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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59/270)

59화

“위습이라면…… 정령을 말하는 건가?”

“맞네. 아무래도 그녀는 정령술사로서 자질이 있어 보이는군.”

남궁은 예상치 못한 쿠후란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효주가 정령술사라…….’

솔직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가 알고 있는 전생에서 그녀의 전투법은 염동력을 이용한 투검술이었기 때문이다.

“정령술을 익힐 수 있을까?”

“글쎄. 일단 위습들은 그녀에게 흥미를 보이는 것 같군. 교감에 성공한다면……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도 있겠지.”

남궁은 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박효주가 염동력뿐만 아니라 정령술의 자질까지 개안하게 된다면 현 상황에서 계시자와 붙어도 쉽게 밀리지 않을 수 있어.’

전력 증강의 차원에서 남궁의 입장으론 박효주가 강해지는 것은 그리 나쁜 이야긴 아니었다.

“두 사람을 부탁하지.”

“자네는?”

“나는 나대로 필요한 준비를 해야 하거든. 일단 이걸 좀 봐주겠어?”

남궁은 전대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우우웅-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알을 살핀 쿠후란은 놀랐다는 듯 눈썹을 찡긋거렸다.

“이거…… 설마 이계의 알인가?”

“맞아. 2번째 문의 월드 보스였던 서펀트의 알이야. 이걸 부화시키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

그의 물음에 쿠후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나로서는 도움을 줄 수 없군.”

“내가 아는 최고의 드루이드가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이겠지.”

“최고의 드루이드라…… 부끄러운 말이지. 하지만 알의 부화는 별개의 문제야. 불가능한 것은 아닐세.”

“그럼?”

“위상의 존재와 함께 차원문이 열렸을 때 우리는 알 수 있었지. 차원은 여러 개고 우리는 그 많은 차원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쿠후란이 말했다.

“나는 그저 이 작은 세계의 드루이드일 뿐일세. 내가 아는 건 우리 세계일 뿐. 이계의 일은 이계의 드루이드가 알 수 있겠지.”

“흐음…….”

남궁은 그의 대답에 살짝 머리를 긁적였다.

“결국 록산느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건가? 내가 당신과 만났다는 걸 알면…… 그녀의 반응이 썩 좋지 않을 것 같은데.”

“미래를 살았다면 자네도 알 텐데. 록산느는 비록 정령을 다루지는 못하지만…… 누구보다 뛰어난 테이머라는 걸 말이야.”

지금의 쿠후란은 위대한 드루이드가 아닌 손녀를 자랑하는 평범한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아마 위상이 내가 아닌 그 아이를 뽑은 이유도 그 때문일 걸세.”

“비스트 마스터(Beast Master). 일반적인 동물들뿐만 아니라 문 너머의 고대수들까지. 그녀는 모든 야수를 다룰 수 있었지.”

“껄껄, 멋지구나. 과연 나의 손녀다워.”

“좋아할 일이 아냐. 그런 그녀는 결국 당신을 죽였어.”

툭-

그 순간 쿠후란이 남궁의 어깨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자네는 드루이드가 아니니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 아이는 나를 죽인 게 아닐세. 돌려보낸 것이겠지. 드루이드의 땅으로 말이야.”

“…….”

쿠후란이 무스에게 말했다.

“위커맨. 자네가 남궁에게 록산느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게.”

“알겠습니다, 쿠후란.”

“잠깐, 설마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말인가?”

“그렇네.”

남궁은 생각지도 못한 그의 대답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미치겠군. 이집트에 있었던 것 아니었어? 그곳에서 수행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세상이 흉흉하니까. 2번째 문이 끝나고 쿠후란께서 괜찮은지 보라왔더군. 온 김에 그녀는 스비나펠스요쿨의 크레바스 안에서 수양을 하고 오겠다고 하더군.”

“흥, 쿠후란의 결계가 아직 부서지지 않았는지 확인하러 온 것뿐이겠지.”

“하하, 그녀를 너무 모질게 생각하지 말게. 일단 나와 함께 갑세. 두 사람의 훈련은 쿠후란께서 직접 맡아주실 테니 걱정 말고 말이야.”

무스는 투덜거리는 남궁의 어깨를 가볍게 밀며 막사 밖으로 나섰다.

* * *

타닥……! 탁!

남궁과 무스는 드넓은 빙하지를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장비를 갖추고 천천히 걸어가야 할 곳이었지만 그들은 마치 평지를 달리는 것처럼 속도를 내고 있었다.

