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거리가 조용하네요.”
명훈의 말에 남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상시라면 한강 길을 따라 운동을 하러 가는 사람들로 새벽에도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어제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거리는 마치 유령도시처럼 조용했다.
“우리에겐 잘된 일이지. 오히려 사람들이 있었으면 위험했을 거야.”
“하긴…… 그렇겠네요.”
“준비하자.”
구름 사이로 서서히 태양이 얼굴을 비추는 시점이 되자 남궁의 말에 세 사람은 각자 자리에 섰다.
▶ 어스름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 1번째 카니발의 특별한 막이 열렸습니다.
▶ 남은 고블린들이 모두 소환됩니다.
솨아아아악……!! 펑!!
그 순간 마치 축포라도 터뜨리는 듯 하늘에서 새하얀 불꽃들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앞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온다.”
남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의 앞에 마치 게임 속 몬스터가 리스폰 되는 것처럼 고블린의 모습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꿀꺽-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하는 마물의 모습에 소민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슈욱-!! 퍽!!!!
그때였다.
팽팽한 긴장감을 뚫고 화살이 날아와 고블린의 머리에 박혔다.
예상보다 강력한 화살은 마물을 관통하고 바닥에 박힌 채로 힘을 이기지 못한 듯 부르르 떨렸다.
“자고로 새로 얻은 아이템은 써봐야죠.”
“그럼. 그럼!! 당연하지!”
명훈이 검을 휘둘렀다.
이름처럼 검날에 새하얀 오러가 서렸고 검이 고블린을 베는 순간 주위로 차가운 얼음가루들이 흩어졌다.
“얼마든지 와봐라. 이 괴물 놈들아!!”
명훈의 목소리는 묘한 고양감을 일으켰다. 어쩌면 그것 역시 그의 자질 중 하나일지 모른다.
“그래. 우린 약하지 않다.”
그의 외침에 조금은 일행의 마음이 가벼워진 듯 각자의 무기를 꽉 움켜잡았다.
“아빠. 근데 난 무기가 없는데…….”
세 사람과 달리 빈손인 소민은 여전히 불안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민아. 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응?”
경인은 불안해하는 그녀를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무기가 없어도 나보다 더 강할걸?”
그의 말에 소민은 여전히 긴장된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뒤에 있어.”
남궁이 그와 동시에 참회자의 검을 들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스앙……! 서걱!!
소환된 고블린 무리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서도, 그는 놈들의 공격을 피하며 하나둘 마물들을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물 흐르듯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러운 그의 몸동작에 나머지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 고블린의 사령을 흡수합니다.
▶ 영혼 흡수 Lv2를 사용하였습니다.
▶ 고블린의 특성 : 민첩이 증가합니다.
참회자의 검에 베인 고블린 중 이따금 시체에서 검은 영혼이 흘러 남궁의 몸에 스며들었다.
남궁은 미약하지만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괜찮군.’
그는 새로 얻은 무구가 썩 마음에 드는 듯 고블린들을 베어 넘기며 생각했다.
[캬아아악!!]
그 순간 그의 뒤에서 고블린 두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쾅-!! 콰강--!!
하지만 놈들의 박도가 그에게 닿기 전에 붉은 낙뢰가 정확히 내리꽂혔다.
츠즈즈…….
순식간에 시커멓게 타버린 고블린들의 시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안 그래도 돼. 소민아. 헤드는 아빠가 충분히 모을 거니까.”
“아니. 나도 싸울 거야.”
남궁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래. 소민이의 말이 맞아. 언제까지 내가 지켜줄 순 없다.’
어떤 상황이 있을지 모르는 세계에서 딸의 자질을 깨달은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은 이제 보호가 아니라 그녀를 성장시키는 것.
‘다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군.’
그는 바닥에 너부러진 마물의 시체들을 바라보며 쯧- 하고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로서의 이성과 감성이 서로 뒤엉켜 그의 심경은 복잡하게 마음을 어지럽혔다.
“조심해야 한다.”
고개를 끄덕이는 소민을 보며 남궁은 남은 마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콰앙---!!
그때였다.
