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으…… 춥다.”
레이캬비크 공항에 내리자 한국의 날씨와는 달리 완전한 겨울 추위에 소민은 몸을 떨며 말했다.
“그러게. 너무 춥다. 나도 추운 건 질색인데.”
“언니도요?”
“응. 하아, 이런 날씨엔 이불 덮고 귤이나 까먹는 게 최곤데 말이야.”
“맞아. 맞아.”
“……넌 왜 따라온 거야?”
공항의 입구에 서서 남궁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소민의 옆에 서 있는 박효주를 바라봤다.
“당연히 제가 가야죠. 전용기까지 움직였는데 두 사람만 덩그러니 보낸다고요? 저도 위에 보고할 명분은 있어야 하잖아요.”
“난 좋은데? 언니랑 같이 가니까.”
“그치? 나두!”
아무래도 남자들뿐이었던 터에 소민은 박효주가 곁에 있으니 좋은 듯 보였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런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요?”
“스비나펠스요쿨. 여기서 4시간 정도 차로 가면 있는 빙하지야.”
“그럼 제가 차를 렌트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가이드는 이미 불렀으니까.”
“남궁!!”
그때였다.
“살아 있었군! 하긴, 자네라면 당연히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세상이 난리가 났잖아. 안 그래?”
공항 입구에 커다란 지프가 멈추더니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남궁의 2배는 될 것 같은 거구의 흑인이 시원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껴안았다.
“와…… 남궁 씨가 이렇게 작아 보이는 건 처음이네요. 장길수 씨도 비교가 안 되겠는데요?”
박효주는 남자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 소민? 벌써 이렇게 크다니. 네가 태어날 거란 얘기만 들었었는데!!”
남자는 들고 있던 남궁을 내려놓고는 박효주를 얼싸 안았다.
“……내 딸은 이 아이다. 위커맨(Wicker Man).”
“응?”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는 남궁에 그는 끌어안고 있던 박효주와 소민을 멍한 얼굴로 번갈아 바라봤다.
“하하하, 미안. 미안. 귀여운 아가씨여서 말이야.”
머리를 긁적이며 호탕하게 웃은 그는 박효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죠. 무스라고 합니다.”
그는 팔을 허리 쪽으로 내리고서는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박효주가 그를 바라봤다.
“무스. 어울리지 않는 짓 하지 말고 가자. 시간이 없으니까.”
“좋아! 어서 가자. 공주님을 내가 모시지.”
“꺄악?!”
무스가 소민을 번쩍 들어 올려 어깨 위에 걸터앉게 하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세워둔 지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 덩치는 또 누구예요?”
“711부대에 있을 때 작전을 도왔던 적이 있어 인연이 되었지.”
박효주의 물음에 남궁이 대답했다.
“원래는 영국 특수부대에 있었던 녀석인데…… 부름을 받고 지금은 위커맨(Wicker Man)이 되었지.”
“위커맨? 그게 뭐죠?”
“고대 드루이드들이 인신공양을 할 때 사용된 인간 모양의 구조물이란 뜻이지만…… 지금은 그냥 의식을 도맡아 하는 사제란 의미야. 오직 단 1명에게만 수여되는 직함이지.”
“이, 인신공양이요?”
“헤이, 남궁! 쓸데없는 얘기로 괜히 아가씨를 놀라게 하지 말라고. 드루이드는 더 이상 살생을 하지 않으니까.”
무스가 지프의 문을 열어 소민을 태우고서 남궁에게 손가락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귀도 밝기는.”
남궁은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뭐…… 단 1명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남아 있는 드루이드가 저 녀석과 쿠후란뿐이지만.”
부우우웅-
일행이 탄 지프가 거칠게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 * *
“오랜만이로군. 남궁.”
“당신은 늙지도 않나 보군. 10년 만인데도 똑같은 얼굴인걸.”
차로 오랜 시간을 이동한 일행이 스비나펠스요쿨이란 거대한 빙하지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에는 어울리지 않게 막사 하나가 있었다.
마치 몽골의 전통가옥인 게르처럼 천장이 둥근 형태의 막사 안에는 빙하지의 추위를 단숨에 녹여 줄 따뜻함이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불을 피워 얻는 열기가 아니었다.
‘공기가 달라.’
박효주는 마치 다른 공간에 와 있는 것 같은 신기한 기분에 막사 안을 두리번거렸다.
“껄껄…… 살아 온 세월을 생각하면 10년이야 별것 아니지. 반송장이나 송장이나 무덤과의 거리는 기껏해야 한 걸음 차이니까.”
