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대단하세요.”
경인은 파르르 떨리는 활의 시위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이 좋았어. 좋은 활이로구나.”
수백 미터 거리에 떨어진 목표에 정확하게 화살을 쏜다는 것은 신기(神技)에 가까운 기술이었다.
‘역시…… 같은 활인데 내가 쏠 때와는 전혀 달라.’
하지만 그런 놀라운 기술보다 경인을 두근거리게 한 것은 바로 그 활을 쏜 사람이었다.
‘다시 활을 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줄이야…….’
바로 코마 상태에 빠져 있었던 자신의 아버지, 전태호였기 때문이다.
“흐릿하지만 의식은 있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지. 그래서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마다 생각했었다. 우리 아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세상이 너무 바뀐 게 아닐까 하고 말이야.”
전태호는 경인에게 활을 건네며 말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세상이 바뀔 줄은 전혀 몰랐지만 말이야. 그래도 널 볼 수 있으니 좋구나.”
그러고는 천천히 옥상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내가 두 발로 다시 세상을 걸을 수 있는 순간이 올 줄이야. 남궁이란 분께 큰 은혜를 입었어. 그리고 너에게도 말이야.”
경인은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한 건 별거 없어요. 하지만 우리가 남궁 아저씨께 빚은 진 건 확실하죠.”
“그래. 갚아야 할 일이지.”
그러고는 등에 메고 있던 활을 그에게 건넸다.
조금 전 사용했던 【명사수의 활】보다는 못했지만 꽤나 활대가 유연하게 꺾여 있었다.
“제가 구할 수 있는 활 중에서 그래도 가장 비싼 거긴 한데…….”
“음. 균형이 잘 잡혀 있구나.”
전태호는 아들이 준 활을 잡아 몇 번 살피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감기는 각궁의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면 이걸 드릴까요?”
“됐다. 이걸로도 충분하다. 그보단 정신 바짝 차리거라. 이제 막 깨어난 애비보다는 잘 쏴야지.”
“끙…… 저도 활을 놓은 기간은 아버지랑 비슷하거든요?”
꽈드드득-
전태호는 피식 웃으며 활을 당겼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달라짐을 경인은 알 수 있었다.
파앙---!!
시위를 당긴 손을 놓자 찢어질 듯한 굉음과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케에에엑!!!]
섬광처럼 날아간 화살이 마물의 정수리를 정확히 관통했다.
“음.”
전태호는 맥없이 추락하는 마물을 바라보며 화살을 뽑았다.
오싹-
그 광경을 본 순간 경인의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TV의 브라운관에서 수없이 돌려 봤지만 단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었던 그 눈빛.
그것은 아버지 전태호가 아닌 올림픽 국가 대표 양궁 선수였던 전태호 선수로서의 눈빛이었다.
양궁계의 불패신화가 돌아왔다.
* * *
“가츠마타라고 합니다.”
에리카의 옆에 나타난 검은 복면을 쓰고 있는 남자가 남궁을 향해 말했다.
“이거 어지간히 준비를 한 모양이로군. 비월(飛月)의 수장까지 이곳에 왔을 줄이야.”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라는 뜻이겠지요. 혹은 지금 만난 상대가 그만큼 위험한 적이라는 가정도.”
“날 그 정도로 평가해 주다니 든든하군. 이름은 이미 잘 알 테니 굳이 소개할 필욘 없을 것 같고.”
퉁-
남궁은 통유리로 되어 있는 커다란 창문을 가볍게 두들기며 말했다.
“지금부터 저걸 어떻게 닫을지 얘기하겠다.”
“월드 보스를 사냥하는 것. 협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냥감의 목을 곧이곧대로 당신에게 바칠 생각은 없습니다.”
“자신 있나 보지?”
“물론.”
가츠마타의 말에 남궁은 피식 웃었다. 그의 허리에 채워진 작은 단검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저 뿔을 깎아서 만든 검집은…… 아마도 매머드의 상아단검인 것 같군.’
매직 등급 무기 중에 꽤나 고가의 것이었다.
‘아무래도 에리카가 저자에게 자신이 모은 헤드를 올인 한 것이겠지.’
니나가와 에리카가 가장 신임하는 칼날.
그것이 가츠마타였다.
