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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55/270)

55화

적색지대(赤色地帶).

3번째 지옥문이 열리는 시점에서 생성되는 특수한 지형이었다.

“그곳은 한마디로 말해서 마물들의 땅이다. 지금처럼 하나의 계열의 마물이 문을 타고 나오는 게 아니라 다양한 마물들이 모여 완벽한 생태계를 꾸리고 있는 곳이지.”

“그거…… 그럼 위험한 것 아닐까요?”

“위험하지. 특히나 마물의 번식력은 어마무시해서 순식간에 불어나니까. 섬의 크기는 한정되어 있고 놈들은 계속해서 증가할 거다.”

“살 곳이 부족해지면…….”

“놈들은 이제 인간의 영역을 노리겠군요.”

“그래. 그러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적색지대를 공략해야 한다.”

남궁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섬의 크기는 웬만한 국가의 수도만큼 거대해. 규모로 따지자면 서울보다 더 크겠지.”

“저희들만으로는 불가능하겠군요.”

“그래. 그곳은 단순히 소수의 인원으로 클리어할 수 있는 곳이 아냐. 거점을 만들고 차근차근 공략해야 한다.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그사이에 또 다른 문도 계속해서 열릴 테니까.”

“……갈수록 태산이군요.”

명훈은 남궁의 말에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보고를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섬의 위치가 북극해라면 러시아와 캐나다의 지원도 요청을 하는 게 좋겠네요.”

호준이 말했다.

“마물이 아직 적을 때 아예 섬을 폭파시켜 버리죠. 어떨까요?”

“군병력으로는 불가능할 거야. 섬이 나타나고 난 뒤에 그곳으로 갈 수 있는 포털이 생긴다. 그 전까지 섬에 가까이 가는 건 거의 불가능해.”

“왜죠?”

“섬 주위의 심해에 마물들이 먼저 소환되거든. 현존하는 함선으로는 마물들에게서 버틸 수 없을 거야.”

“으음…….”

“게다가 섬이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면 국가들은 그곳을 파괴하려 하지 않을걸.”

두 사람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섬에는 마물뿐만 아니라 던전들도 존재하거든.”

마치 이세계의 영토를 그대로 전이(轉移)해 온 것 같은 적색지대의 등장은 전 세계인들을 충격, 공포와 함께, 아이러니하게도 환희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곳은 위험하지만 한편으로는 기회의 땅이기도 하니까.’

헤드를 모을 수 있는 마물들을 언제라도 사냥할 수 있는 곳. 그리고 무구와 보구를 얻을 수 있는 던전까지 존재하는 땅이었으니까.

“군침이 돌 수밖에 없지. 눈앞에 닥친 아포칼립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희망이었으니까.”

“글쎄요. 제 눈에는 마치 맛있는 먹잇감을 하나 던져주고 서로 싸우게 만들려고 수작 같다고 생각하면 억측일까요?”

“아니. 바로 맞혔어.”

명훈은 남궁의 말에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각국의 정부들은 바보같이 적색지대를 소유하기 위해 서로 싸우기 바쁠 거야.”

적색지대에 처음 생성되는 마물은 고블린이었다.

3번째 문이 열리고 얼마나 강한 마물이 나올까 걱정했던 인류에겐 그야말로 희망의 기회였다.

‘하지만 희망은 그리 길지 않다.’

그 뒤로 구울, 리자드맨, 미노타우르스까지…….

문을 통해 소환된 마물뿐만 아니라 던전의 마물들까지 적색지대에 생성되면서 순식간에 섬은 죽음의 땅으로 변했다.

‘힘을 합쳐도 될까 말까 한 상황에서 오히려 서로 경쟁을 했으니…… 결과야 불 보듯 뻔하지.’

적색지대의 거점을 쟁탈하려는 각국의 경쟁.

그로 인해 오히려 불어난 마물들이 섬을 벗어나 대륙을 노렸고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지옥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적색지대의 마물을 막아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번째 지옥문까지 함께 열렸으니까.’

인류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적색지대엔 3개의 안전구역이 있다. 마도석으로 보호되는 곳이라 유일하게 거점을 구축할 수 있는 곳이지.”

“각국의 쟁탈전이 벌어지겠군요.”