“그렇게 말해도 10년 뒤에도 살아 있을 거잖아. 당신은.”
“내가? 어찌 알지? 자네는 마치 내 생을 본 것처럼 말하는군.”
오싹-
그 순간 구부정한 자세로 허리를 숙이고 앉아 있던 노인의 눈동자가 빛났다.
박효주는 그것을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몸을 가볍게 떨었다.
“봤어. 지금보다 25년 동안 더 살았거든. 나, 사실 미래에서 왔어. 당신은 10년 뒤까지 살아 있다. 그 뒤에 드루이드의 결계가 깨지고 위커맨의 제물이 되서 사지가 불타 버리지만.”
“쿨럭!”
박효주는 남궁의 대답에 놀라 헛기침을 했다.
“내가 위커맨의 제물이? 이야…… 나도 궁금했는데. 드루이드가 직접 의식에 제물이 되면 얼마나 대단한 일이 생길지 말이야.”
“딱히. 대단한 것도 없었어. 드루이드의 술서에 적혀 있듯이 쿠후란의 심장에는 드루이드의 눈물이 있더군.”
쿠후란은 눈앞의 드루이드의 이름이지만 한편으로는 이름이 아니기도 했다. 그것은 드루이드의 최고위를 지칭하는 직위이기도 했으니까.
지금 눈앞에 있는 저 노인이 바로 쿠후란의 이름을 잇고 있는 자였다.
“역시! 나도 수행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나 보군. 드루이드의 눈물이 만들어지다니 말이야.”
그는 즐거운 듯 손뼉을 치며 껄껄 웃었다.
“드루이드의 눈물이 뭐지? 고승의 사리 같은 건가? 아니, 그보다 지금 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는 거예요?”
박효주는 그의 반응에 인상을 찡그리며 남궁에게 귓속말을 했다.
“당신이 시간여행자라고요? 나 참, 저 양반 아무래도 제정신이…….”
“하하, 언니.”
그녀의 말에 소민이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클클, 장난일세. 장난이야. 내 꿈이 드루이드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거였거든. 이런, 내가 손님들을 모셔두고 차도 내어놓지 않았구만.”
쿠후란은 껄껄 웃으며 막사 안의 화로에서 끓고 있는 찻잔을 들었다.
“서슬 잎으로 만든 차일세. 스비나펠스요쿨을 지나오느라 추웠을 텐데. 몸을 따듯하게 녹여줄 걸세.”
김이 모락 나는 차를 받자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 들이켰다.
“이제 좀 더 깊은 얘기를 해볼까.”
그런 둘을 바라보던 쿠후란이 남궁에게 말했다. 어느새 잠이 든 두 사람을 무스가 안아 담요가 있는 곳에 내려놓았다.
“아직 멀었군. 국정원 요원이라는 자가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서 말이야.”
“껄껄, 이해하게. 드루이드의 공간은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어주니까. 평범한 훈련으론 부족하지.”
“그래도 의심을 해야지. 차에 독이 들었는지 아닌지 확인도 없이 마시다니.”
후릅-
남궁은 쿠후란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를 들이켜고는 내려놓았다.
“세상이 흉흉하니 때론 쉼이 필요한 법이지. 그나저나 딸이 아주 예쁘게 컸군. 아내를 닮은 모양이야.”
“칭찬으로 듣지.”
“암암, 칭찬이지. 자네를 닮았으면 험악했을걸.”
“눈도 보이지 않는 양반이 잘도 남의 얼굴을 평가하는군.”
“클클…… 이제 대답해 보게. 나를 불태우고 드루이드의 눈물을 가져간 자가 누군가. 혹시 록산느인가.”
놀랍게도 쿠후란은 남궁이 회귀를 했다는 이야기를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맞아. 당신의 손녀. 당신의 자식들이 죽은 지금, 당신을 제외하고 켈트의 피가 남아 있는 유일한 직계지.”
“그렇다면 그녀도 여덟 명의 계시자겠군. 그래, 자네도 계시자였나?”
“전생에는 그렇지 못했다. 지금은 계시자가 되었지만.”
쿠후란은 그의 대답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찬탈자의 길이라…… 그래서 위습들이 요동쳤던 것이로군. 그래, 어떤 현재를 바꾸려고 하는 겐가.”
“별것 없어. 이미 나는 현재를 바꿨고 그 바뀐 현재를 지키려는 것뿐이지.”
“딸이로군.”
“과연.”
남궁은 그의 통찰력에 구구절절 설명을 할 필요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쿠후란, 당신을 록산느에게서 지켜주겠어. 나와 거래를 하지 않겠나?”