“그렇다면 한 가지 조언을 해주마. 손발이 맞아야 사냥도 가능한 법이니까. 저 위에 열린 지옥문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
“저쪽은 대신 맡아줄 사람이 있으니까.”
남궁은 63스퀘어를 가리키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지옥문은 마물의 소환을 알리는 중요한 매개체이긴 하지만 모든 마물이 저 문을 통해서 나오는 것은 아니야.”
그의 말대로 1번째 지옥문에서 소환된 고블린들 역시 문은 상공에 떠 있었지만 지상과 지하에서 출몰 했었다.
“그럼 어디에 월드 보스가 나온다는 말입니까?”
“이제부터 잘 봐. 내가 왜 접선 장소를 이곳으로 잡았는지 알게 될 테니까. 중요한 건 상공이 아니라 저 아래. 수심 밑이거든.”
솨아아악……!!
그 순간 한강의 중앙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점차 크기가 커지기 시작했다.
콰가가가강---!!
물이 빠져나가는 하수구처럼 뒤집어진 원뿔의 형태로 빨려 가는 소용돌이 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오며 거대한 물줄기를 뿜어냈다.
“저건…….”
복면에 가려져 있었지만 가츠마타의 목소리만으로도 그의 일그러진 표정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써펀트(Serpent). 2번째 지옥문의 보스이자 전 세계의 해양을 잡아먹은 괴물.”
[크르르르르…….]
남궁은 호수 위로 떠오른 거대한 바다뱀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걸…… 잡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마치 먹잇감을 찾는 듯 이리저리 움직이는 써펀트의 눈알만 하더라도 성인 남자만큼 컸다.
“쫄지 마. 앞으로 더한 것도 사냥해야 할 테니까. 저런 하급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드래곤마저 사냥해야 하는걸.”
“……네?”
“여튼 말도 안 되는 크기지만 그래도 사냥법은 있다. 뱀과의 마물들은 모두 공통된 약점이 있거든.”
“그게 뭡니까?”
“저기 턱 아래에 있는 역린(逆鱗)을 잘라내는 것.”
남궁이 가리킨 대로 한강을 뚫고 나온 거대한 써펀트의 목에 반대로 자란 비늘 하나가 있었다.
“비늘 하나 제거하는 것이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군요.”
“그래. 용 사냥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게다가 써펀트의 지능은 드래곤처럼 영리하지도 않아.”
그의 말에 가츠마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무엇입니까?”
“가지고 있는 무기들이 너무 열악하다는 것. 5번째 지옥문이 열릴 정도가 될 때까지 버티면 모를까…… 써펀트의 비늘은 레어 등급 이상의 무기가 아니면 흠집도 나지 않거든.”
“그런…….”
에리카는 남궁의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제가 알기로 현 시점에서 레어 등급 이상의 무기를 가진 자는 한 명뿐인데…….”
알렉 트라만의 별해검.
“맞아. 사실상 2번째 지옥문은 녀석을 위한 이벤트에 가깝지. 놈은 써펀트를 사냥하고 난 이후 바라던 대로 전 세계의 영웅이 되었거든.”
“알렉 트라만을 부른 이유가 그를 이용해서 역린을 자르기 위함인가요?”
“아니. 그렇게 되면 놈에게 공을 주게 되잖아. 내가 녀석을 부른 이유는 그저 뒤를 맡기기 위함일 뿐이야.”
“그럼…….”
솨아아악---!!
와장창!!
그때였다.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남궁이 서 있는 곳의 창문이 깨지며 화살 하나가 날아와 박혔다.
“……!!!”
가츠마타는 에리카를 황급히 뒤로 잡아당기며 물러섰다.
“이게 무슨 짓입……!!”
“예지로도 알 수 없는 변수는 언제나 있는 법이지.”
남궁이 바닥에 박힌 화살을 뽑아 묶여 있는 줄을 끊어냈다.
“역린을 자를 무기는 하나 더 있다.”
그는 부서진 창문 밖 아래를 내려다 봤다. 경인이 그를 향해 인사를 하고는 발 빠르게 도로를 가로질러 가기 시작했다.
‘무기를 건네받은 걸 보니 명훈이도 무사한 모양이군.’
