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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27/270)

27화

평상시 주말의 여의도였다면 어린아이들도 가득했을 테지만 63 스퀘어는 조용했다.

“…….”

마물의 습격 이후 아쿠아리움에 있는 생물들을 관리하기 위한 관리자들을 제외하고 운영하지 않는 텅 빈 건물이었기에, 고층에 위치한 전망대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이 정도 위치라면 계시자라 하더라도 도망치지는 못하겠군.”

알렉은 도심 아래를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제법 머리를 굴렸군.

-이런 빌딩의 장소를 지정했다는 것은 아마 이쪽 정부에서 우리의 소식을 알고 있다고 봐야 할 거야.

-어쩌면 도청을 감시할 수도 있어.

-시간이 되면 연결을 끊어야겠어. 알렉, 우리는 지정된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을게.

인이어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한슨과 요한나의 말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 트라만 씨?”

그때였다.

입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강호준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영상에서 본 것보다 훨씬 체구가 좋으시군요. 갑자기 장소와 시간을 변경 요청을 드렸는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알렉이 손을 내밀자 강호준은 그를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의 행동에 알렉은 뻗은 손이 무안한 듯 주먹을 쥐며 고개를 돌렸다.

‘뭐지? 설마 내 능력을 아는 건 아니겠지.’

태양목과 함께 그가 가진 또 하나의 능력인 월안(月眼)은 손을 잡은 상대의 능력을 꿰뚫는 스킬이었다.

그는 이 능력으로 한슨과 요한나를 찾아내었다.

“…….”

알렉은 잠시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는 강호준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한국에 오고는 솔직히 놀랐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방위력이 뛰어난 미국이나 저와 같은 계시자가 있는 영국 등보다도 훨씬 더 적은 피해로 한국은 마물들을 막았더군요.”

“과찬이십니다. 발 빠르게 군과 경찰이 움직였고 시민들의 협조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한국의 방위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광화문에서 마물들을 사냥한 당신들의 실력을 칭찬하는 것일 뿐입니다.”

알렉은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저보다는 이분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제가 쓰는 무기 역시 이분께서 제공하신 것이니까요.”

호준이 고갯짓을 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명훈이 들어오자 알렉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알렉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명훈 역시 그의 악수를 피하자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내 능력을 아는 모양이로군.’

같은 계시자라 하더라도 아직까지 어떤 위상에게 선택을 받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월안을 쓰는 건 포기해야겠군.’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계시자로 선택을 받은 만큼 결코 쉽게 볼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렉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명훈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전역했지만 강 대위와는 같은 부대에 있었습니다.”

“군인이셨군요. 어쩐지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으시더니…… 저 같은 일개 배우와는 과연 다르군요.”

“아닙니다. 오히려 유명 배우인 알렉 씨께서 계시자의 존재를 방송에 말하지 않았다면 계시자들의 존재는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 말은…… 당신 역시 계시자라는 뜻인지요.”

알렉의 물음에 명훈은 그저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직은 모든 것을 오픈 할 수는 없지요. 아군인지 적군인지 파악이 되지 않은 상황이니까요.”

“하하, 맞습니다. 의심은 리더에게 있어 중요한 덕목이니까요.”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니, 당연히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가톨릭성모병원, 그리고 노량진역. 이곳이 워낙 고층이라 포착하기 어려운데 그 와중에 최선의 위치를 잡으셨더군요.”

“…….”

명훈의 말에 알렉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말한 두 곳은 다름 아닌 한슨과 요한나가 대기하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굳이 자리를 옮길 필요는 없습니다. 어디로 옮길지도 알고 있으니까요.”

‘알고 있다? 설마 예지 능력을 가졌다는 건가?’

알렉은 그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유추하며 눈을 흘겼다.

“세계는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계시자라면 알 겁니다. 지옥문이 계속해서 열릴 거라는 걸 말이죠.”

명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합니다. 국가의 경계는 곧 허물어질 겁니다. 예지 능력을 가졌다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전투기와 함선 그리고 전차까지…… 현대 화기로 막을 수 있는 단계는 곧 끝납니다.”

알렉은 배우답게 목소리에 힘을 주며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우리가 인류를 이끌어야 합니다. 오직 계시자만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저는 국가를 뛰어넘는 연합을 만들 생각입니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진심이로군.’

누군가는 그저 망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지만 그를 실행할 만한 힘이 있다면 상황이 달랐다.

“글쎄. 내 눈에 당신은 인류를 구원하기보다는 그냥 영웅 놀이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하하,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 말입니다. 국가를 초월한 연합. 말은 그럴싸하지만 결국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망이 짙게 깔린 것 아닙니까.”

“그게 보이십니까?”

“보인다면?”

“역시…….”

오싹-

그 순간 명훈은 전신에 닭살이 돋는 기분이었다.

“형님!! 피하십쇼!!!”

호준이 외침과 동시에 그의 등을 잡아당겼다.

파앗-!!!!

날카로운 검풍이 정적 속에서 느껴졌고, 순간 명훈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상처가 생겼다

주르륵……!!

“큭?!”

붉은 핏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고 명훈은 다급히 상처를 움켜잡았다.

“이래서 예지 능력은 귀찮다니까.”

“너…….”

“계시자 중에 미래를 볼 수 있는 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게 한국에 있을 줄이야. 솔직히 조금은 바랐는데…… 나머지 7명 중에 부디 예지 능력만 아니기만을 말이야.”

알렉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능력은 내게 있어 걸림돌일 뿐이야.”

“그래? 어쩌지? 하필이면 네가 싫어하는 힘을 가진 자라서 말이야.”

그 순간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명훈을 바라봤다.

“어쩌긴…….”

철컥-

그가 검을 고쳐 잡았다.

