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니나가와 에리카가 회귀자라…… 쉽지 않은 상대야. 비월의 살수들은 하나같이 모두 만만하게 볼 수 있는 놈들이 아니니까.”
진웨이는 어느새 그녀가 회귀자라고 확신을 하는 듯 말했다.
섣부른 판단이었다.
아마 평상시였다면 하지 않을 실수였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이형의 힘이 존재했다.
위상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면 얻을 수 있게 될 새로운 힘에 대한 기대감이 그의 냉철함을 무디게 만들고 만 것이었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가 정산을 해야 할 일부터 처리하지.”
회귀자의 정보 때문일까.
진웨이는 조금 전과는 달리 호의적인 태도로 남궁에게 말했다.
“처음부터 나는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 어느 정도 의심은 했지만 계시자라는 것이 확실해 졌으니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
“내 요구는 그리 어렵지 않다. 너희 부하들 모두 철수시켜. 내 눈에 띈다면 이다음부터는 모조리 죽인다.”
“천쉰에게 내 계획을 들었을 텐데? 내 계획이라면 손쉽게 헤드를 모을 수 있어.”
“헤드라면 마물을 잡아서도 충분해.”
“잘 들어보게. 마물도 사냥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위험은 커질 거야. 그렇다면…….”
쿵-
남궁의 주먹이 룰렛의 테이블을 때리자 테이블의 다리가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내가 네 밑에서 일을 할 거였으면 이런 일을 벌일지도 않았겠지. 머리가 나쁜 건 아닐 텐데?”
“…….”
“지랄을 할 거면 너희 땅에 가서 해. 원한다면 내가 네 부하들의 입에 약을 처넣어 배로 실어줄 테니까.”
순간 정적이 흘렀다. 서로를 바라보는 둘은 누구 하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훗.”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진웨이의 낮은 웃음이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과연 천쉰이 당할 만해. 단순히 계시자이기 때문이 아니야. 당신 뒤가 궁금해지는데. 국정원 요원과 함께 있었다지?”
“별로 대단한 것도 아냐. 내 궁금하면 뒷조사를 해봐도 좋다. 711부대. 지금은 사라졌지만 내가 있었던 곳이니까.”
“호오…… 아무렇지 않게 얘기를 하는 걸 보니 자신이 있나 보지?”
진웨이가 그를 향해 물었다.
“당신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과연 나머지 부하들도 과연 당신만큼 강할까? 당신 발목에 채울 훌륭한 족쇄가 되어줄 것 같은데.”
“남아 있는 부대원도 몇 명 없지만 남아 있는 녀석들이 모두 나를 따르는 것도 아냐. 할 테면 해봐. 녀석들을 죽이면 너 역시 죽는다.”
“그럼 당신 딸은?”
콰앙---!!
그 순간 남궁의 검이 진웨이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큭!!”
엄청난 충격에 의자에 앉아 있던 그의 몸이 뒤로 밀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남궁이 그의 위에서 찌른 검을 천천히 비틀며 힘을 주었다.
크득……! 크드드득……!!
뼈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천천히 진웨이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여기서 죽여주지.”
“크, 크큭…… 약점이 없을 것 같더니 그렇지도 않군. 반응이 좋은데? 이제야 좀 사람답구만.”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 듯 진웨이는 희열 가득한 표정으로 남궁을 바라봤다.
“함께할 사람인데 설마 조사도 없이 그랬겠어. 나도 도박은 싫거든. 위험한 승부보다는 안전한 거래가 좋으니 말이야.”
“그래?”
일순간 피어올랐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싹-
오히려 진웨이는 그의 반응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진웨이. 전 삼합회 산주인 린챤의 양아들이나 이례적으로 산주의 자리에 오름.”
“그래서?”
“본명은 진슝. 홍콩 최대 빈민가 구룡성채(九龍城寨) 출신. 혈육으로는 동생이 하나 있지. 진옌. 현재 홍콩중문대학교에 진학 중. 형과 달리 착실하군.”
“너…….”
자신에게 말하는 남궁의 눈빛을 본 진웨이는 그 순간 확신했다.
건들지 말아야 했다.
‘확실히…… 죽인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동생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빈민가 출신이었지만 실력을 인정받아 린챤의 양아들이 된 그와 달리, 동생은 그렇지 못했다.
꿀꺽-
그의 눈빛에는 거짓이 없었다.
“서로 약점을 알고 있었군. 좋아. 그게 오히려 더 좋은 거지. 훨씬 더 믿을 수 있는 거래를 할 수 있지 않겠어? 하, 하하!”
