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탈칵-
남궁은 섬의 한편에서 1차 경매에서 받은 상자를 열었다.
넘버링 998450.
이름 : 야차 일족의 만능 탕약.
등급 : 매직(최고)
▶ 기본적인 회복 효과 이외에 여러 가지 잡다한 효과가 첨가된 포션.
▶ 대리자 일족만이 만들 수 있는데 일족마다 효과가 조금씩은 다른 듯싶다.
▶ 체력뿐만 아니라 마력을 회복시켜 준다.
▶ 추가적으로 몸을 청결하게 만들어 준다.
▶ 복용 후 1회 한정으로 수면 시 악몽을 꾸지 않게 해준다.
“정말 잡다한 기능이군.”
남궁은 손가락 하나만 한 길이의 작은 유리병에, 마치 흙탕물처럼 생긴 시커먼 액체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으…… 먹고 싶지 않게 생겼어.”
“맞아. 그래도 먹어두는 게 좋아. 마력을 회복해야 하니까.”
“응, 응.”
소민은 병의 뚜껑을 열어 냄새를 살짝 맡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꿀꺽-
그녀는 코를 손으로 움켜잡고는 단숨에 그것을 들이켰다.
“푸하!! 으…… 아직도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맞아. 요정들이나 나가족이라면 괜찮았을 텐데. 야차 녀석들은 약의 제조만큼은 끔찍하거든.”
남궁은 딸을 향해 웃으며 탕약을 전대 안에 넣었다.
“아빠는 안 마셔?”
“응. 괜찮아. 아빠는 마력을 회복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조금 쉬기만 하면 돼.”
“아냐. 아빠도 마셔. 그럼 푹 잘 수 있다잖아.”
사실 포션의 주요한 효과는 체력이나 마력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추가 효과인 악몽을 막아주는 효과 때문이었다.
다른 국가의 후보들이 나오기까지 경매가 끝난 자들은 이렇게 기다려야 했다.
마물의 시체는 죽이면 사라지지만 인간의 시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고개를 어디로 돌려도 보이는 끔찍한 시체들.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내장이 쏟아지고 팔, 다리…… 머리가 날아 간 시체들이 수두룩한 곳에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을 리 없었다.
‘언젠가 또 필요한 순간이 오겠지.’
단 한 번뿐일지 모르지만 평온한 잠을 잘 수 있다는 건 이 지옥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었으니까.
“조금 눈을 붙여.”
남궁은 딸을 안아주고는 코트로 그녀를 감쌌다.
그의 온기 때문일까, 아니면 탕약의 효과일까. 소민은 품에 안기자마자 금세 곯아떨어졌다.
‘고단했겠지.’
잠든 딸의 뺨을 손으로 가볍게 쓸며 남궁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 해냈어. 소민아.”
자신의 도움을 떠나서 이제 겨우 마력을 운용하는 법을 조금 깨닫게 된 그녀가 마물을 상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남궁은 딸이 한 발자국 더 이 세계로 들어 왔음을 느꼈다.
바라지 않았던 것이지만…….
해야 하는 일.
“푹 쉬어. 나머지는…….”
남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아빠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규류가 있었다.
* * *
[조심하십시오. 사실 인간이 여길 통과하는 건 처음이라……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요정계에 다녀온 모양인 듯 머리에 나뭇잎이 잔뜩 묻은 채로 돌아온 규류는 소환문 앞에서 말했다.
끼이익-
나무로 된 양쪽 문을 있는 힘껏 열자, 문을 경계로 안쪽에는 거대한 호숫가가 보였다.
“인간이 통과해도 괜찮아.”
걱정하는 그와 달리 규류는 잠들어 있는 딸을 안은 채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갔다.
[아하. 그렇구나. 괜찮구나…… 몰랐네. 하하.]
규류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솨아아악---!!!
문을 통과하자 상쾌한 바람이 그를 때렸다.
마력이 없는 그조차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괜찮네. 도시의 썩은 공기만 맡다가 이렇게 나오니 말이야. 지하상가같이 퀴퀴한 곳을 고른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지.”
[거기가 어때서요? 좋기만 하구만.]
규류는 남궁의 말에 피식 웃었다.
“흐음.”
호수를 바라보던 남궁의 시야에 조그만 개 동상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벽돌로 된 작은 교회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바운더리 개 동상과 선한 목자의 교회.
그것들을 보자 남궁은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테카포 호수…… 요정계가 아니군. 페어리 퀸이 직접 움직인 것은 아닌 모양이지?”
남궁은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소환문을 통해 이동 한 이곳은 요정계가 아닌 뉴질랜드 남섬에 위치한 테카포 호수였다.
[그럼요. 아무리 소민 양이 탐나도 그녀가 나서는 건 모양새가 나지 않으니까요.]
“그럼 여기에 있는 자는 누구지?”
[요정족의 3대 귀족 중 하나인 넬랴입니다. 참, 조심하십시오. 그녀는 요정족 중에서 유일하게 전투에 능한 자니까요.]
