.

▶ 위대한 힘을 얻을 수 있으며 오만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

▶ 생자(生者)가 투구를 쓸 경우 그자의 생기를 빨아들이며, 망자(亡者)가 사용할 경우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다.

[레오릭…… 별난 놈이었지. 신을 죽이려던 왕이랬던가? 그야말로 자살 행위지. 밀랍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날아가던 이카로스같이 말이야.]

“그를 알고 있나?”

[아니, 그냥 전해 들었을 뿐이다. 무구가 남겨져 있다는 것은 내가 있는 계(界)가 아닌 다른 곳의 존재라는 것이니까.]

“너희들 말고도 위상이 또 있단 말이군.”

[물론. 차원은 넓고 신은 많지. 우리들 역시 태어나고 소멸하는 역사의 부품일 뿐이다.]

“차원? 그 말은 다른 곳에서도 이 빌어먹을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군.”

[클클…….]

요르는 옅게 웃었다.

[잘 생각해라. 넘버링이 한 자리라고 좋은 건 아니야. 이건 변덕스러운 선대의 위상이 만든 물건이니까.]

그가 남궁을 바라봤다.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만 쓸 수 있는 물건이다. 생의 세계인 인간계에선 무용지물이야. 우리들 중에 누구도 가져가지 않으려 해서 그냥 내가 여기에 놔둔 것일 뿐이지.]

“아니. 이거야만 해.”

남궁은 마치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는 듯 투구를 바라보며 낮게 대답했다.

“부탁을 받았거든.”

[흐음…….]

촤르르륵……!!

검은 투구를 꺼내자 그것은 순식간에 작아져 큐브의 형태가 되었다.

[뭐, 좋다. 하나 너 역시 생자(生者)이니 일단은 투구를 봉인해 두었다. 봉인을 풀고 투구를 쓰기라도 하면 네 생명력은 순식간에 빨려 들어갈 거다. 즉사(卽死)란 말이지. 명심해라.]

요르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쓰지도 못할 걸 왜 가지려 하는지…….]

“내가 쓸 게 아냐.”

[음? 그럼?]

“두고 보면 알 거야.”

남궁은 요람의 설명 마지막 부분을 다시 한번 읽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투구가 주인을 찾을 경우 봉인된 힘을 얻을 얻게 된다.

그는 마음을 결정한 듯 낮게 숨을 토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의 결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모험에 가까웠다.

며칠 뒤 열리는 차원문을 사람들이 지옥문이라 명명한 이유는 그만큼 현실에 펼쳐지는 광경이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기 때문이었다.

더 강한 무구.

혹은 남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도구.

이런 것들이 생존에 가장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궁은 포기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팔무성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남은 경험.

이미 그것이 그의 강함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혼자의 힘으로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는 단계에 왔을 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등을 맡길 수 있는 자였으니까.

[뭐…… 내 계시자가 되었으니 조언 하나만 하지.]

“뭔데?

[너는 다른 계시자와 다르다. 다른 놈들이야 위상의 힘을 등에 업고 메시아 놀이를 할 수 있겠지. 모두가 인류의 구원자란 헛소리를 지껄여도 적어도 너는 절대 할 수 없어.]

“어째서?”

[너는 시체를 다루는 자다. 사자(死者)의 목숨을 가지고 싸우는 자. 그런 녀석이 생자(生者)를 구원하겠다고? 네가 도구로 써대는 자들의 목숨은 가볍다는 말인가?]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천칭을 가볍게 때렸다.

양쪽에 달린 무게 접시가 위로 아래로 번갈아 가며 움직였다.

[이기적인 자가 되라. 그게 일곱 뱀의 계시자가 걸어야 할 길이야. 네가 누군가를 구원하고자 한다면 그 순간 너는 타인의 목숨을 저울질하게 될 거다.]

요르는 남궁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 간에 너는 얻게 될 것이다. 위선자라는 꼬리표를 말이다.]

“말이 많군.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남궁은 큐브가 된 투구를 품 안에 집어넣고는 고개를 돌렸다.

툭-

그때였다.

문을 나서려던 남궁의 앞에 요르가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가져가라.]

“……이게 뭐지?”

