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일단 공간을 배제하도록 해. 보는 사람이 많으니까.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지금 내게 명령하는 건가? 내 말을 못 들었나 보군. 이제 카니발이 시작되었다고! 대리자 일족은 관객의 생사여탈권을…….]
“그래서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고?”
[……뭐?]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해봐. 뱀에게 사지가 갈가리 뜯기는 고통을 느끼고 싶다면 말이지.”
규류는 남궁의 말에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목소리 깔지 마.”
“……네.”
화아아악---!!!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사람들이 굳어졌다.
뿐만 아니라 부서진 차에서 피어오르던 불꽃마저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공간에 박제되었다.
“하하, 저도 체면이란 게 있어서…… 이해해 주십시오. 여기서 또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규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남궁에게 굽실거리며 머리를 숙였다.
대리자 일족이 위상의 전언을 알리는 전령이라면 계시자는 그야말로 위상의 화신(化神)과도 같았다.
인간을 가차 없이 죽여 버리는 규류라도 남궁에게 반항을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휴. 하필 저런 괴물이 내 관할에 있다니. 진짜 앞으로 가시밭길이겠구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아하하하, 반가워서 그렇습니다. 그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겁니까?”
남궁의 말에 규류는 굽실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일단 보따리부터.”
“계시자께서 말씀하시는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쩐 일인지 규류는 기다렸다는 듯 단박에 창을 열었다.
“목록이 바뀌었군.”
“그 전에는 계시자들을 위한 특별한 무구들이니까요. 이제 겨우 1번째 문이 열린 거잖습니까. 어차피 가격이 높아서 살 수도 없는 물건이라 난이도를 조절했지요.”
확실히 그의 말대로 야차 보따리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은 1헤드로 교환할 수 있는 음식들부터 무구들도 기껏해야 10헤드 남짓이었다.
넘버링. 없음.
이름 : 녹이 슨 단검.
등급 : 노멀(최고)
▶ 오래전 해적이 사용했던 단검.
▶ 녹이 슬어서 잘 베이지 않는다.
▶ 급한 대로 무기로 쓸 수 있긴 하다.
▶ 가격 : 3헤드
철컹-
남궁은 보따리에서 단검을 꺼내었다.
설명 그대로 누렇게 날이 변한 검은 당장에라도 부러질 것 같아 보였다.
“몇 개까지 살 수 있지?”
“원하시는 만큼이요. 등급이 없는 무구는 수량과 상관없이 살 수 있습니다. 관객들을 위해 관대한 서비스지요.”
“시끄럽고. 그럼 일단 50자루.”
“……들고 가실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이게 있잖아.”
남궁은 규류에게 허리에 차고 있던 전대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그런데 이런 잡템은 왜……?”
“거기까진 알 것 없고. 혹시 교류 거래도 할 수 있나? 나가 일족의 금고를 열고 싶은데.”
여덟 명의 위상을 모시는 여덟 개의 대리자 일족.
그중에 하나인 나가(Naga) 일족은 성녀 에이라가 따르는 위상, 미풍의 어머니의 대리자 일족이었다.
그리고 야차 보따리와 같이 나가 일족의 물품이 들어 있는 곳이 금고였다.
“교류 거래까지 아십니까? 하긴, 당연하겠지만…… 그런 걸 초반부터 쓰시면 놈들이 눈치챌 텐데요. 그…… 남궁 님의 정체를 말이지요.”
규류는 둘 밖에 없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남궁의 회귀를 들킬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상관없어. 네가 연결해 주면 되니까. 녀석들에게 이렇게 얘기해. 고블린의 박도에 다리가 잘린 사람이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걸 찾는다고.”
“으음…… 잘린 신체를 치료하려면 적어도 1천 헤드 이상은 되는 응급키트를 써야 할 텐데요. 지금 상황에서 그런 걸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죠.”
“그거 말고 일단 붙이기만 하는 거라면 늪 해파리의 점액으로도 가능하지.”
