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솨아아악---!!!
막사 안에 옅은 바람이 불더니 서서히 바람이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막사의 천이 펄럭이지는 않았다.
마치 외부와 내부가 다른 공간인 것처럼 막사 안에서만 맹렬한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엄청나군…… 이렇게 강력한 마엘스트롬은 처음 봐. 그런데도 불구하고 두 경계를 완벽하게 나누고 있다니. 저 아이의 재능은 말이 안 나오는군.”
록산느는 소용돌이 안에 있는 소민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남궁, 도대체 당신 딸의 정체가 뭐야? 영국 마법회의 마법사들도 저런 사람은 없을걸.”
“내 딸이니까. 그런 하수들과 비교하면 안 되지.”
“……팔불출이로군.”
그의 대답에 그녀는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휴우-”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소민은 긴장이 풀린 듯 낮게 숨을 토해냈다.
“영혼의 섞임이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안정적이게 되었구나. 앞으로 꾸준히 계속 수련을 한다면 훨씬 성과가 있을 거다.”
“감사해요! 스승님!”
“허허허, 우습군. 내 평생 제자를 두지 않았는데 뒤늦게 이런 엄청난 제자를 둘이나 받다니 말이야.”
쿠후란은 소민의 말에 어쩐지 기분이 좋은 듯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우우웅…….
그는 막사 한편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박효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위습들이 즐거워 노래를 부르고 있군. 상호 감응이 좋다는 것이겠지. 저 아가씨도 소민이에게 뒤처지지 않을 자질이야.”
“흥, 노인네. 나한테는 그런 표정을 한 번도 짓지 않았던 것 같은데.”
“너야 드루이드의 자질이 없으니 그렇지. 그런 주제에 계시자가 되다니…… 섭리를 순응해야 할 자가 섭리를 만들려 하고 있으니 당연히 내가 너를 좋게 볼 수 있겠느냐.”
“위상이 할아버지가 아닌 나를 선택했어. 그건 내가 더 뛰어난 자질을 가졌다는 뜻이지.”
“부려먹기 좋아서겠지. 넌 머리가 단순하잖냐.”
“우씨…….”
며칠 동안 함께 있던 쿠후란과 록산느는 언제 사이가 멀었었냐는 듯 매일이 티격태격이었다.
“보기 좋구만. 나는 록산느가 영영 쿠후란을 만나러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이런 세상도 조금은 좋은 점이 있는걸.”
“그러게. 그녀가 자질이 없어 쫓겨난 뒤로 둘 사이가 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록산느가 자질이 없다고? 하하, 남궁. 그건 자네가 잘못 생각하는 거야.”
“알아. 테이머로서는 뛰어나지. 하지만 드루이드는 정령의 힘을 다룰 수 있어야 하잖아.”
무스는 남궁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녀가 이곳을 떠난 이유는 드루이드와는 별개의 문제야.”
“무슨 뜻이지?”
“드루이드는 일인전승(一人傳承). 그를 모시는 사제와 제자는 여럿을 거느릴 수 있지만 오직 단 한 명만이 드루이드가 될 수 있네.”
그가 록산느를 바라봤다.
“선대 드루이드들이 고행을 통해 얻은 힘인 드루이드의 눈물을 받음으로써 새로운 드루이드가 탄생 할 수 있지.”
“설마…….”
“그래. 드루이드의 눈물을 전승하기 위해서는 선대의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하는 일이니까. 록산느는 그것이 싫어 스스로 일족을 버린 거야.”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남궁은 둘 사이에 이런 과거가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저 강해지고자 하는 욕심에 눈이 멀어 쿠후란을 살해한 파렴치한 자라고 여겼었으니까.
“……그렇군.”
남궁은 다시 한번 그녀를 새로이 보게 되었다.
단순히 알렉의 위세를 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녀를 자신의 세력 안에 두는 것이 어떨까 하는 고민이었다.
‘드루이드는 주술사들과도 연이 깊으니까. 록산느를 포섭하게 되면 아프리카 쪽 세력들과도 연결될 수 있긴 한데…….’
자신의 의도와 달리 조금씩 커져가는 세력의 확장에 남궁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오직 자신을 따르고 그 역시 믿는 자들뿐이었지만, 사람의 수가 증가하면 믿음보다는 이익을 위해 오는 자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
‘이익을 좇는 자들은 쉽게 배신하니까.’
그렇기에 명훈을 앞장세우고 그 스스로 뒤에 남으려고 하지 않았던가.
스아아아아악-!!!
그때였다.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겨 있던 박효주의 주위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강풍이 불기 시작했다.
“우악?!”
박효주 역시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의 주위를 살폈다.
“호오, 이거 대단하군.”
소민이 발생시켰던 정신적 폭풍과는 달리 그녀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바람은 순수한 바람 그 자체였다.
[끼르륵…….]
어디선가 웃음소리 같은 게 들리는 듯싶었다.
“이거 혹시…….”
남궁은 황급히 주위를 훑었다.
“맞아. 아무래도 그녀가 정령을 불러낸 모양이야.”
무스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감격스럽다는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아 그녀를 바라봤다.
