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넘버링 183
이름 : 위대한 발란사의 서(書)
등급 : 레어(최고)
▶ 현자에 오른 발란사가 유년 시절 집필한 소환서의 수정본.
▶ 1개의 재료를 넣으면 동일 계통의 상위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 아이템의 등급은 매직~에픽까지.
▶ 소환의 결과물은 재료의 등급보다 1단계 상위의 것이 나온다.
▶ 소환 후 소환서는 소각된다.
“와…….”
명훈은 반짝거리는 소환서를 신기한 듯 바라봤다.
“재료를 넣으면 상위 아이템이 나온다니…… 완전 대박인데요?”
“형님, 어서 해보세요!”
오히려 남궁의 소환서를 보고는 명훈과 경인이 들떠 흥분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뭘 넣으면 좋을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
“가장 좋은 거라면…….”
남궁은 쥐고 있던 참수검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네 덕분이야. 운이 따르는 걸.”
“하하!! 그러네요.”
명훈은 검을 보고는 자신의 일인 양 기뻐했다.
그가 보고에서 무기를 가지고 온 덕에, 남궁 역시 마음 편하게 소환서를 발동시킬 수 있었다.
“그럼…….”
남궁은 황금빛 소환서 위에 참수검을 가져갔다.
촤르르륵---!!
그러자 소환서의 페이지가 바람에 휘날리는 것처럼 빠르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위대한 발란사의 서(書)가 재료를 먹어치웁니다.
▶ 재료의 등급 확인 → 레어
▶ 현자의 은총이 발동됩니다.
남궁은 긴장되는 얼굴로 소환서를 바라봤다.
꽈악-
그 순간, 소민이 그의 한쪽 손을 두 손으로 감싸며 잡았다. 딸의 온기에 남궁은 조금 마음을 내려놓으며 옅게 웃었다.
화르르륵……!!
조금 전과 달리 소환서가 이번엔 붉은 불꽃을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남궁은 불꽃 속에서 뭔가를 움켜잡았다. 그러자 마치 불꽃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와…….”
경인은 그 모습에 경탄한 듯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건…….”
마치 그를 위해서 맞춤 제작을 한 것처럼 손에 착 감기는 손잡이의 감촉에 남궁은 천천히 화염 속에 달궈진 그것을 꺼냈다.
검(劍)이었다.
치이이이익……!!
붉게 달아올랐던 검신이 화염 속에서 빠져나오자, 차가운 공기에 닿으며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무겁군.”
남궁은 손에 느껴지는 제법 묵직한 느낌의 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칠흑과도 같은 묵빛의 검신이 마치 흑요석처럼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넘버링 없음.
이름 : 참회자 타니안의 검
등급 : 에픽(최고)
▶ 사형집행인 타니안이 자신의 삶을 참회하며 자신의 검을 녹여 새로이 만든 검.
▶ 원한은 소멸되었으나 검날에 핏물이 더욱 진하게 스며들어 굳었다.
▶ 검날에 핏물이 닿으면 특수한 힘을 발휘한다.
“이거…… 뭔가 엄청난데요?”
검을 쓰는 명훈의 눈에 보기에도 남궁의 검은 확실히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참수검이 이런 식으로 승급이 되는 줄을 몰랐는데…… 아니지. 참수검의 등급은 레어가 최고였으니까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 소환서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아이템이 만들어진 걸까.’
무엇이 되었든 간에 현 시점에서 에픽 무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위상의 도움을 받는 팔무성이라도 기껏해야 레어템이 최고일 테니 말이다.
“검날에 핏물이 닿으면 특수한 힘을 발휘한다라…….”
남궁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자신의 손등을 검으로 가볍게 그었다.
촤악-!
우우우웅……!!
날카로운 검날이 매끄럽게 손등을 베었고 그의 핏물이 닿는 순간 묵빛의 검날이 서서히 자줏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 검이 사령자의 피를 삼킵니다.
▶ 검날에 혼기(魂氣)가 서립니다.
▶ 일정 확률로 사냥한 마물의 사령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자줏빛의 날카로운 오러가 검을 감싸자 검은 날카로운 예기를 띠었다.
부웅-
남궁이 검을 가볍게 허공에 긋자 파공음(破空音)만으로도 사람들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써볼래?”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명훈에게 남궁이 검을 건넸다.
파직……!!
그 순간 마치 검이 그를 거부하듯 찌릿한 통증이 손에 느껴졌다.
창그랑-!!!
명훈의 손에서 떨어져 검이 바닥에 튕겼다.
“하하, 이거…… 아무래도 형님만 쓰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릿한 기분에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자아를 가진 검까지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에픽 등급이다 보니 주인을 정하는 모양이군.”
“다행입니다. 형님께서 사령술을 쓰시긴 하지만 제대로 된 무기가 없어서 걱정했는데.”
“나 때문에 무기를 고른 거구나.”
“에이, 아닙니다. 참수검이 정말 제가 다루기엔 좀 무겁기도 하고요. 손목 나가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래.”
명훈의 대답에 남궁은 옅게 웃었다.
* * *
“아빠…… 우리 집이…….”
던전에서 돌아 온 그들은 남궁의 집으로 갔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하는 건 와르르 무너진 잔해뿐이었다.
“괜찮아.”
당장에라도 달려가려는 소민을 붙잡으며 남궁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힝…… 하지만…….”
“네가 무사하니까. 그럼 된 거지.”
울먹이는 딸의 어깨를 다독이며 그는 다시 한번 말했다. 그저 단순한 위로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남궁에게 있어서 그 말은 그 무엇보다 진심이었다.
1번째 지옥문이 열렸던 전생에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봐야 했던 건 저 무너진 잔해에 깔려 있던 가녀린 손이었으니까.
