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네가 먹어 치운 건가.”
[재밌군.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말이야. 계시자는 위상을 절대적으로 따르지 않는가? 받들고 모시면서 말이야. 나 같은 괴물이 정말 네가 우러러 보는 위상을 먹었다고 생각하는가.]
연기의 모습은 다시 바뀌었다.
이번에는 도마뱀과 비슷한 모습이 되었고 놈은 커다란 꼬리를 가볍게 툭툭 치면서 말했다.
“글쎄. 계시자의 힘을 쓰긴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위상을 신처럼 모시진 않아. 그들에게 있어서 계시자는 그저 자신의 장기 말에 불과할 뿐이니까.”
[과연…… 너 같은 생각을 가진 자가 어째서 계시자에 뽑혔는지 신기하군.]
“네 호기심 따위는 관심 없어. 내게 중요한 건 퀘스트를 완료하고 이 동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남궁은 검은 연기로 만들어진 도마뱀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자격을 증명하는 것이 네놈은 죽여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확인해야겠다는 생각뿐이거든.”
[클클……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 그건 별거 아냐.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연기는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어떻게?”
[너도 먹으면 된다. 란의 살점을.]
그 순간 연기가 마치 탁자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그 위에는 핏물조차 가시지 않은 붉은 고깃덩어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것이 이 둥지의 시험이다. 간단하지? 하지만 보상은 그 무엇보다 탁월하지. 운이 좋다면 위상의 힘도 얻을 수 있으니 말이야. 어쩌면 너는 앞으로 시작될 지옥에서 천국을 맛볼 수도 있겠지.]
놈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위상의 힘이라…… 고작 이걸 먹는 것만으로 천외의 힘을 얻을 수 있다니. 생각보다 매력적인데.”
[그럼. 물론이지.]
“란은 누구지? 내가 알기로 위상은 8명이 전부일 텐데.”
[위상의 수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 너의 세계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에 위상들은 존재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해 왔다.]
남궁은 일전에 요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올림푸스의 신들도 위상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현재의 위상보다 낮은 등급이라고 했었지.’
위상에도 격이 나뉜다는 말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신을 창조한 또 다른 신.
만약 이번 사태가 없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신 이외에도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인외의 존재는 꼭 신에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신이라 불리며 숭배받기도 하지만 악마라 불리며 배척되기도 한다.
[란은 가장 오래된 위상이다. 지금 카니발을 연 애송이들이 아닌 그보다 더 오래전, 올림푸스나 무스펠하임이 존재하던 때보다 훨씬 더 과거.]
그는 말했다.
[그 모든 것을 창조한 가장 강력한 위상이지. 하지만 시대가 흐르며 위상의 자리는 변한다. 카니발이 계속해서 반복되어 온 것처럼.]
“이 지랄 맞은 짓을 네놈들은 몇 번이나 계속해 왔었다고?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이건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너의 세상 이외에도 수많은 세상이 존재한다. 카니발로 인해 세계는 번영하기도 하고 쇠락하기도 하며 계속해서 변화된다. 그것이 바로 역사다.]
“역사?”
하지만 연기의 말에 남궁은 차가운 비소를 지었다.
“웃기고 있군. 언제부터 역사가 누군가 대신 만들어주는 것이었지?”
[그래. 그 주체는 너희다. 카니발 역시 너희들이 일궈내고 있는 것이잖느냐. 우리는 그저 배경을 만들어주는 것일 뿐이니까.]
“우리?”
남궁은 검은 탁자 위에 놓인 고깃덩어리를 움켜잡고는 천천히 아래를 내려 보았다.
“그 한마디로 결정 났군.”
[어째서? 네게는 그야말로 기회이다. 위상의 실수든 계략이든 어쨌든 너는 이곳에 왔고 그 어떤 계시자들보다 앞서갈 수 있다.]
“그거야. 그게 바로 내가 널 믿을 수 없는 점이지.”
[그게 무슨…….]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와 달리 남궁은 천천히 고깃덩어리를 내려놓았다.