“이렇게 선명한 정령의 목소리를 들어본 게 얼마만인지…… 내가 제대로 본 모양이야. 이건 위상이 내린 이계의 힘이 아닌 그녀 본인의 능력이니까.”
쿠후란이 박효주를 바라봤다.
그녀의 주위에 휘몰아치던 바람이 서서히 형상을 갖추더니 손바닥만 한 작은 인형 같은 소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정령의 유형화(有形化)까지 성공하다니…….”
록산느는 그녀의 주위에 떠돌아다니는 바람의 정령의 모습을 보며 넋을 잃고 말았다.
“고작 일주일도 안 되는데…… 어쩌면 정말 일을 낼지도 모르겠어.”
“너도 본 모양이군.”
“당연하지. 나도…… 드루이드니까.”
남궁의 말에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정령수(精靈水).”
“뭐, 가격이 워낙 비싸서 지금은 살 엄두도 못 내는 것이긴 하지만…… 나가 일족의 보고 속 목록 중에 눈여겨보고 있던 물건이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령친화력을 높여주고 상위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고 쓰여 있군.”
가격은 무려 100만 헤드.
빈사 상태를 회복시킬 수 있는 엘릭서조차 40만 헤드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소모품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가격임에 틀림없었다.
“중요한 건 상위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이지. 그건 100%의 확률이란 말이잖아.”
록산느는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주위에 떠다니는 바람의 정령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박효주를 향해 말했다.
“만약 그녀가 정령수를 쓴다면…….”
“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도 있겠군.”
“그렇게 담담하게 말하니까 좀 짜증 나는데? 남궁, 당신은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를걸.”
그녀는 마치 자신의 일인 양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은 이 세계가 재밌어졌어.”
남궁 역시 그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 * *
웅성- 웅성-
세빛섬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시작하는 거야?”
“나도 계약을 맺으면 알렉 트라만이 만든 클랜에 들어갈 수 있을라나?”
“크크, 웃기고 있네. 네가 될 것 같냐. 고블린한테도 쫄아서 숨어 있던 게. 이 형님이 계약자가 되는 걸 지켜봐라. 뒈지지 말고.”
“지랄. 너나 잘하셔.”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주고받고 웃으며 대화를 하는 사람들부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무아미…….”
마치 죽음의 문턱에 있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까지.
분위기는 극과 극이었다.
“와, 이게 다 몇 명이죠? 족히 수천 명은 될 것 같은데요? 섬 안으로 들어갈 수나 있을지…….”
“정부에서 긴급 공지를 내리긴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은 모양이네요.”
세빛섬에 도착한 호준과 명훈이 사람들을 보며 넋을 잃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 정도면 그래도 양호하지.”
“……이게요?”
하지만 두 사람과 달리 남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천천히 사람들을 훑었다.
아이슬란드에서 넘어오기 전 그는 박효주를 통해 총리에게 경매의 위험성에 대해 얘기했다.
자신이 회귀자라는 것을 밝힐 순 없었지만 대신 월드 보스를 사냥 하며 나온 보상에서 단서를 찾았다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경매의 룰을 알고 저들에게 닥칠 미래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온전히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정부의 힘으로 억제한다면 오히려 더 큰 반발이 일어날 것이었고, 회귀자라는 걸 밝혀봤자 믿는 사람은 오히려 더 없었을 것이다.
‘결국 선택은 자신의 몫이지.’
그가 저 많은 이들의 삶을 대신 살아 주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후회할 필요는 없다.’
남궁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으며 옆에 서 있는 소민의 손을 꽉 잡았다.
그 역시 선택을 한 것이니까.
“너희는 이제 돌아가. 곧 시작될 거니까. 휘말리게 되면 곤란하다.”
“알겠습니다. 형님.”
“소민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곧 보자.”
[모두 조용.]
그때였다.
일행이 섬을 빠져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상공이 일그러지며 야차들이 나타났다.
일전에 경험 때문인지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소란스러웠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흐음…… 3,982명이라…… 기대보다는 저조하지만 그래도 경매를 진행해 볼 만큼의 수는 되는군.]
야차들의 앞에 서 있는 자는 규류보다 조금 더 얄팍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제1위계 현류.’
규류와 경쟁 상대이자 현재 야차 일족 중에 가장 세가 강한 자였다.
[이제부터 경매의 룰을 얘기하겠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 일족이 관할하는 영역은 이곳뿐만이 아니다. 아시아의 나라들을 관할하지. 당연한 얘기지만 지금 이 경매는 다른 나라에서도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는 참가자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치 아랫것들을 보는 것 같은 모습은 분명 계약자를 찾으려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냥 가지고 놀 장난감을 고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다른 일족들 역시 각각의 도시에서 경매의 후보를 뽑는 경기를 진행할 것이다.]
우우우웅……!!
현류가 손을 뻗자 상공에 홀로그램으로 된 거대한 세빛섬의 지도가 나타났다.
[일족의 후보에 뽑히는 건 단 2명. 한국, 일본, 중국…… 뭐. 여튼 우리가 관할하는 나라의 모든 참가자들 중 단 2명을 뽑는다는 말이지.]