여기저기에서 굉음을 동반한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으악!!! 괴, 괴물이다!!”
“살려줘!!!”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 마물들에 도망쳐 나온 듯 조용했던 거리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갑자기 왜 사람들이…….”
“아무래도 건물 안에도 마물들이 소환되는 모양이야.”
“이런…… 문을 닫지 않으면 마물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명훈은 도망치는 사람들의 뒤를 쫓는 고블린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문을 닫으면 남은 마물이 한꺼번에 소환되고. 진짜 이거야말로 무엇을 선택해도 끔찍하네요.”
“그렇다고 문을 열어둔 채 헤드 카운트가 되는 마물만 죽인 뒤 문을 닫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 최악보다는 차악을 택한 것이지.”
남궁은 소란스러워진 거리를 보며 명훈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도 모든 사람들이 다 거리로 나온 건 아니야. 적어도 저들은 안전한 지대에 있는 거지.”
아파트 안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확실히 처음 지옥문이 열렸을 때 현충원의 분위기와 비교하면 혼란스러워도 차분함이 있었다.
“모른 채로 당하는 것과 학습한 뒤에 당하는 건 다르니까.”
탕-!! 타당--!!
그리고 들려오는 총소리.
거리를 순찰하고 있던 경찰들이 차에서 내려 고블린을 향해 총을 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역 안으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파출소에서 출동한 경찰의 수는 많지 않아 이쪽으로 올 수 있던 사람은 기껏해야 두 명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등장에 우왕좌왕 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한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명훈아.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초등학교가 있다. 소민이가 알거야. 너는 애들을 데리고 그쪽으로 가. 나는 반대쪽에 있는 공원으로 갈 테니.”
“알겠습니다.”
남궁은 야차 보따리를 열었다.
불투명한 창이 나타났고 익숙한 듯 그는 빠르게 창을 스크롤했다.
넘버링 없음.
이름 : 숲 돼지의 배변
등급 : 노멀(최고)
▶ 노르산 숲에 사는 숲돼지의 배변. 특이하게 달콤한 냄새가 나며 하급 마물들이 좋아한다.
가격 : 100헤드
그는 그것을 두 개 구입하자 그의 손 위로 작은 병이 떨어졌다.
“이거.”
하나를 명훈에게 건넸다.
“네가 고블린들을 유인해라.”
이름만 보고는 병을 받아 든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뚜껑을 연 순간 진한 크림과 같은 달콤한 향기가 순식간에 일대에 퍼졌다.
[크륵?]
[크르륵……!!!]
삽시간에 향기는 퍼졌고 남아 있던 고블린들이 마치 뭐에 홀린 것처럼 그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모두 뛰어!!”
남궁은 망설임 없이 병에 들어 있는 배변을 자신의 옷 위에 뿌리고는 소리쳤다.
전신에서 강렬한 배변 냄새가 풍겼고 그가 사라진 골목 모퉁이를 따라 순식간에 고블린들이 모여들었다.
“……우리도 가자.”
한순간에 수십 마리의 고블린들이 사라지자 명훈은 병을 자신의 몸에 뿌리고는 경인과 소민을 향해 말했다.
* * *
‘이쯤이면 되겠군.’
남궁은 공원을 가로지르며 주위를 살폈다.
규모가 제법 큰 덕에 길 주변엔 꽤 울창한 나무들이 자라 있었다.
그는 며칠 전 미리 봐둔 장소에 도착하자 걸음을 멈추었다.
공원 안에 있는 놀이터였다.
다행히 피해는 없는 듯 미끄럼틀을 비롯한 놀이 시설들이 그대로 있었다.
“좋아.”
주위를 둘러싼 나무와 가운데 있는 놀이 기구들 덕분에 충분히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싸울 수 있겠군.”
부웅-
그가 검을 허공에 그었다.
솨아아악……!!
그러자 그의 등 뒤로 3명의 영혼 병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고블린을 갈랐다.
[캭! 캬캭!!!]
[캬아악!!!]
갑자기 나타난 병사들에 고블린들은 당황한 듯 소리쳤다.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뛰어난 능력이야. 이 정도면 2번째 지옥문까지는 따로 강화를 시키지 않아도 충분하겠는걸.’