“됐네. 남에게 자신의 손녀로부터 지켜달라는 부탁을 한다고? 그거야말로 우스운 일이지.”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
그의 대답에 남궁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천하의 남궁도 아버지긴 한가 보군. 그리 걱정하지 말게. 드루이드의 미래는 바꾸는 것이 아니라 순응하는 것 이니까.”
그런 그를 향해 쿠후란이 말했다.
“자네가 찾아온 것도 미래의 한 부분일 테니. 거래를 하지 않아도 도와준다는 말일세.”
쿠후란은 끄응 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은 아마 자네 딸이겠지.”
사아아악-
그가 소민의 이마 위에 손을 얹자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는 손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 몸에 두 개의 영혼이라…….”
쿠후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턱을 쓸어 넘겼다.
“아이의 몸 안에 들어 있는 영혼이 우호적이라서 다행이군. 어린아이가 쓰기엔 너무 강력한 힘일세. 운이 좋군. 자칫 잘못하면…… 그녀를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어.”
사아아악-
피어오른 연기의 색이 다시 한번 변했다.
“아이 엄마의 영혼이었군.”
그의 말에 남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 있을까?”
“우선적으로 아이의 육체를 강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건 시간이 흘러야 가능한 일이지. 자네가 그때까지 아이를 보호 하는 건 어떤가.”
“아마 당신도 들었을 거야. 대리 경매 말이야.”
“거기에 참가할 생각인가?”
“맞아. 소민이와 함께 출전할 거야. 언제까지 피할 수만은 없어. 앞으로 더욱더 힘든 상황이 계속 될 테니까. 언젠가 내가 지켜줄 수 없는 순간이 올 수도 있으니까.”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네.”
쿠후란은 이해한다는 듯 대답했다.
“그게 뭐지?”
“당장 그릇을 강화시킬 수 없다면 영혼에서 답을 찾아야겠지. 이 아이의 몸에 부하가 걸리는 건 두 영혼이 함께 힘을 사용하기 때문일세.”
그가 손을 허공에다 젓자 피어나던 연기들이 형상을 만들었다.
“강력한 힘은 그만큼 더 강한 부하를 주지. 그렇기에 몸에 부하를 줄이려면 마법을 사용할 때 두 개의 영혼을 하나로 만들어주면 된다네.”
“영혼을 합친다고? 그건 절대 안 돼!!”
“걱정 말게. 두 영혼을 사라지게 하겠다는 뜻이 아니니까.”
쿠후란이 손가락을 세워 원을 그리자 연기들이 빠르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물과 기름은 서로 섞이지 않지만 세차게 저으며 아주 잠깐 섞이는 것처럼 보이지. 자네 딸의 영혼 상태를 그렇게 만드는 것일세.”
솨아아악……!!!
연기가 맹렬하게 요동쳤다.
“마엘스트롬(Maelstrom) 능력을 사용할 때 순간적으로 영혼을 하나로 되게 만든다면 아이의 몸에도 부담이 더 적어질 걸세.”
“그게 가능한가?”
“3년 정도 내 밑에서 수련을 한다면…… 쉽진 않겠지만 가능할 걸세.”
“3년? 너무 오래 걸려. 우리에겐 일주일도 채 되지 않는 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아.”
“허허,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드루이드의 비전을 고작 일주일 만에?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쿠후란은 남궁의 대답에 오히려 헛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인가?”
“진심이 아니라면 딸을 데리고 오지도 않았겠지.”
“흐음…….”
그는 남궁의 눈빛에 걱정과 함께 자신감이 서려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 자네에게 진 빚을 갚는다 생각하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네.”
“……고맙소.”
남궁은 쿠후란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제야 긴장감이 풀린 듯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딸이 위험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들었을 때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자네가 데리고 온 이 아가씨. 혹시 이 아가씨도 내게 수련시키려고 함께 온 건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쿠후란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궁에게 물었다.
“음? 아니. 그녀는 국정원 요원이야. 나를 감시차 따라온 것뿐이고.”
“흐음…… 혹시 이 아가씨도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맞아. 염동력을 쓸 수 있어.”
그 순간 쿠후란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남궁을 바라봤다.
“염동술? 이런 깊이의 영해(靈海)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작 그런 잔재주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영해란 단순히 영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심도. 즉, 영혼의 깊이를 뜻하네.”
그는 경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껏 이렇게 깊은 영해를 본 적이 없어. 자네는 모르겠지만…….”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의 떨림이 남궁의 귀를 때렸다.
“지금 위습들이 그녀의 주위에서 요동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