“란이란 위상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위상을 먹어 치울 정도로 강한 네가 어째서 이곳에 결박되어 있는 걸까.”
[…… 뭐?]
“그리고 너는 조금 전 분명 말했다. ‘우리’라고 말이야. 너는 아직 자신의 정체를 말하지 않았다. 그런 자의 말을 신뢰하라고? 웃기는 소리지.”
남궁은 그를 향해 말했다.
“태도를 확실하게 하는 게 좋을 거야. 너는 위상에 반하는 자인가. 아니면 위상의 편인가.”
퍼억--!
붉은 고깃덩이를 있는 힘껏 움켜잡자 살점들이 폭발하듯 터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크, 크큭…….]
바닥에 떨어진 살점들이 화르륵! 하고 타기 시작했다. 검은 탁자는 소용돌이와 함께 또 한 번 모습을 바꾸었다.
이번엔 검은 붕대를 감은 미이라의 형상. 눈과 코가 있어야 할 부분엔 뭔가로 도려낸 것처럼 시커먼 구멍만이 있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 구멍 속에서 새하얀 안광이 3개 깜빡였다.
[훌륭하구나. 한편으로는 아쉽군. 욕심에 눈이 멀어 저걸 먹었더라면 너를 맛볼 수 있었을 텐데. 네 영혼은 꽤 재밌을 것 같거든.]
“미친. 이딴 곳에서 먹히려고 살아남은 게 아냐.”
남궁은 그의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클클, 위상들의 속셈이야 뻔하지. 꽤나 그들에게 찍힌 모양이지? 그렇지 않다면 고작 두 번째 문이 열린 지금 나를 만날 리 없어.]
미이라가 손을 뻗자 그곳에는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놈들은 내가 널 먹어 치우길 바라겠지만…….]
화아아악--!
그리고, 그의 얼굴에 있는 구멍에서 푸른 화염이 일렁이며 솟구쳤다.
[조금 궁금해졌다. 놈들도 생각지 못한 일이겠지.]
남궁은 눈앞에 느껴지는 업화의 열기에 본능적으로 몸을 가볍게 떨었다.
‘……진짜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것도 자신이 알고 있는 여덟 명의 위상, 그 어떤 자들보다도 강력한 것이었다.
그는 절대로 위상이 아니다.
[가져가라. 퀘스트를 받았다고 했지? 퀘스트엔 보상이 있어야 하는 법이고, 그것을 받았을 때 비로소 완료가 되지.]
두근- 두근-
지금까지 보지 못한 절대적 강함.
자신도 모르게 남궁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게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이다.]
그는 등을 돌리며 남궁에게 작별을 고하듯 뒤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모든 게임이 그러하듯 카니발은 언젠가 끝난다. 살아남는다면…… 결말을 볼 수 있겠지.]
“그러기 위해 나는 계시자의 자리를 빼앗았다. 남들보다 앞선 위치에서 시작한 것이지.”
[과연…… 계시자라…… 그건 그것대로 대단한 일이지만 그걸로는 부족하지. 앞으로도 수많은 장애물들이 존재할 테니까.]
콰직-!
그 순간.
남궁은 상자로 걸어가 있는 힘껏 그것을 부숴 버렸다.
“장해물?”
솨아아악-!!
상자의 뚜껑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보상을 알리는 알림 소리가 울렸다.
“얼마든지.”
[크, 크큭.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녀석이로군.]
보상이 무엇인지 보기도 전에 상자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가 남궁의 시야를 가렸다.
[나는 우(无)라고 한다.]
그때였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남궁에게 그가 말했다.
[무(無)가 아니다. 나는 존재하는데 가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자이다.]
“뭐……?”
[그리고 지금껏 모든 축제를 관망해 온 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목소리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마치 글자가 새겨지듯, 남궁의 눈에 한 줄의 문장이 나타났다.
그것을 본 순간 남궁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위상들조차 볼 수 없도록 안갯속에 숨겨 놓은 우(无)의 전언이라는 것을.