진웨이는 자신의 어깨에 박힌 검을 밀어 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이거 놓지? 이제 좀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하자고. 그래, 한국에 준비하려던 공장들은 모두 빼도록 하지. 장소야 얼마든지 구하면 그만이니까.”
스윽-
남궁이 검을 회수하자 진웨이는 피가 흐르는 어깨에 포션을 부었다.
치이이익……!!
연기가 타는 냄새가 잠시 흐르고 난 뒤 그의 상처가 순식간에 멎었다.
“…….”
남궁은 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5개의 반지를 슬쩍 바라봤다.
‘오색반지(五色斑指).’
프리 퀘스트 때 화롯불을 다루는 자가 자신의 계시자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각각의 반지에는 소켓이 있는데 그 안에 연금석을 넣으면 다른 도구나 술식이 없어도 연금술을 즉시 사용할 수 있는 보구였다.
‘아직 박혀 있는 연금석은 1개뿐인가. 그렇다면 하오수(下五水)를 만들지는 못하겠군.’
남궁은 비어 있는 나머지 4개의 반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게 다 채워지기 전에…….’
그는 진웨이에게 들리지 않는 무언의 선포를 했다.
‘죽여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필요한 것들을 얻어야 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하오수(下五水).
오색반지에 2개의 연금석을 채워 넣었을 때 새롭게 익힐 수 있는, 특수한 연금식으로 만든 포션이었다.
일정 시간 복용자를 무적으로 만들어주는 아이템.
설명만 들으면 사기적인 물건이었지만, 전생에서는 사실상 쓸모없는 아이템으로 치부되었다.
‘지속 시간이 기껏 5초니까.’
게다가 지속 시간이 끝나면 오히려 상태 이상에 빠지게 되는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사실상 지금은 제작이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작에 필요한 재료들은 현시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들뿐이라 모두 야차 보따리에서 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생에서도 진웨이가 하오수를 만든 것은 기껏해야 한 번뿐이었으니 말이다.
“제작 의뢰를 하려고 한다.”
“의뢰? 어떤 거지?”
“공격 무효화와 상태 이상을 보호해 줄 수 있는 포션이라면 좋을 것 같은데.”
“흐음…… 그런 게 있긴 한데.”
“제작할 수 있나?”
“아니. 불가능해. 내 연금술의 단계가 좀 더 높으면 비슷한 걸 만들 수 있긴 한데…… 연금석을 구입하기엔 아직 헤드가 부족하다.”
“얼마나 필요하지?”
“2만 헤드. 처음에는 1만 헤드였었는데 2번째 문이 열리자 연금석의 가격도 올라가더군. 아무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이 더 상승하는 모양이야. 그 말은 갈수록 구하기 쉽지 않다는 말이지.”
진웨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에게 말했다.
“그래서 추가적으로 헤드를 모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던 거야. 쯧, 그것도 모르고…….”
“헤드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는 게 타당하다고 하는 거면 헛소리 집어치우고.”
“……제안은?”
“1만 헤드를 주겠다. 나머지 1만 헤드는 천쉰이 내게 붙인 려진이란 녀석이 가지고 있다. 그거면 되겠지.”
“아니지. 계산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 연금석을 산다고 해도 포션을 만들 재료는? 그걸 살 헤드도 필요하다고.”
“그 정돈 네가 알아서 해. 2번째 문이 끝난 상황에서 연금술의 새로운 술식을 배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네게는 훨씬 이득일걸.”
“그걸론 부족해. 내가 버서커의 레시피를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헤드를 쏟아부었는데. 하나도 회수하지 못하게 되었잖아.”
“대신 연결해 주겠다.”
“뭘?”
“연금술에 필요한 재료들. 대부분은 마물과 관련된 것들이지. 안 그래?”
진웨이는 남궁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
“만약 마물들에게서 직접 채취 할 수 있게 된다면? 쓸데없는 헤드를 소모할 필요도 없으니 네게 큰 이득일 테지.”
“···그런 게 가능해?”
“물론. 다만 그러기 위해선 특수한 공정이 필요하다. 즉, 마물 해체를 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거지.”
“마물 해체? 믿기 어렵군.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어때?”
남궁의 말에 진웨이는 살짝 눈썹을 찡긋거렸다.
“……투자를 하란 말인가?”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고, 이리저리 계산을 한 듯 진웨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하지만 한 가지 더. 네가 부순 공장과 약의 제조기 등등…… 다른 손해들에 대한 배상은?”