‘이곳은 쿠후란의 결계 때문에 마물의 습격이 별로 없었을 텐데…… 과연 드루이드의 수련을 배운 자답군.’

남궁은 자신의 속도를 따라오는 무스를 힐끔 보며 좀 더 속도를 올렸다.

“얼마 전에 영국의 여왕이 쿠후란을 찾아왔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걸까.

무스는 정면을 바라본 채 내달리며 남궁에게 말했다.

“원래 드루이드들은 켈트의 아래 있었던 자들이니까. 뿌리가 영국에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우습지 않나.”

국가가 세워지고 산업이 발전하며 자연은 점차 훼손되었고 드루이드는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 뿌리의 주인이라 칭하는 왕실의 반대로 우리는 이 섬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는데 말이야.”

그의 말대로 그들은 수백 년이 흘러 자연스럽게 터전을 떠나 이 빙하지에 정착하게 되었고, 지금은 그 명맥마저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그런 그들이 이런 세상이 도래하니 도움을 청하더군. 쿠후란의 지혜와 힘을 빌려달라고 말이야.”

“그의 결정은?”

“어떤 세상이라도 드루이드는 중도를 걷는 자야. 인간을 위해서만 행동할 수는 없지.”

“흐음.”

“다만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 그대로 소멸의 길을 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지. 쿠후란은 영국의 계시자에게 록산느를 소개해 주었네.”

“알렉에게? ……그렇군.”

남궁은 무스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록산느와 알렉이 만난 게 지금 시점이었던 모양이군. 내 생각보다 빠른걸.’

전생에 록산느는 알렉의 클랜 일원이었다.

대부분 독자적 행보를 걷는 다른 계시자와 달리 두 명이 함께 있는 알렉의 클랜이 거대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했다.

‘알렉과 록산느가 손을 잡게 그냥 둬도 될 것인가…….’

두 사람의 만남은 곧 세를 빠르게 확장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남궁의 입장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둘 사이를 갈라놓은 명분은 딱히 없었다.

“여길세.”

무스가 그를 데리고 간 곳은 빙하가 펼쳐져 있는 대지 한가운데 깊게 파여 있는 거대한 구멍이었다.

“이 안에 있는 건가.”

“그렇네. 드루이드의 신성한 장소 중 하나지. 크레바스 안쪽에는 개미굴처럼 수많은 구멍과 길이 연결되어 있어. 사실 어디에 그녀가 있을지는 나도 알지 못해.”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남궁에게 말했다.

“조심하게. 미로에 길을 잃게 되면 영영 헤어나올 수 없으니까.”

“그야말로 죽으러 가는 거군.”

“영혼에 가장 가까워지는 것은 사실 죽음의 문턱에 서는 것이니까.”

툭-

“……?!”

그 순간 무스가 남궁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자, 잠깐!!!!”

솨아아악……!!

크레바스 안으로 떨어지는 그를 바라보며, 무스는 두 손가락을 눈썹 위로 올렸다 내리면서 경례를 하듯 인사했다.

“영혼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게.”

* * *

파각-!!

카드드득……!!!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떨어지던 남궁이 검을 뽑아 벽에 찔러 넣었다.

수 미터를 더 벽을 긁으며 내려오던 그가 서서히 속도를 죽였다.

“후우…….”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밤하늘의 별처럼 벽에 수많은 구멍들이 보일 뿐.

“이대로 계속 떨어질 순 없지.”

부우웅-!!

그가 검을 잡고서 반동을 주며 가까운 구멍 안으로 뛰어들었다. 구멍 안에 들어간 그가 얼음덩이 하나를 잡고 바닥에 던졌다.

“흠…….”

한참이 지나고 난 뒤에야 퉁!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바닥이 있는 곳이군. 그렇다면 한결 수월하겠어. 이곳이 빙하지라서 다행이로군.”

남궁은 천천히 얼어붙어 있는 구멍의 벽면 위에 손을 가져갔다.

우우우웅…….

그의 손바닥 아래 닿아 있는 얼음벽들이 일렁이더니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드루이드는 아니지만…… 방법이 없진 않지. 쿠후란도 이건 몰랐을걸.”

푱-! 표뵹-!!

벽에 붙어 있던 얼음이 녹아 물이 되자 그 안에서 수어들이 나타났다.

“길을 찾도록 해.”

남궁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어룡(魚龍)의 보석】이 발동되자 수어들이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흠…….”