“아……!!”
남궁의 말에 오히려 규류가 이마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늪 해파리의 점액은 강력한 접착성이 있으니까요. 사람의 팔다리도 충분히 붙일 수 있을 겁니다.”
“네가 부상자에게 그걸 얘기해 줬다고 하면 놈들도 의심하지 않을 거다. 부상자는 아들, 요청자는 아버지.”
그리고 남궁은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엔 뒤집어진 차량 내부에 기절한 아들을 꺼내려 안간힘을 쓰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저 그렇게 착한 녀석 아닌데요.”
“대가는 아버지의 장기 일부.”
“아하, 히힛. 그럼 간이나 콩팥으로 해야겠군요. 제 취향은 간 쪽이지만 저희 일족은 사실 콩팥을 좀 더 좋아하는…….”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해.”
남궁은 입을 싫다는 듯 규류의 말을 잘랐다.
고작 상상만으로 놈의 입안 침이 가득 고여 있는 것을 보니 남궁은 새삼 야차의 식인성을 다시금 떠올랐다.
“좋습니다. 필요한 건 그거면 되나요?”
규류의 물음에 남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시간이 걸릴 겁니다. 교류를 위한 헤드는 100헤드입니다.”
“그럼 그동안 난 보따리를 보고 있지.”
남궁이 손을 들어 올리자 손바닥 안에 작은 동전들이 나타났다.
“클클…… 여부가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보고 계시지요. 그런데 이런 건 굳이 공간을 배제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말이죠.”
“보따리는 네 것이 아니라 네 동생 것을 볼 거거든.”
“……네?”
“제 1위계 현류(玄謬). 내 기억으론 종로 일대를 관할하고 있었지? 너보다 한 단계 높은 보따리를 풀 수 있고.”
그 순간 규류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 X발. 하고 많은 야차 일족 중에 왜 하필 그 새끼입니까?”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니면 네가 지금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건가? 뭔 발?”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남궁 님께 적대적인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서 다른 대리자 일족들보다 훨씬 더 제가 편의를 봐드리지 않습니까.”
남궁이 차갑게 되묻자 규류는 바로 꼬리를 내밀었다.
“그래서? 야차 일족은 모두 일곱 뱀의 주인을 따른다. 내가 꼭 너와만 거래를 할 필욘 없을 텐데.”
규류는 남궁의 말에 반박을 하지 못해 그저 입맛을 다셨다.
“나 참. 이래서 공간을 배제하라 하신 거구만요?”
꿀꺽- 꿀꺽- 꿀꺽-
그는 어디서 난 건지 어느새 손에 들고 있는 술병을 입안 가득 들이켰다.
“드시겠습니까?”
“됐어. 야차의 술은 냄새가 지독하거든.”
“마셔봤습니까?”
“네가 줬었다.”
“거참…… 별걸 다 했네. 하아, 전생의 나는 진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닌 건지. 야차가 인간에게 술을 주다니. 족장이 알면 목이 달아날 일인데요.”
“방금도 주려고 했잖아.”
“그냥 떠본 겁니다.”
규류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제 확실해졌네요. 제가 그런 짓까지 당신께 했다면 모를 리가 없을 테니까요. 솔직히 말하시죠. 저랑 현류의 관계도 이미 알고 있어서 일부러 녀석의 보따리를 보겠다고 한 거죠?”
그의 말에 남궁은 피식 웃었다.
“맞아.”
“하여간 지독한 사람이라니까. 제가 뭐 좋으라고 놈에게 순순히 남궁 님을 보내겠습니까?”
야차 일족 제 1위계 현류.
그는 조금 전 말대로 규류의 동생이었다.
‘그리고 라이벌이기도 하지.’
위계의 순위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규류는 꽤 높은 위치이지만, 결국 동생인 현류에게 뒤처져 있다.
‘대리자 일족은 저마다 각각 맡은 영역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관할하는 영역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는 생존자가 있을 시 특별한 보상을 받게 된다.