[10만 헤드. 다른 위상들도 회귀자를 찾으려 눈에 불을 켤 거다. 카니발이 시작되면 곧 네가 회귀자라는 걸 곧 알게 되겠지. 너는 나머지 계시자들의 타깃이 될 확률이 높아.]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조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규류의 보따리에서 필요한 걸 사라. 내 물건들 중 보따리에 들어 있는 게 있으면 무상으로 주겠지만…… 그런 건 없으니 필요한 대금을 빌려주마.]

야차 보따리에서 봤던 별해검처럼, 물건의 주인이 위상일 경우 그의 허락이 떨어진다면 그것을 무료로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요르의 물건은 보따리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보따리의 물건을 살 수 있는 헤드를 빌려주겠다 제안한 것이었다.

“별로 받고 싶지 않은데.”

[……어째서?!]

“위상이 주는 것엔 사소한 것이라도 대가가 필요하니까. 헤드를 빌려주는 대신에 내게 족쇄를 채울 생각이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지.”

[하여간 녹록치 않은 녀석이로군. 뭐, 그게 더 마음에 들긴 하지만. 나도 체면이 있어서 그냥 네게 헤드를 줄 생각은 없어.]

“그럼?”

[별거 아니다. 네게 의뢰를 하나 할 생각이니까. 이건 그저 내 의뢰의 선금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면 다른 위상들도 뭐라 하지 못하겠지.]

그 순간 요르는 남궁에게 양피지 하나를 건넸다.

[너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거다.]

‘이건…….’

양피지는 퀘스트를 의미했고, 그것을 봉인하고 있는 밀랍의 색깔은 등급을 나타냈다.

붉은색이었다.

그건 666,666 마족을 사냥하고 회귀했던 위업과 같은 등급.

‘전설급 퀘스트.’

남궁은 잠시 양피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25년 동안 666,666마리의 마족을 사냥하면서 겪었던 끔찍한 기억을 토대로, 절대로 이 퀘스트가 평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쉽지 않을 거다. 오히려 실패할 확률이 높지. 하지만 그 정도 난이도는 돼야 다른 위상들의 입막음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요르는 남궁의 표정을 알아차린 듯 먼저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 굳은 얼굴 뒤로 보이는 환희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 보였다.

“상관없어.”

쫘악……!!

남궁은 거침없이 양피지를 잡아 뜯었다.

“아니. 오히려 내겐 좋은 일이야. 전설급 퀘스트는 얻는 것부터 고행이 따르니까. 거저 준다면 이쪽에서 환영이지.”

그의 기억으로 전설급 퀘스트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앞으로 적어도 5년은 지난 뒤였다.

그것을 먼저 얻을 수 있다는 것.

독식(獨食)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일이었다.

[내가 계시자 하나는 기가 막히게 구했군.]

망설임 없는 그의 모습에 오히려 요르는 놀랍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 전설급 퀘스트를 획득하였습니다.

▶ 히든 퀘스트 『일곱 뱀의 화신』이 추가됐습니다.

▶ 잠들어 있는 일곱 뱀을 다루는 자를 따르는 화신이 깨어납니다. 당신의 수족으로 만드십시오.

▶ 획득한 화신의 숫자만큼 새로운 특전이 생성됩니다.

“……!!!”

그 순간 남궁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곱 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이름은 달랐지만 남궁은 단박에 퀘스트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옥문이 열리고 반년 뒤, 1번째 재앙이라 불리는 마물이 나타난다.’

계시자들을 비롯하여 각국의 강자들로 구성된 100명의 결사대가 재앙에 대적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가까스로 보스를 사냥하는 데 성공했지만 100명의 결사대 중 살아남은 자는 고작 셋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슬퍼할 새도 없이 재앙은 연이어 인류를 강타했다.

25년간 나타난 7번의 재앙.

수백, 수천의 목숨을 앗아 갔던 괴물들.

만약 7마리의 월드 보스가 퀘스트에서 말하는 뱀의 화신들이라면…….

‘그들을 내 수하로 만들 수 있게 된다.’

그 어떤 위상의 보상보다 가치 있는 퀘스트를 얻은 것이다.

꽈악-

그는 떨리는 가슴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나쁘지 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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