소환된 수어는 모두 4마리.

미궁에선 3마리가 한계였었는데 지금 그는 1마리를 더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약간의 피로감이 더해졌지만 확실히 리자드맨을 사냥하면서 그의 능력이 전체적으로 오른 듯싶었다.

‘경험치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마물을 사냥하면 할수록 능력치가 오르는 것 맞아.’

그렇기에 문을 닫은 뒤에 생겨나는 몬스터 웨이브는 성장의 기회이기도 했다.

솨아아악---!!

수어들이 빠르게 길 안을 탐색하며 지도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분명 거절…… 텐데?]

[당신의 도움…… 필…….]

그때였다.

수어가 내뿜는 음파를 통해 마치 무전처럼 들려오는 옅은 대화 소리.

‘혼자가 아니다?’

이곳은 드루이드의 신성한 장소 중 하나였다. 평범한 사람이 이 안까지 들어올 리는 없었다.

‘설마…….’

순간 남궁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파앗-!!!!

그는 황급히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 *

“록산느. 마지막 드루이드의 후예. 일전에 제의를 했다시피 나는 당신의 힘을 얻고 싶은데.”

“일전에 답을 했다시피 난 너희 영국과 손을 잡을 생각은 일도 없어. 드루이드가 필요하다면 후예가 아닌 드루이드에게 직접 찾아갈 일이지.”

‘여기로군.’

으르렁거리듯 쏘아붙이는 록산느의 목소리가 들릴 때쯤 남궁은 벽에 기대어 대화를 주시했다.

“쿠후란은 이미 노쇠했지. 아마 그는 당신에게 드루이드의 자리를 내어줄 테니까.”

‘설마…….’

남궁은 나머지 한 사람의 목소리가 누구인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알렉 트라만?’

무스의 얘기를 들었지만 설마 그가 이곳에 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녀석도 급하긴 급했나 보군. 드루이드의 성지까지 찾아올 정도라니.’

남궁은 어쩐지 때를 잘못 맞췄다 생각했다.

‘조금 골치 아프게 되었군…….’

록산느가 알렉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이미 전생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이미 여의도에서 한 차례 마찰이 있었던 자신을 알렉이 본다면 절대로 우호적일 리 없었다.

“그 양반이 내게 자리를 물려줘? 아무것도 모르는군. 여길 어떻게 알아낸 건지 모르겠지만 당장 꺼져!!”

알렉의 대답에 록산느는 코웃음을 쳤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겠나. 계시자는 힘을 합쳐야 한다. 당신이 클랜에 들어오게 된다면 우리는 나머지 여섯 명을 훨씬 쉽게 앞지를 수 있어.”

“당신이야말로 두 번 말하게 하지 말지? 피를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록산느의 성격은 여전하군. 앞으로도 고생깨나 할 거다. 알렉.’

그가 록산느를 영입하기 위해 삼고초려가 아니라 네 번, 다섯 번 질기게 달라붙었던 건 유명한 일화였으니까.

남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쓴웃음을 지었다.

‘할 수 없지.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로군.’

그는 조용히 자리를 뜨려 몸을 돌렸다.

“곤란한걸. 계시자라면 당신도 알 테지. 우리는 인류의 구원자 같은 게 아냐. 사람을 구하는 것? 그건 필요에 의한 것이거나 혹은 그저 따라오는 부가적인 것에 지나지 않지.”

“……그래서?”

“여덟 명은 결국 모두 서로 경쟁자일 뿐. 누군가는 사람을 이끌고 누군가는 사람을 죽이며 각자의 방식대로 경쟁자보다 앞서 나가야 하지.”

오싹-

남궁은 그 순간 수어들에게서 느꼈던 알 수 없는 불온함을 다시 느꼈다.

“나는 사람을 이끄는 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자도 될 수 있지.”

“무, 무슨…….”

스르르릉-

빙하의 냉기보다 더 소름 돋게 하는 칼날의 쇳소리.

“동료가 되지 못한다면 길은 하나지.”

남궁은 지금까지 미래를 바꾸려 했다.

그리고 바꾸었다.

하지만 바뀐 미래가 모두에게 행복한 것이라 할 순 없었다.

누군가에게 평화를, 누군가에겐 조급함을 만들어냈고, 누군가에게 힘이, 누군가에겐 시기를 만들어내었다.

“……멈춰!!!”

지금 미래가 또 한 번 바뀌었다.

아니, 뒤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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