“죽여야지.”

알렉은 자신이 있었다. 예지 능력은 전투와는 무관한 힘이었다. 비록 계시자의 특권으로 남들보다 강한 힘을 가졌다 한들 별해검을 가진 자신을 이길 리 없었다.

씨익.

하지만 어쩐지 그의 경고에 웃는 명훈의 미소가 그를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형님, 근데 어떻게 둘을 싸움 붙이시려는 겁니까?”

“딱히 붙일 필요 없어. 에리카가 오늘 예지 능력을 썼다면 아마 그녀는 너와 알렉이 만나는 장면을 보았을 거야. 아직 예지 능력이 완벽하지 않을 테니 어떤 대화를 나눌지는 알 수 없을 거야.”

“그래서요?”

“우리가 먼저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거지. 알렉이 당신을 죽일 생각이라고 말이야.”

“정말…… 그럴까요?”

“걱정 마. 우리가 할 일은 거기까지니까. 나머지는 알렉이 알아서 판을 만들 거야.”

명훈은 이곳에 오기 전 남궁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어찌 되었든 간에 놈은 팔무성 중에 가장 큰 세력을 만들게 될 거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지만 놈은 영웅이 될 그릇이 절대 아냐.”

그는 남궁의 말의 의미를 이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 놈이 가장 경계할 자는 바로 자신의 계획을 예측할 수 있는 존재겠지. 네가 그 능력을 얘기한다면 분명 놈은 널 제거하려 할 거야.”

남궁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얻어야 할 존재는 바로 그 알렉 트라만을 견제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에리카.’

명훈은 딱딱 들어맞는 남궁의 계획에 기가 막힐 뿐이었다.

“들었습니까, 에리카. 알렉 트라만은 역시 우리의 예상대로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명훈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렉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새도 없이,

“……뭐?”

콰아아아앙---!!!

그는 자신의 옆구리를 노리는 묵직한 타격에 아찔한 충경과 함께 몸이 부웅 떠오르며 밀려 났다.

“큭?!”

공격을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을 찌르는 듯한 격통에 그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숨을 토해냈다.

“넌…… 뭐야?”

알렉은 갑자기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자신을 공격한 거구를 노려보며 말했다.

“알 것 없다. 네가 알아야 할 것은 그저 이 자리에서 죽는다는 것뿐.”

“……뭐?”

강호준의 덩치를 무색하게 할 만큼 거대한 곰을 연상케 하는 남자, 이고르가 알렉을 향해 묵직한 중저음으로 말했다.

“……날 속였군. 최명훈!!”

알렉이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속여? 속인 건 오히려 너희지. 우리는 이미 네가 예지 능력을 가진 계시자를 죽일 계획이란 걸 눈치채고 있었거든.”

“예지 능력을 네놈이 가진 게 아니었군.”

“나는 한 번도 내가 그 능력을 가졌다고 얘기한 적 없는데? 그저 네가 하려는 짓을 알고 있다고만 했을 뿐.”

“빌어먹을 새끼……!!”

“대배우께서 입이 험하시군.”

빠득-

그의 말에 알렉이 이를 갈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젠장…… 그렇다면 에리카란 자가 예지 능력을 가진 계시자인가? 그녀는 누구지? 저들과 이미 손을 잡은 건가? 그럼…… 저 최명훈이란 자는? 정말 계시자가 아닌가? 아니면…… 계시자인데 나를 속이는 건가?’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도 알렉의 머릿속은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 * *

“과연…… 알렉 트라만. 그는 다른 의중이 있었군요.”

“어찌 보면 인간이라면 당연한 욕망일 수 있지.”

“당신도 그런가요?”

“글쎄. 권력이란 것…… 조금 지나면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두 눈을 천으로 감싼 채 새하얀 유타카를 입고 있는 여인은 요란스러운 63 스퀘어의 상황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8명의 위상 중 해와 달의 관망자는 초반에 가장 많은 혜택을 계시자에게 부여하지. 그게 인류를 위한 선함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시키려는 것일 뿐이야.”

그리고 그녀의 옆에 남궁이 있었다.

“관망자는 그야말로 구경꾼일 뿐이니까. 위상들이 계시자를 뽑은 이유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흥미를 가장 잘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자를 뽑은 것이니까.”

그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차를 마시고는 건너편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자를 죽여야겠군요.”

“글쎄. 당신이 본 미래에 과연 그가 죽었을까?”

에리카의 대답에 남궁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녀석은 죽지 않아. 어찌 되었든 놈은 별해검을 가지고 있다.”

“이고르는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닙니다. 게다가 강호준과 최명훈이 있지 않나요.”

“셋 모두 뛰어난 자질이지. 하지만 알렉은 우리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 강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시점에서 녀석은 최강이야.”

남궁은 고개를 저었다.

“뭐, 이고르가 쓰러지게 되면 내가 챙겨주지. 굳이 당신까지 알렉을 만나는 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군.”

“꼭 결과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천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남궁은 자신을 향한 시선이 날카로워졌음을 느꼈다.

“당신이 저의 위상, 안갯속 길잡이께서 말씀하신 회귀자로군요.”

그 물음에 남궁이 그녀를 바라봤다.

“과연…….”

“저를 선별하신 그분께서는 경고했습니다. 예지를 뛰어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이죠. 어쩌면 당신은 알렉 트라만보다 더 위험한 존재일지도 모르죠.”

“그럴 수도 있지.”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마치 신호탄처럼 들렸다.

“당신을 믿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제가 제거해야 할 상대는 알렉보다 당신일지도 모르는데.”

“그랬다면 진즉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건 한 명뿐이었을걸.”

오싹-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리카는 그의 말에서 반박보다는 전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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