스르릉-
남궁은 참회자의 검을 뽑으며 가츠마타를 향해 말했다.
“그럼 어디 비월의 실력 한번 볼까?”
파앗……!!
부서진 창문 밖으로 남궁이 몸을 날렸다.
“에리카 님을 잘 보호해라.”
가츠마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뒤에 3명의 살수들이 나타났다.
* * *
쿠그그그그……!!
한강의 강물이 마치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인도 안으로 넘쳐흘렀다.
“……가까이서 보니 더 대단하군요.”
“곡예를 좀 해야 할 거야.”
“네?”
슉! 슈슉……!!
그 순간 위쪽 교차로에서 두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의 끝에는 얇은 와이어가 달려 있었다.
[카아아아악---!!!]
두 발의 화살이 정확히 써펀트의 비늘 사이 가죽에 박혔다.
“괜찮지? 네 특기잖아.”
가츠마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남궁은 있는 힘껏 한강 위로 뛰어 올라 와이어를 움켜잡았다.
지이이잉……!!
그의 손에는 작은 장치가 있었는데 남궁이 나머지 하나를 가츠마타에게 던지고서 장치의 버튼을 누르자 빠른 속도로 와이어를 타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미친.”
요동치는 써펀트의 날뜀 속에서 남궁이 와이어를 타고 마물을 향하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쳤다.
“저 와이어 말입니다…….”
“알아. 모두 대기해라. 여기서부턴 나 혼자 간다.”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열다섯 명의 비월의 살수들이 가츠마타의 명령에 소리쳤다.
“너희들로는 무리다. 대신 위쪽에 조금 전 활을 쏜 궁수들이 있을 거다. 그들을 지켜. 퇴로를 위해서 그들의 안전이 우선이니까.”
가츠마타는 남궁이 준 장치를 발목에 찼다.
“그럴 요량으로 너희를 부른 것 일 테니까.”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저자는 에리카 님뿐만 아니라 나까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로군.”
복면 속 그의 얼굴이 웃었다.
어떻게 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화살에 달려 있던 와이어와 장치는 모두 자신들이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줄을 탄다라…… 당신 말대로 내가 잘하는 거지.”
제대로 당한 느낌이었지만 가츠마타는 어쩐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타다다다닥……!!
그 순간 놀랍게도 그는 남궁과는 달리 오히려 위태로운 와이어 위에 올라타서 질주하기 시작했다.
파앗-!!!
인간의 능력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의 균형감각과 속도.
즈이이이잉……!!
와이어 위를 달리던 그는 순식간에 남궁을 지나쳤다.
[크르르르륵!!!]
써펀트의 위에 올라탄 가츠마타는 상아단검을 뽑아 비늘 사이에 찔러 넣었다.
푸욱!!! 푹!! 파박! 파바박!!
수차례 비늘 사이로 단검을 찔러댔지만 거대한 덩치의 써펀트에게 단검으로 인한 상처는 그저 아주 조금 생채기가 난 정도에 불과할 뿐이었다.
“뭐 이런…….”
“과연 제비 날개라 불릴 만해. 재빠르군.”
와이어를 타고 올라온 남궁이 써펀트의 머리 위에 검을 박아 넣고서 숨을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걸로는 안 된다니까?”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역린을 베려 해도 저 목 안쪽으로 매달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잘못해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즉사입니다.”
“그렇겠지. 그러니 역린이 있는 높이를 낮춰야지. 우리가 닿을 수 있도록.”
“그게 무슨…….”
쿠그그그그---!!!
순간, 써펀트가 이리저리 몸을 저으며 육지로 나가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앗……?!”
요동치는 써번트에 가츠마타가 중심을 잃으며 비틀거렸다.
꽈악!!
마물의 머리 위에서 떨어질 뻔한 찰나 남궁이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헉, 헉…… 헉…….”
“별것 없어. 놈의 배 속을 헤집어 놓으면 돼.”
“……!!!!!!”
복면 뒤로 떨리는 그의 눈동자를 마치 알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 남궁은 씨익 웃으며 있는 힘껏 그를 잡은 손을 들어 올렸다.
[카아아악……!!!!!!]
그리고 마치 동굴 같은 거대한 뱀의 아가리가 두 사람을 그대로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