-쓸데없는 말 하지 마. 필요하지 않는 피를 흘릴 생각은 없어. 서로 존중을 해준다면 말이지.
그때였다.
목소리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도 아니었다.
-너희 야차처럼 우린 야만적이지 않거든.
마치 악기에서 들리는 음계의 소리가 변형되어 언어처럼 들리는 것처럼 작은 날개가 빠르게 흔들릴 때마다 요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하. 그렇구나. 그런데 어디서 얘기하는 거지?]
-……네 바로 앞이다. 이 머저리야.
[어이쿠!! 여기 있었네?]
규류는 눈앞에 넬랴를 두고도 계속해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놀란 듯 고개를 내리깔며 대답했다.
“쓸데없는 잡담은 나중에 너희끼리 하고. 넬랴라고 했나? 나는 분명 페어리 퀸과 거래를 원한다고 했는데?”
-당신이 남궁이로군.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회귀자 말이야.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지. 네가 믿고 싶으면 나는 회귀자인 거고 믿기 싫으면 아닌 거지.”
-모두가 당신을 흥미롭게 보고 있지. 위상들까지도 말이야.
“알고 있다.”
-자. 들어오게. 깊은 이야기는 이곳에서 하지.
넬랴는 날개를 퍼덕이며 호수의 옆에 있는 작은 교회로 들어갔다.
툭-
교회 안으로 들어가자 남궁은 가지고 있던 정령목을 꺼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천 년 이상 살았던 정령목이다. 세계수는 아니지만 요정계에 심으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다.”
-오…… 이거로군.
넬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남궁이 가져 온 정령목을 살폈다.
“정령목을 가공하면 좋은 아이템을 얻을 수도 있지만…… 이 자체로 땅에 심으면 순식간에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지. 한 달 정도면 충분히 요정들이 지낼 만한 크기가 될 거다.”
-신기하군. 당신, 요정계에 와보기라도 한 건가?
“그냥 들은 얘기일 뿐이다.”
-하긴 가본 적이 있다 해도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회귀자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니까.
“글쎄. 반대로 내가 회귀를 했다고 얘기해도 너희가 과연 믿을까?”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그래서 뭐라는 거야? 진짜 회귀를 한 거야, 아닌 거야? 도무지 감이 안 오는군…….’
거침없이 말하는 그의 태도에 오히려 넬랴는 당황스럽다는 듯 규류는 바라봤다.
[머리 굴려봐야 소용없어. 말발도 안 되는 게 남을 떠볼 생각 하지 말고 본론이나 얘기하지?]
-나는 신중한 것뿐이다. 너처럼 사기꾼인 인간의 세 치 혀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말이야.
[사기꾼? 일곱 뱀의 주인께서 그 얘기를 들으면 너를 모두 태워 버릴걸.]
-……여왕의 전언이다.
넬랴는 규류의 빈정거림에 살짝 눈을 흘기며 남궁에게 말했다.
-세계수 지팡이는 여왕족의 보구며 요정계를 지탱하는 원천이다. 당신의 딸, 남소민의 자질은 엄청나지만 계(界)의 존속을 걸 정도는 아니다. 거래는 불가하다.
“오해하는군. 세계수 지팡이를 완전히 달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지팡이를 대신할 정령목도 가지고 왔다. 1년 정도는 계를 유지하는데 무리가 없을 거다. 그 뒤에 지팡이를 돌려주마.”
-그 지팡이를 잃어버린다든지 훼손시키지 않는다는 보장은 누가 하지?
“내가 한다.”
남궁의 대답에 넬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 내게 그 말을 여왕께 보고드리란 말이냐? 이게 무슨 장난도 아니고…… 인간을 믿으라고?
“물론 믿거나 말거나지. 하지만 지금 그렇게 팔자 좋게 너희가 조건을 내세울 처지가 아닐 텐데?”
-……뭐?
“팔각 전쟁은 8개의 대리자 일족들이 치르는 전쟁이지만 사실 그 전쟁에 참가한 일족은 7개밖에 되지 않아. 시작되기도 전에 멸족해서 탈락한 종족이 있거든.”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남궁의 말에 넬랴의 얼굴이 굳어졌다.
“너희, 다음 문이 열리면 가장 먼저 탈락하게 될 거다. 조건 따위를 내걸 처지가 아니라는 거지.”
움찔-
“알겠나? 너희는 지금 우리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계약을 해달라고 빌어야 한다고.”
-미친…… 우리 요정족이 사라진다고? 헛소리하지 마. 당신은 계약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나 보군?
“물론 이것도 믿거나 말거나지만 말이야.”
-…….
넬랴는 그의 말에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조르디 랭스턴.”
그 순간 넬랴의 얼굴이 굳어졌다.
남소민 이전에 요정족이 눈여겨보고 있던 대리 경매의 후보자.
아무도 모를 그 이름이 남궁의 이름에 나온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포기하는 게 좋아. 그 사람 자살 할 거다.”
그 뒤의 말은 더더욱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다.
솨아아악---!!!
그때였다.
갑자기 교회 안으로 강렬한 바람이 일더니 빛 가루를 뿌린 듯한 영롱한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왔군.’