[나는 네가 모르는 남은 25년의 미래를 알려줄 수도 있다.]
* * *
“……!!!”
눈을 떴다.
남궁의 머릿속에 조금 전 우(无)가 남긴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어두운 동굴이 아닌 차 안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현실로 돌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퀘스트가…… 맞긴 한가?’
그는 회귀라는 말도 안 되는 경험까지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동굴 속 우(无)와의 만남은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누군가 나를 시험하려 한 것이겠지.’
아마도 범인은 우(无)의 말대로 십중팔구 위상일 것이지만, 우습게도 오히려 그 안에 있던 우(无)는 자신의 회귀에 대해 일언반구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 말.
그것은 분명 위상들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회귀를 알고 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이 끔찍한 아포칼립스가 자신이 겪은 것보다 25년이나 더 남았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수확이었다.
“흐음…….”
머릿속이 띵했지만 그보다 남궁은 이 일에 대해 과연 요르와 대화를 나눠도 될지 고민되었다.
차르릉-
그때였다.
이마를 짚는 오른팔에 묘한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시야를 내리자 그의 팔목에 뭔가가 감겨 있었다.
“이건…….”
처음 보는 물건에 잠시 머뭇거리는 찰나,
“아빠!! 어서 일어나!!”
문 밖에서 딸의 외침이 들렸다.
자신의 옆자리에 있어야 할 딸이 차 밖에 있는 것을 보고, 그제야 남궁은 운전석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차는 멈춰 있었다.
퍽! 퍼억!!
동시에 둔탁한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컥!!”
차 밖에 들려오는 거침 숨소리는 명훈의 것이었고, 다급히 창문을 두드리는 소민의 모습에 남궁은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빠르게 파악해야 했다.
철컥-
그가 차 문을 열었다.
“아빠!!”
“……무슨 일이야?”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딸의 팔을 잡아 품 안으로 당겨오며 그는 물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와서는 차를 세우더니…… 명훈이 삼촌이 위험해!!”
소민이 다급히 외쳤다.
그녀의 말대로 수십 명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명훈을 볼 수 있었다.
“그럴 리가.”
하지만 남궁은 오히려 잡혀 있는 명훈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위험한 건 쟤들이지. 일단 앉아 있어.”
남궁은 차문을 열어 소민을 안에 들여 놓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쪽이 남궁이오?”
약간은 어눌한 한국어.
“잠시 우리와 함께 가주셔야겠소.”
대충 어디서 온 녀석들인지 감이 왔다.
“명훈아. 그만 나와도 된다.”
“아. 네, 형님.”
콰직!! 우드득-
남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명훈이 자신을 붙잡고 있던 사내를 엎어 쳤다.
“컥!!”
동시에 그가 잡고 있던 팔을 비틀자 남자의 팔이 기형적으로 뒤틀렸다.
“왜 붙잡혀 있던 거야?”
“뭐, 일단 상황을 좀 보려고 했습니다. 소민이도 있고 해서요.”
쓰러진 남자의 등을 가볍게 밟으며 명훈이 일어서자 잠시 당황하던 남자들이 일제히 옷 안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이 새끼들이……!”
“모두 쳐!!”
“대충 어디서 온 건지 감은 오지만…… 자세한 건 몇 놈 잡아서 물어보는 게 낫겠지.”
“알겠습니다. 마물이 쏟아지기 시작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런 조막만 한 칼을 들고 위협이라니. 하여간 건달 새끼들…….”
명훈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쟤들은 운이 좋아. 네가 아니라 호준이었다면 이미 숨 쉬고 있는 놈들이 없었을 테니까.”
“저도 딱히 좋은 녀석은 아닙니다.”
“그래도 사람을 죽이진 않잖아.”
콰즈즈즉……!!
명훈이 백천강검을 뽑아 들자 그의 주위로 울타리를 치듯 차가운 얼음송곳들이 튀어나왔다.
“죽이지만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