남궁은 고블린들을 베어 넘기는 영혼 병사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히려 문제는 나로군.’
사령술의 레벨이 올라야 부릴 수 있는 병사의 수가 증가하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령술을 올리기 위해서는 많은 사령을 먹어 치워야 한다.
‘가장 등급이 낮은 건 마물의 영혼. 그다음은 보따리에서 살 수 있는 영혼석. 그리고 가장 강력한 효과를 주는 건…….’
인간의 영혼이었다.
전생의 사령술사였던 최휘수가 어째서 인간을 가지고 갖은 실험을 했는가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마물을 사냥해서 얻을 수 있는 영혼으로는 사령술을 올리기 부족 한 게 사실이긴 하지…….’
그때였다.
고블린을 베는 영혼 병사의 검은 연기가 어쩐지 조금 흐릿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남궁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길 바라는 것일 테니까.’
영혼 병사들과 대화를 나눌 정도의 소통은 할 수는 없지만, 사령술의 영향으로 그들의 감정을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푸욱-!!
마지막 고블린의 등을 뚫고 남궁의 검이 튀어나왔다.
“후우…….”
그는 그제야 가쁜 숨을 토해냈다.
공원으로 몰려온 고블린의 수는 족히 50여 마리는 된 듯싶었다.
마지막 마물의 시체 위에 걸터앉았을 땐, 놀이터 바닥에 핏물이 흥건했다.
“100헤드를 쓰고 50마리를 잡다니…… 썩 효율 좋은 싸움은 아니었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단순히 헤드로만 비교할 일은 아니었다.
지옥문이 열렸을 때완 달리 지금은 한정된 마물만이 소환된 상황이었으니 한 마리라도 더 많이 잡는 게 중요했다.
‘그래도 검 덕분에 고블린의 영혼을 두 번이나 더 흡수할 수 있었고…….’
그는 바닥에 떨어진 룬석을 주웠다.
파슥-
룬을 쥔 손에 힘을 주자 녹색의 빛이 천천히 그에게 스며들었다.
▶ 최하급 룬 : 기민함을 사용하였습니다.
▶ 당신의 신경이 조금 더 예민해집니다.
남궁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룬의 힘을 몸 안에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바스락…….
그 순간 그의 피부에 닿는 바람의 결이 조금 달라지는 것 같은 이질감을 느꼈다.
‘운이 좋았어. 기민함의 룬은 얻기 어려운데. 최하급 룬인데도 확실히 효과가 좋아.’
눈을 뜨자 그는 받아들이는 정보들이 지금까지와는 달라졌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해서 룬을 흡수하는 것도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너무 과한 감각은 때로는 뇌뿐만 아니라 전신에 과부화를 걸리게 하니까.’
뭐든지 적당함이 중요했지만 사람의 욕심은 언제나 그 중심을 흔들리게 만들기 일쑤였다.
“흐음.”
한 차례 사냥에서 이 정도의 결과라면 꽤 만족스러운 일이다.
남궁은 다음 사냥을 위해 장소를 바꾸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음?”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좀…… 도와주세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궁은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여성을 보며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평상시야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러 온 사람들로 공원이 붐볐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으니까.
“살려주세요…….”
남궁은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옷은 엉망이 된 상태였지만 강압적으로 누군가에게 당한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왜 여기 있습니까? 밖에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방송을 하던데.”
“집에 가는 길이었어요. 택시도 안 잡히고 방법이 없어서 하루 종일 걸어오느라…….”
그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구멍 난 스타킹 안쪽으로 보이는 발은 물집이 다 잡혀 피투성이었다.
“그러다가 고블린들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도망치다가 발목을 삐끗한 것 같아요.”
“집이 어딥니까?”
“바로 저기 앞이에요. 대한 아파트요.”
공원 뒤쪽에 있는 아파트를 가리키며 그녀가 남궁을 바라봤다.
“죄송하지만 부축을 좀…….”
그러고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평상시였다면 쓰러진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기민함의 룬 효과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지옥 속을 살아 온 감각 때문일까.
“당신.”
남궁은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답잖은 거짓말을 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