“맞아. 거점을 차지하겠다고 싸우다가 오히려 거점을 구축하기는커녕 서로 피해를 입은 채 마물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 일쑤였지.”

“으음…….”

남궁은 더 이상 그런 사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세계를 구하겠다는 영웅적인 용기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 한 곳을 우리가 먼저 선점한다.”

빼앗기기 전에 빼앗기 위함일 뿐.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겠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명훈이 물었다.

“2번째 문이 닫힌 뒤 일어나는 몬스터 웨이브까지 모두 끝나고 나면 3번째 문이 열리기 전에 새로운 기능이 열린다.”

“그게 뭡니까?”

“대리자 일족들의 경매가 시작될 거야.”

“경매요? 과연…… 야차 보따리에서 파는 물건 말고 좀 더 좋은 것들이 나오는 걸까요?”

“하지만 지금 보따리에 있는 물건들도 가격이 높아서 별로 살 수 있는 게 없는데…… 경매가 가능할까요?”

“하긴 저희는 형님 덕분에 그래도 헤드를 좀 모았지만 일반 사람들은 경매에 참여할 헤드도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경매에 참가하는 건 구매자의 위치에서 참가 아냐. 그 반대지.”

“……네?”

“우리는 경매의 물품이다.”

두 사람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 *

을지로 지하상가.

남궁은 익숙한 듯 계단을 내려갔다.

마물의 습격으로 인해 이곳도 피해가 있었는지, 원래 인적이 드물어 관리가 엉망이었던 곳은 이제는 폐허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래도 아직 사람들은 대리자 일족의 거처에 대해서는 모르나 보군.’

쥐 죽은 듯 조용한 상가 안을 살피며 남궁은 생각했다. 아직 카니발이 시작된 지 초반이었으니 사람들은 대리자 일족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다.

기껏해야 그들을 본 것은 1번째 지옥문이 끝나고 카니발에 대한 정보를 주입받을 때 1번뿐이었다.

‘나중에는 이 폐허 같은 곳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붐비게 될 테지.’

시작은 대리자 일족이 하나가 아닌 위상과 같은 여덟 일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을지로는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변한다.

‘처음엔 보따리에서는 구할 수 없는 다른 일족의 재료를 대리자들을 통해 구하기 위해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던 것이었지.’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대리자 일족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격이 필요했고, 그랬기에 때때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헤드와 물건들을 교환하기 시작하며 형성된 것이 바로 을지로의【블랙마켓】이었다.

“뭐…… 그렇게 되기까지는 아직 멀었겠지.”

남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어째서 이 허름한 폐허를 애틋하게 생각하는가 하면, 전생에 이곳은 피비린내만 가득했던 아포칼립스에서 유일하게 사람들이 모이던 곳.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 규류.”

“저는 독심가가 아닙니다. 남궁 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리가 없지요.”

남궁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슬렁 나타나는 규류의 모습이 보였다.

“썰렁하군.”

“아직은 대리자 일족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 모르니까요. 제가 있는 곳을 알아내기까지 제법 오래 걸릴 겁니다. 남궁 님께서 특별한 거니까요.”

규류는 뭔가를 만들고 있었던 모양인 듯 작업용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내가 부탁한 건?”

“지금 만들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거 재료가 만만찮게 들어가는데.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 건 걱정 말고.”

“따라 오시죠.”

남궁의 대답에 규류는 괜한 소리를 했다는 표정으로 손짓을 했다.

끼이이이익-

지하상가의 계단을 한층 더 내려가자 습한 냄새와 함께 단단한 철문이 나타났다.

언뜻 보기에는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된 폐허 같아 보였지만 그 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쿵…… 쿵…… 쿵…….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아궁이의 불이 뜨겁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주문 제작은 원래 재료를 모두 받고 난 뒤에 하는데…… 남궁 님이시니 특별히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으흠.”

남궁은 눈앞에 만들어진 커다란 사각 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완성되지? 창고에 그냥 둘 수는 없는데.”

“오늘 저녁이면 될 겁니다. 대금만 확실히 해주신다면 서비스로 알까지 해서 거처로 옮겨 드리죠.”

“좋군.”

“저는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대금을 확실히 해주신다면, 이라고 말이죠.”

규류가 제작하고 있는 물건은 다름 아닌 써펀트의 알을 보관할 상자였다.