남궁은 그 소용돌이를 바라봤다.
-조금 전 그 말은 쉬이 넘기기 어렵군요. 다시 한번 제게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여, 여왕님.
넬랴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당신이 회귀자일지 모른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지금까지의 행보를 봐도 충분히 의심이 가는 일이지요.
웅웅…… 우우우웅…….
수많은 날개들이 파르르 떨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페어리 퀸의 등장과 함께 그녀를 호위하는 요정군들이 일제히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당신이 회귀자인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노여워 마십시오. 우리는 다만 당신의 말에 조금 더 믿음을 가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가 왜 자살을 하는지 알고 싶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당신의 딸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 뛰어난 마력의 자질을 가진 자입니다.
“그래. 그는 뛰어나지. 하지만 그가 나와 같은 아빠라는 점이 문제지.”
-설마…….
“딸을 잃은 아버지의 상심은 아무리 좋은 조건과 강한 힘을 가져도 무의미하니까.”
-조르디 랭스턴이 자살을 한다라…… 흥미로운 얘기군요. 그리고 저희에겐 썩 달갑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남궁의 말에 페어리 퀸의 얼굴이 굳어졌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믿거나 말거나야. 하지만 나라면 굳이 애매한 말보다 내 딸이 전설급 자질이라는 것에 더 중점을 두겠어. 굳이 그보다 못한 사람을 고를 이유는 없다 생각되는데.”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는 야차의 영역이 아닌 우리의 영역에 있는 자이니까.
요정족이 소민을 거절한 이유는 사실 그것이 컸다.
아시아는 야차의 관할이었고 요정족들의 행동엔 아무래도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설급 자질은 확실히 대단한 것이지만 어떻게 발전시키냐에 따라 성장의 결과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정족은 그만한 능력이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도 저희를 찾아온 것 아닐까요?
여왕이 대화의 주도권을 다시 잡으려는 듯 공격적인 태도로 말했다.
-만약 저희가 조르디 랭스턴의 딸을 보호한다면요? 그래서 그녀가 죽지 않는다면 그 역시 자살할 일도 없게 되겠죠.
“뭐, 그러던가. 할 수 있으면.”
-인간!! 기고만장이로군!!
-감히 여왕님께……!!
그 순간 뒤에 있던 나머지 2명의 요정족 대귀족들이 날개를 파르르 떨며 소리쳤다.
-여…… 여왕님.
하지만 그때였다.
넬랴가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죠?
-방금 1차 경매가 종료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안색을 살핀 여왕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조, 조르디 랭스턴이 죽었습니다.
-……!!!!!!
넬랴의 보고에 여왕뿐만 아니라 모든 요정족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장 선두에서 마물을 사냥하고 있었는데!
-사냥에 실패를 한 건가?
-어떻게 이런 일이…….
여왕의 물음에 넬랴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냥은 성공했습니다. 보스룸에서 가장 높은 기여도를 달성하며 보스를 죽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왜?
-마물에게 당한 게 아니라…….
그 순간 넬랴는 힐끔 남궁을 바라봤다.
-자살이라고 합니다.
-…….
그의 대답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들의 침묵 속에서 그저 남궁의 피식거리는 웃음소리만이 옅게 들릴 뿐이었다.
-말도 안 돼. 조르디 랭스턴의 딸의 죽음이…… 바로 지금이라고?
-그녀는 경매에 참가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세상이 지랄 맞게 변했다 다들 원망하지만, 사실 원래 우리가 살던 세상도 썩 훌륭했던 건 아니니까.”
-……뭐?
“아마도 뉴질랜드가 전 세계 중에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나라 중 하나일 거야. 조르디 랭스턴의 집이 아마 식료품 가게를 하고 있었지? 때로는 마물보다 사람이 무서울 때도 있지.”
-그, 그럴 수가.
뉴질랜드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폭동.
그리고 그 화마에 휩쓸려 죽은 조르디 랭스턴의 딸과 그 소식을 접하게 된 그의 말로.
“죽음은 느긋하게 사정을 봐주면서 찾아오는 게 아냐. 10년 뒤 일수도 있지만 바로 고개를 돌렸을 때 네 뒤에 있을 수도 있지.”
오싹-
남궁의 말에 요정족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요정족이 팔각전쟁에 참여하지 못했던 건 요정족의 계약자인 조르디 랭스턴이 죽어서가 아니야. 조르기 랭스턴과 계약 자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후보자를 잃은 요정족은 결국 남아 있던 자들 중에서 계약자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남아 있던 자들은 모두 조르디 랭스턴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자들뿐.
요정족의 멸족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꿀꺽-
여왕은 조심스럽게 남궁을 바라봤다.
“이제 마음이 좀 바뀌었나 보지? 뭐, 나 역시 요정족과의 계약은 바라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 그럼 지금 당장…….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아냐. 서로의 위치를 이제 받아들인 것 같으니까.”
-……네?
“그럼 조건도 바뀌어야지.”
하지만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남궁 역시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이제 지팡이 하나론 부족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