‘미래는 바뀌었다.’
딸이 지금 자신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명훈과 경인도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이리로.”
남궁은 무너진 집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작은 지하실의 문이 있었다.
끼이이익-
철문은 오랫동안 쓰지 않은 듯 낡았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은 손질이 된 듯 깨끗했다.
“와…… 이런 곳은 언제 준비하셨어요?”
지하실로 내려가자 그 안에서 깨끗하게 정돈된 공간이 나왔다.
촤르륵-
남궁은 품 안에서 작은 수정을 꺼냈다.
수정의 위아래를 비틀자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수정 안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고블린 동굴 Lv1을 지으시겠습니까?
알림과 함께 그의 시야의 위치가 바뀌면서 마치 도면을 보는 것처럼 지하실의 모습이 나타났다.
우우우웅…….
남궁은 지하실 한가운데 수정을 밀어 넣었다.
▶ 고블린 동굴 Lv1의 핵이 작동합니다.
쿠그그그그…….
가벼운 떨림과 함께 지하실의 외벽이 순식간에 흙벽으로 변했고, 벽면을 지지하는 조잡한 목책들이 생겨났다.
“이건…….”
천장에 달려 있던 형광등이 사라지고 낡은 촛대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공동(空洞)의 형태가 되자,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고블린 동굴이 완성되었습니다.
▶ 승급 시 동굴의 확장이 가능합니다.
“동굴을 확장시키는 것도 일이겠군.”
알림이 사라지자 남궁은 전대 안에 있던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놓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도시가 유지되고 있으니 당장 쓰지는 않을 거야.”
그가 통조림부터 각종 보존 음식들을 꺼내 한편에 쌓아 놓자 경인은 놀란 듯 그를 바라봤다.
“얼마나 오랫동안 지옥문의 마물을 상대로 도시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래도 아직 군이 움직이지 않았고…… 알렉의 기자회견을 보면 형님처럼 특별한 힘을 가진 자들이 더 있지 않습니까?”
명훈은 불안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다 같이 힘을 모으면…….”
“그래도 막을 순 없다. 결국 문명은 파괴될 거야. 이것들은 그때를 대비한 것이고.”
꿀꺽-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그의 대답에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현대의 화기로 막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기껏해야 3번째 지옥문의 마물까지겠지. 군대는 곧 무력화될 거고,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해.”
“3번째라니…… 그게 얼마나 남은 건가요?”
“글쎄. 그건 나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생각보다 빨리 찾아올지도.”
경인의 물음에 남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생의 기억대로라면 3번째 지옥문이 열리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1번째 문이 빨리 닫혔기 때문에 그 뒤의 문들이 얼마나 언제 열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저희는 뭘 하면 될까요?”
“기억 주입 때문에 너희도 아마 알고 있을 거다.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물건을 살 수 있는 헤드이며 그건 마물을 사냥했을 때 나오지.”
“네. 지옥문이 열렸을 때 마물들이 나오잖아요.”
“형님께서 월드 보스를 잡고 문을 닫으셨으니 더 이상 마물이 나오지 않겠죠.”
“음…… 그렇게 생각하면 문을 꼭 빨리 닫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닌 건가요? 마물을 잡아서 헤드를 모아야 되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냐. 문에서 쏟아지는 마물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속출하는데.”
“그야 그렇지만…….”
명훈의 말에 경인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틀린 말은 아냐. 헤드를 얻기 위해선 마물을 잡아야 하니까. 하지만 문을 열어 둔다고 헤드를 계속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헤드를 주는 마물의 수는 정해져 있다. 그 이후에 나오는 마물들은 사냥해 봤자 헤드를 주지 않아. 만약 정해진 수가 끝났는데 문을 닫지 못한다면?”
“마물은 계속 나올 테고…….”
“소득도 없이 피해와 희생자만 자꾸 늘어나게 되겠군요.”
“그렇지.”
“어떻게 그런…….”
경인과 소민은 남궁의 말에 창백한 얼굴이 되어 서로를 바라봤다.
“이건 주입된 기억에도 없는 내용이니까. 하지만 틀리지 않을 거다.”
“살기 위해선 문을 닫아야 하는데 헤드를 얻기 위해선 문을 열어 둬야 하는 건가요?”
“이래저래 죽으라는 것 같은데…….”
“젠장……!! 도대체 왜……!!”
남궁은 신경질을 내는 명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하지만 이건 놈들에겐 그저 게임에 불과하다.”
그는 주위를 훑었다.
“빌어먹을 세상이라도 이게 게임이라면 룰이 있다. 헤드를 주는 마물의 수가 정해져 있다는 것은 무조건 그만큼의 마물은 꼭 죽어야 한다는 것이지.”
그러고는 말을 이어갔다.
“달이 지고 여명이 밝아오면 남은 마물들이 동시에 소환될 거다.”
“아빠…… 그럼 문을 닫아도 마물이 나온다는 거야? 진짜…… 어떻게든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아.”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던 소민은 차오르는 분노에 그만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래. 하지만 문이 열려 있는 것 보단 나아. 아니, 오히려 우리에겐 고마운 일이지.”
“……응?”
“정확히 헤드를 주는 마물만 소환되거든.”
남궁은 일행에게 따라오라는 의미로 손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그러니 이건 무의미한 싸움이 아니야. 누군가에겐 절망의 순간일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겐 그것이 희망의 기회일 수도 있지.”
그는 걸음을 옮겼다.
“우리에게 그 기회가 온 거야.”
꽈악-
남궁의 손을 잡은 소민이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다가올 희망을 절대로 놓치지 마라.”
명훈과 경인이 그의 뒤를 따랐다.
“모조리 쓸어 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