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으엑.”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지하목이 터져 버리자 안에 들어 있던 진액들이 사방에 뿌려졌다.
끈적한 액을 뒤집어 쓴 소민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남궁을 바라봤다.
“돌아가서 씻자.”
“응, 응.”
딸의 얼굴에 묻은 진액을 손으로 닦아 주며 남궁은 옅게 웃었다.
“이제…… 죽은 건가?”
소민이 지하목의 시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죽은 건 아냐. 지하목은 타락하긴 했지만 원래는 정령이니까. 물리적인 타격으로 소멸시킬 수는 없거든.”
“그럼…… 어떻게 하지?”
“일단은 무력화시키는 것이 맞겠지.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다면 야차들이 먼저 말을 할 거야. 하지만 이미 규율이 보스 사냥이 아닌 시간 동안 생존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니…….”
쩌저적-!!
남궁은 지하목의 시체 안에서 열대 과일처럼 두터운 껍데기에 감싸여 있는 핵을 뜯어냈다.
“핵과 본체를 분리하면 더 이상 놈도 힘을 쓸 수 없거든. 뭐, 힘을 쓸 본체도 남아 있지 않지만 말이야.”
“휴, 다행이다.”
그의 말에 소민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 잠깐……!! 지금 저 괴물을 안 죽이겠다고? 이봐!! 주위를 보라고! 저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때였다.
남궁이 떼어낸 지하목의 핵을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 뒤에서 김갑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안 죽었군. 살려달라고 빈 것치고는 명이 긴 걸.”
야차 보따리에서 구입을 한 건지 금창약과 붕대를 감고 있던 그는 건물 구석에서 비틀거리며 기어 나왔다.
“다, 당연하지! 내가 왜 죽어?”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현류가 손을 쓴 것인지, 그는 용케도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살아남았다.
“흐음.”
남궁은 힐끔 지하목에 떠 있는 시간을 바라봤다.
시간은 어느새 1분도 채 남지 않았다.
“괜한 짓 할 생각하지 마.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이걸 부수는 건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부우우웅-
그때였다.
김갑철의 손에 들려 있던 컨트롤러가 작동하자 아직 부서지지 않은 드론 한 대가 빠른 속도로 핵을 향해 날아갔다.
지이잉-! 철컥-
드론에 장착되어 있던 포신이 아래로 향했다.
“…….”
남궁은 그걸 본 순간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조금 전과 포신의 형태가 달랐다.
“설마?”
두두두두두---!!
그 순간 드론에 달려 있는 포신의 포구가 불을 뿜었다.
쾅! 쾅!! 콰가강!!!
남궁은 날아오는 포탄에 살짝 뒤로 물러섰다.
드론에서 쏟아지는 요란한 굉음과 함께 쩌적……! 하는 소리가 나며 지하목의 핵이 부서졌다.
“크, 크하하하!! 정령이라고 죽이지 못한다고? 바보 같긴……! 사람은 머리를 써야 하는 법이라고!”
김갑철은 부서진 핵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경매의 진짜 목적은 대리 일족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는 것이다. 생존만 해도 후보가 될 수 있다고 해서 그냥 생존만 하는 놈들은 결국 잘려 나갈 뿐이지!! 아고고고…….”
그는 너무 웃어 옆구리가 찔리는지 허리를 부여잡았다.
“아프면 그냥 입을 닫고 있지. 엄청 나불거리는군. 남의 공로를 빼앗는 것을 자랑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런 그를 남궁은 한심하게 바라봤다.
“뭐 이 새끼야? 그래, 마음대로 해라. 그래 봐야 결과는 달라지지 않으니까. 공로를 빼앗아? 아니지. 이건 현명한 거지.”
“응. 그래. 퍽이나.”
“또 저 표정…… 재수 없는 새끼.”
“이거…… 설마 현류가 시킨 건 아니겠지.”
남궁은 드론이 쏴대는 정령탄을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랬으면 그냥 널 손절 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무, 무슨 헛소리야?”
“현류 녀석도 기가 차겠군. 기껏 널 살리려고 사냥에서 생존으로 조건을 바꿔놨는데 머저리 같은 계약자는 제 발로 제 발로 굴러온 기회를 걷어찼으니 말이야.”
스으으윽…….
그 순간, 부서진 핵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난 정령의 핵을 부수지 않는다고 했지 부수지 못한다고 한 적은 없다.”
“……뭐?”
“하지만 지하목이 저주받았다고는 분명 말했지. 무슨 뜻인지 이해됐나? 저주란 건 말이야…… 생각보다 쉽게 없어지는 게 아니거든.”
푸욱-!!
그때였다.
김갑철의 복부에 있었던 상처를 뚫고 검은 가시가 튀어나왔다.
“억…….”
어리둥절함과 경악이 뒤섞여 있는 표정으로 그는 자신의 배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그저 멍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처적……! 처저저적……!!!
복부에 튀어나온 가시와 연기가 닿는 순간, 결정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가시가 그의 전신을 뒤덮기 시작했다.
“사, 살려…….”
양다리와 팔이 검게 물들었고 결정이 서서히 그의 목을 타고 올라왔다.
“…….”
남궁은 그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정령의 나무조차 오염시킨 저주야말로 풀지 않는 게 아니라 풀지 못하는 거지.”
“커…… 커헉…….”
바닥에 쓰러진 김갑철은 남궁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려는 듯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결정이 되어버린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파스슥……!
쓰러지며 바닥에 부딪히자 오히려 그의 팔이 유리가 깨지듯 산산조각이 났다.
“안 돼…….”