“크기 조절도 가능해서 안에 알을 넣고 난 다음에는 이만한 상자 크기 정도로 줄일 수 있습니다.”

그는 한 뼘 정도 길이의 사각형을 손가락으로 만들며 말했다.

“그런데 정말 써펀트의 알을 가지고 오셨네요. 부화시키는 방법은 아십니까?”

“아니. 몰라. 방법은 차차 알아내야지. 그나저나 처음부터 네게 부탁을 할 걸 그랬어. 전대에 생명체는 넣을 수 없어서 가져오느라 꽤나 고생했거든.”

남궁은 규류가 만든 부화 상자가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저도 처음부터 만들어 드릴 수는 없었을 겁니다. 아무리 제가 계약을 했다지만 확실한 거래가 아니면 나머지 일족들이 난리를 칠 테니까요.”

“그럼 이건 확실한 거래인가? 내가 대금을 치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뭐……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갑자기 100만 헤드나 되는 거금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제작을 해준 거지?”

그 순간 규류는 씨익 웃었다.

“남궁 님을 믿는 게 아니라 소민 양을 믿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제게 따님을 보여주신 것 아니십니까?”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여의도에서 2번째 지옥문을 공략 할 때 남궁은 그에게 자신의 딸에 대해 얘기했다.

다른 정보는 없었다.

그저 소민을 지켜보라는 것뿐.

반신반의했지만 규류는 그녀를 본 순간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설급 마력 자질에다가 익힌 마법은 희귀 그 자체인 사상마법이라뇨!!”

규류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계약을 하고 싶을 정도라구요. 하하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래서.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귀하신 따님을 어째서 제게 보여주셨을까. 제가 그래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잖습니까. 다른 대리자 일족들에게 소민 양의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반응은?”

“모두 군침을 질질 흘리고 있습죠. 소민 양을 일족의 계약자로 맞이하고 싶어 안달이 나서 얼마나 저를 괴롭히는지 아십니까?”

그는 껄껄 웃으며 남궁에게 물었다.

“정말 기가 막히십니다. 일족 경매가 시작되는 걸 아시고 그러신 것이겠죠.”

팔각전쟁(八角戰爭).

위상들이 계시자를 뽑아 서로 경쟁을 하는 것이 카니발의 큰 그림이라면, 그 안에는 대리자 일족들끼리 이형(二形)의 왕 자리를 두고 벌이는 경합이 있었다.

“대리자 일족들이 자신의 헤드를 지불해서 계약을 맺을 계약자를 찾는 경매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일족들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줄 계약자를 찾아야 했다.

“당연히 군침을 질질 흘리고 있습죠. 경매장이 열리기만을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고 있을걸요?”

규류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을 쓰는 대리자라면 가장 세(勢)가 강한 건 나가 일족이 있지요. 나가 여왕이 소민 양을 눈독 들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고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나가 여왕은 대리자 일족들 중에서도 가장 부유하죠. 크크, 그녀의 보고엔 없는 것 빼곤 다 있지요. 만약 그녀가 정말 소민 양을 탐낸다면 제대로 크게 부르셔도 될 겁니다.”

규류는 손가락을 쫙 펴며 말했다.

“여왕이라면 100만도 흔쾌히 지불할걸요?”

“바보 같은 소리 하는군. 나는 내 딸을 고작 헤드 때문에 일족들과 계약을 시키려는 게 아냐.”

“그럼요?”

“소민이의 자질을 증폭시키기 위함이지. 고작 나가 여왕 따위가 전 재산을 모두 준다 한들 내 딸을 넘볼 수 있을 것 같아?”

“하, 하하…… 그럼……?”

규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요정족.”

“자, 잠시만요. 요정족은 대리자 일족 중에서도 가장 약한 힘이 약합니다. 요정족도 마법이 뛰어나긴 하지만…… 나가 여왕처럼 공격 마법을 가진 것도 아니고요. 딱히 메리트가 없는데요?”

“요정족의 마법은 그렇지. 하지만 여왕의 보물은 조금 격이 다를걸?”

“페어리 퀸의 보물이라고요? 서, 설마…….”

“그래. 그거.”

남궁의 대답에 규류는 자신의 이마를 탁 치며 깊이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세계수 지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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