‘아마도 그건 족장의 자리일 가능성이 높겠지.’
그것이 바로 규류가 남궁이 현류에게 가는 것을 원치 않는 이유이자 동시에 그의 약점이었다.
계시자는 가장 강력한 후보였다.
그런 자를 아무렇지 않게 라이벌에게 알리는 것은 그야말로 제 무덤을 파는 일일 테니 말이다.
“현류 놈의 이름을 들으면 제가 눈이 뒤집힐 걸 알고 도발을 하셨지요? 놈과 거래를 트려는 목적이 아니라 제가 더 목매게 하려는 술수인 거 다 압니다.”
규류는 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웬만한 것이라면 제가 구해다 드리죠. 기껏해야 한 단계 높은 보따리입니다. 별로 대단한 것도 없어요.”
“대단한 것이 없다 해도 네 보따리보다는 종류가 많으니까. 현재 야차들 중에 가장 높은 1위계잖아.”
그는 입술을 씰룩이며 남궁에게 말했다.
“에씨. 까짓거 족장님의 보따리를 털어서라도 원하시는 게 있으면 가져가 드릴 테니 말씀만 하십시오. 대신 현류 놈은 얼굴도 보지 마십쇼!!”
쿵-!!
규류는 결심을 했다는 듯 술병을 있는 힘껏 바닥에 내려치며 소리쳤다.
“그럼 족장의 보따리에 있는 스킬북을 줘.”
“……어떤 거요?”
“무색기검(無色氣劍).”
쿨럭-
규류는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뱉었다.
“아니면 야차술을 쓸 수 있는 귀면피(鬼面皮)도 괜찮겠지. 순간 신체능력을 증가시키는 것이었지? 다음 지옥문에서 꽤나 유용할 텐데.”
“그, 그것들은 다 유니크템이잖습니까. 전부 족장님의 보물이라고요. 그런 걸 가져왔다가는 제 모가지가 날아갈 텐데요.”
하나하나 뱉어내는 물건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규류는 남궁이 일족의 보구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헤드도 부족해서 살 수 없어.”
“아오, 놀리시는 겁니까!”
화를 냈지만 그의 대답에 규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이제 겨우 1번째 지옥문이 열렸을 뿐이니까. 나도 족장의 보따리까지 네게 열어달라는 말은 안 해. 대신 그건 네가 족장의 자리에 앉았을 때 보여주든지.”
“……네? 제가 족장의 자리를요?”
순간 규류가 히죽 웃었다.
“헤에, 그 말씀은 저를 족장의 자리에 오르게 해주시겠다는 뜻이죠?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요. 다른 녀석들이 쓸데없는 제안을 해도 제게 다 말씀하십죠. 제가 녀석들보다 더 좋은 조건을 드릴 테니!”
그는 기다렸다는 듯 가슴을 주먹으로 퉁퉁 두들기며 말했다.
“그러니 열어봐.”
“……무엇을요?”
“야차의 심장 주머니. 오직 단 한 명. 야차의 계약자에게만 보일 수 있는 주머니 말이야.”
“자, 잠깐!! 그건……!! 말 그대로 제 심장을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요. 남궁 님이 죽기라도 하면 저도 같이 죽는다고요.”
“내가 죽을 것 같아?”
남궁은 규류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난 안 죽어. 절대로.”
꿀꺽-
규류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강요하진 않겠다. 하지만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때론 도박을 해야 하는 법이지.”
“하, 하하…… 족장의 자리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 이상.”
“……네?”
“너는 고작 일족의 수장으로 만족할 건가?”
“그게 무슨…….”
“너희 야차를 포함해서 거인족, 나가족, 요정족 등등 나머지 대리자 일족들 역시 일족의 수장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이고 있지.”
규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족 내의 경합이 끝나면? 그다음은?”
오싹-
그 순간 규류는 남궁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가 널 이형(異形)들의 왕이 되게 해주겠다.”
그의 몸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