“자, 잠시……!! 그럼 참가자가 도대체 몇 명인가요?”
누군가 손을 들어 물었다.
하지만 질문을 한 그조차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몸을 떨었다.
[좋은 질문이야. 어차피 알려주려 했으니까. 죽이지 않으니 떨지 말고. 그런 모습으로 일족의 환심을 살 수 있겠나.]
현류는 마냥 사람 좋은 얼굴로 질문을 한 남자에게 대답했다.
[참가자의 수는 모두 79,311명]
“……!!!”
“……!!!”
그는 즐기듯 그들을 향해 웃었다.
“진짜야? 7…… 7만 명이 넘는 사람 중에 고작 2명만 뽑는다는 말이잖아?”
“씨발, 이건 말이 안 되지!”
“나…… 난 갈래!”
“나도! 나도 포기야!!”
우우우웅…….
그 순간 사람들이 모여 있던 바닥에 둥글게 선이 하나 나타났다.
[허허, 마음대로 나가면 곤란한데. 아직 벽을 세우기 전인데 말이야. 일단 벽을 먼저 만들어야겠네.]
“벽? 우릴 가둘 생각이야!”
“……그게 만들어지면 못 나간다고!!”
사람이 바닥에 그려진 선을 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상하네. 분명 말했을 텐데. 언어를 잘못 설정했을 리도 없는데 왜 못 알아처먹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까?]
현류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곳은 일족들에게 자신을 어필하는 자리라고 했는데 이렇게 등을 보이고 도망가면 매력이 없잖아. 안 그래?]
서걱-
퓨수수수수숙!!!!
선을 넘은 사람들의 목이 일제히 잘려 나갔다.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핏물들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
남궁이 소민의 눈을 가렸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그의 손을 천천히 내리며 오히려 그 광경을 똑바로 바라봤다.
“괜찮아. 아빠.”
소민은 더 이상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히려 하나하나 눈에 새기는 듯 죽어가는 그들을 지켜봤다.
[자자, 주목. 지금부터 경매의 룰을 얘기해 주겠다. 한국엔 마침 딱 맞는 조형물이 있더군. 3개의 섬 중 가장 작은 솔빛섬이 너희들의 목적지다.]
사람들은 이제 침묵한 채 하늘에 떠 있는 홀로그램의 지도를 바라봤다.
솔빛섬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세빛섬과 가빛섬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2개의 섬 역시 하나의 다리로 연결되어 3개의 섬은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룰은 간단하다. 솔빛섬 안에 있는 보스를 잡으면 된다. 사냥이 끝났을 때 살아남은 자들은 이제 다른 국가들의 후보들과 함께 마지막 경합을 벌이게 된다.]
웅성- 웅성-
[그리고 최종적으로 야차 일족의 후보로서 2명이 선발된다.]
현류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장 보스를 잡으라고 하면 어렵겠지. 그래서 너희들에게 강해질 수 있게 배려를 해두었다. 그것이 바로 저기 세빛섬과 가빛섬 두 곳이다.]
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앞에 있는 섬들에게 향했다.
[너희 중에 경험을 해본 자도 있을 거다. 마물을 사냥하다 보면 룬이라는 것이 떨어지는 걸 말이야. 세빛섬 안에서 마물을 사냥하면 룬을 얻을 수 있다.]
“오…….”
“진짜?”
[그리고 가빛섬에는 아티팩트를 구할 수 있다. 무기도 있고 방어구도 있으며 액세서리도 있다.]
“대박…….”
“장난 아니잖아?”
“와씨, 역시 오길 잘한 건가? 좀 전에 털린 애들만 X된 거지. 낄낄.”
현류의 말에 사람들은 조금 전 공포는 잊은 듯 다시 한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단, 2개의 섬 중에 갈 수 있는 곳은 하나뿐이다. 신중하게 고르는 게 좋을 거야.]
“그, 그런…….”
“그럼 룬이냐 무구냐는 건가?”
“……뭘 선택해야 해? 뭐가 좋은 거냐구?”
환희에 찼던 사람들은 또다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자, 그럼. 대리 경매를 시작하겠다.]
그런 그들을 더 이상 보기 귀찮다는 듯 현류는 손을 대충 휘저으며 말했다.
[시간을 끌어봐야 우리들의 눈엔 가치가 떨어질 뿐이야. 길을 여는 자만이 가치가 있는 법이지.]
야차들이 사라지고 난 뒤 사람들은 저마다 양쪽 섬 중에 어디를 갈지 얘기하기 시작했다.
웅성- 웅성-
하지만 사람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아빠, 우리는 어디로 갈 거야?”
소민이 남궁에게 물었다.
“좀 전에 녀석이 힌트를 줬지. 시간을 끌어봐야 가치가 떨어질 뿐이라고. 룬? 무구? 놈들의 눈엔 하찮은 것이지. 우리가 강해지는 건 중요하지 않아.”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으니 강해질 수 있다는 얘기에 다들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진짜 중요한 게 있다.’
바로, 마물을 사냥하는 것.
누구보다 빨리.
그것이 자신의 가치를 보이는 방법이었다.
그러니 답은 하나다.
“솔빛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