솨아아악---!!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영혼 병사들이 나타나 진웨이를 감쌌다.
“마장동 장길수.”
쿠웅!!!
검은 연기 속에서 3자루의 검이 그의 사지를 노리고, 아스의 도끼가 진웨이의 목을 겨누었다.
“그를 찾아가면 될 거다.”
“···너는 남의 목에 검을 겨누는 걸 배상이라 말하는거냐?”
진웨이는 자신을 둘러싼 영혼 병사들을 바라보며 당혹스러운 듯 물었다
“그럼. 이보다 더 큰 배상이 어딨는데?”
“뭐?”
“시시한 푼돈까지 받으려고 머리 굴리지 마. 그건 내가 지금 널 살려주는 목숨값으로도 충분하니까.”
꿀꺽-
남궁은 진웨이의 목젖의 떨림을 보며 경고 하듯 말했다.
* * *
“……아빠!!!”
영종도에서 서울로 돌아온 남궁은 달려오는 소민을 끌어안았다.
딸의 온기를 느끼자 그제야 그는 차갑게 굳어 있던 마음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정말 긴 하루였어.’
남궁은 소민의 뺨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다시 한번 딸을 안고서 고개를 들었다.
“고생했다.”
“고생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돌아오니 호준이가 방비를 잘 해놨더라고요.”
“전 선수님은?”
“지금 거점에서 쉬고 있습니다. 거의 밤을 새우면서 사냥을 하다 보니 피로가 누적된 모양입니다.”
“하긴, 병실에서 나와서 계속 강행군이었으니까. 잘했다. 경인아, 넌?”
“전 괜찮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아저씨.”
“괜찮긴. 이 녀석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 선수님 옆에 뻗어 있다가 형님 오신다고 하니 기어서 나온 겁니다.”
호준의 말에 경인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앞으로 두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체력의 룬을 몰아주는 게 낫겠군.’
군인 출신인 호준, 명훈과 달리 일반인에 가까운 두 사람은 아무래도 힘이 부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아이는 누굽니까?”
“영종도에서 작업을 하다 만난 아이야. 당분간 우리와 함께 있을 것 같으니 돌봐주도록 해.”
“흐음. 알겠습니다.”
명훈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남궁의 뒤에 서 있는 성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나이가 몇이지?”
“……열일곱입니다.”
성우는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경인아, 너랑 동갑이다. 네가 앞으로 잘 도와줘.”
“알겠습니다. 반갑다. 전경인이라고 해.”
경인이 성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오호, 친구?”
조금 전 움츠려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성우가 씨익 웃으며 경인의 손을 잡았다.
“나대지 말고.”
“아, 넵.”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궁의 말에 다시 그는 잔뜩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안녕! 난 남소민! 잘 지내요!!”
“하, 하하. 안녕.”
어정쩡한 자세로 손을 내미는 성우를 향해 소민이 친근하게 웃으면서 두 사람의 손을 포개며 소리쳤다.
“아빠! 성우 오빠한테 거점 구경시켜 줘도 괜찮아?”
“그렇게 하도록 해.”
눈치 빠른 소민이 자리를 피해주기 위해 성우와 경인을 데리고 내려갔다.
“대장, 어제 어떻게 되신 겁니까?”
호준의 물음에 남궁은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헐…… 정말 삼합회 녀석들이 개입되어 있었습니까? 천일회 녀석들도 거물인데…… 완전 급이 다른데요?”
“천일회는 오늘부로 끝났다. 회장인 신태화가 죽었거든. 나머지 잔당들은 국정원에서 맡기로 했고.”
“신태화가 죽어요?”
“응.”
담담한 남궁의 대답에 호준은 누가 그를 죽였나 굳이 묻지 않았다.
“더 이상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없어. 어차피 국내에 남아 있던 삼합회들은 모두 철수하기로 했으니까.”
남궁은 명훈에게 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주었다.
“그래도 종종 거래를 위해서 국내로 들어올 거다. 삼합회 간부 중 하나인 천쉰이란 녀석의 번호다. 네가 가지고 있다가 필요한 연락을 주고받도록 해.”
명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저희는 뭘 하면 될까요?”
“3번째 문이 열리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질 거야. 이제 단순히 차원문이 열리고 그 안에 생성된 마물을 사냥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
“……그럼?”
“지각이 변동되고 새로운 지형이 생성될 거다. 그 첫 번째, 북극해 중앙에 나타나는 마물들의 섬.”
남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색지대(赤色地帶).
“그곳의 공략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