검은 결정들이 목을 넘어 그의 얼굴을 모두 뒤덮고 말았다.
우드득…… 우드드득…….
기괴한 소리와 함께 김갑철의 몸이 점점 줄어들더니 지하목의 핵처럼 둥글고 검은 구체로 변해 버렸다.
“이, 이게 어떻게…….”
“소민아. 물러서.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다. 새로운 고독(蠱毒)이 만들어진 거니까.”
삐잇-
그때였다.
상공에 떠 있던 시계가 00 : 00을 가리켰다.
▶ 1차 대리 경매가 끝났습니다.
▶ 생존자 : 192명.
남궁은 생존자의 숫자를 보며 지금까지 참아왔던 낮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밖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거의 죽은 모양이군…….’
7천 명이 넘었던 참가자 중 살아남은 사람은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 생존자 : 81명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생존자의 숫자가 갑자기 절반으로 줄어버렸다.
▶ 기여도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 생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도망친 자들은 대리자 일족의 관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알림과 함께 사람들의 앞에 상자가 나타났다.
빠득-
남궁은 이를 갈았다.
자신도 모르게 참았던 한숨 뒤로 끝내 분노가 끓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빠.”
그런 그의 감정을 읽은 걸까.
소민이 손을 잡았다.
“응. 괜찮아.”
남궁은 딸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이런 감정을 가져봐야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도 아직 멀었군…….’
하지만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그런 영웅심으로 이 세계를 살려고 했다면 진즉에 죽어가던 자들을 구하는 것부터 했을 테니까.
분노의 목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단 한 곳.
이런 상황에 인간들을 내몬 것도 모자라 기여도니 뭐니 하는 잣대로 마음대로 죽여 버리는 빌어먹을 놈들에 대한 분노일 뿐이었다.
▶ 생존자들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 가장 기여도가 높은 2명에게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 다른 지역의 1차 대리 경매가 끝나기 전까지 모두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 모든 지역의 1차 대리 경매가 끝나면 후보자들은 2차 대리 경매에 자동 참가됩니다.
남궁과 소민의 앞에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보석 상자처럼 작은 에메랄드색의 상자 하나가 더 나타났다.
“위로 올라가지 않고 여기서 보상을 확인해도 괜찮은가? 여기도 별로 좋은 풍경은 아니지만…… 위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데.”
[그럼요! 물론입니다.]
알림 대신 들려오는 야차의 목소리.
처음과 달리 보스방에 나타난 야차는 현류가 아닌 규류였다.
[그 정도의 배려야 어려운 게 아니니까요. 최고 기여자인 두 분께 해드려야지요.]
“배려라…… 뭐, 퍽이나 고맙군.”
말을 하고 있는 규류의 입꼬리가 자꾸만 들썩이는 것이 보며 남궁은 대충 분위기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와…… 진짜 놀랐습니다. 성장의 비약을 그런 식으로 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완전 소오오름……! 현류 녀석의 표정을 남궁 님께서도 보셨어야 하는데 말이죠.]
규류는 즐거운 듯 말했다.
[어후, 천 년 묶은 체증이 아주 시원하게 내려가는 기분이네. 게다가 녀석이 밀어주던 계약자의 흑우 짓까지! 오늘 아주 완벽했습니다.]
그가 남궁에게 달라붙었다.
[지하목을 말씀하셨을 때만 하더라도 솔직히 반신반의했거든요. 와…… 근데 진짜 제대로네.]
“시끄럽고 이거나 들어.”
[……네?]
남궁은 떠들어대는 규류의 입을 다물게 하고는 지하목의 뿌리 중 하나를 잡았다.
서걱-
얼떨결에 뿌리를 든 규류를 뒤에 세워두고 남궁은 있는 힘껏 검으로 그것을 잘랐다.
[그걸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어디에 쓰긴. 당연히 재료로 쓰려는 거지. 저주가 벗겨졌으니 이제 다시 본래의 정령목으로 돌아왔으니까.”
[정령목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직 있을 리가 없는데요.]
“물론 우리는 그렇지. 하지만 요정들은 다를걸?”
[요정이요……? 자, 잠시만요!! 요정족을 지금 저희 영역으로 불러들이시겠다는 뜻입니까?
“그래. 이만큼 오랜 세월을 산 정령목은 그들도 본 적 없을 테니까. 페어리퀸에게 전해. 고대 정령목을 얻었으니 사러 오지 않겠냐고.”
[갑자기 정령목을요? 아…… 설마? 아?! 아아…… 에? 지금 이거…… 정령목은 핑계인 거죠?]
오싹-
규류는 그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며 히죽거리고 말았다.
[그래, 그거네. 페어리 퀸과 소민 양을 만나게 하려는 핑계!! 영역이 달라서 불가능했는데 페어리 퀸이 정령목을 핑계로 소민 양을 만나게 된다면…….]
분명 경매고 뭐고 바로 계약을 할 것임이 틀림없다.
“쉿. 말이 많아.”
남궁은 그의 물음에 대답 대신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하, 하하…… 네, 네.]
규류는 그제야 이해를 했다는 듯 끄덕이는 고개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런 거였어. 그래, 그런 거였군요! 크, 크크큭……!!!]
그는 마치 남궁의 웃음을 따라 하려는 것처럼 괴상하게 웃으며 말했다.
‘남궁…… 저 인간 이제 보니 애초에 2차 경매 따위는 할 생각도 없었어.’
규류는 기가 막히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해? 빨리 안 움직이고.”
하지만 넋을 놓고 있는 규류를 보며 남궁은 오히려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탄하기엔 아직 이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