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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69/270)

69화

“대리자 일족이 우(无)에게서 태어났다고?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데? 규류 녀석은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남궁의 물음에 여왕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계약자는 기껏해야 무휘의 둘째일 뿐이니까요. 일족의 장(長)도 아닌 어린아이가 이런 비밀을 알 리 없지요.

그녀의 대답에 남궁은 눈을 흘겼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위상들도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오히려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겠지요. 그들은 이 세계를 관장하는 자들인데요.

“흠…….”

남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들을 의심하기엔 이릅니다. 아이러니하지만 위상은 저희보다 인간과 닮았습니다.

“무슨 뜻이지?”

-그들도 수명이 있고 시대를 거듭하며 과거의 위상은 역사로 사라지고 현재의 위상이 지금의 카니발을 진행하지요.

그녀가 말했다.

-탄생과 죽음의 반복. 인간들 역시 새로인 세대가 태어나고 과거의 세대가 사라지지 않습니까.

“너희는 다른가?”

-저희 역시 탄생과 죽음은 똑같습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세계가 구성되기 위한 가장 절대적인 규율이니까요. 다만…… 저희는 새로운 세대를 위한 전승(傳承)이 존재합니다.

“전승이라면…….”

-네. 일족의 족장이 되면 기억을 이어받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요정족이 만들어지던 그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남궁은 그녀의 말에 조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카니발에 대해서 위상들보다 대리자 일족의 수장들이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재밌는 사실이었다.

요르의 말처럼 카니발은 오랜 세월 계속해서 반복되어 왔고, 우(无) 말처럼 과거의 카니발을 겪었다면 현재의 카니발도 유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다.

‘우(无)는 내게 내가 알고 있는 25년의 미래가 끝이 아니라 했다. 카니발은 그 이후에도 25년간 더 진행될 거라고 했지.’

남궁은 생각했다.

어쩌면 대리자 일족들의 수장들은 그 50년의 역사를 모두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 내게 지우게 할 빚이라는 것이 뭐지?”

-3번째 문이 열렸을 때의 일입니다.

“잠깐. 그걸 말하는 건 미래를 언급하는 것 아닌가? 다른 위상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리 큰 문제는 아닙니다. 어차피 예지 능력을 가진 계시자도 있고…… 그리고 이건 미래에 일어날 일은 아닙니다.

“그럼?”

-단지, 저희들의 계획을 얘기하는 것뿐입니다.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아마 다른 대리자 일족들도 3번째 문이 열릴 때 자신의 계약자에게 언질을 할 거라…… 위상들은 저희들의 계획을 이용하려 할 테니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

“흐음. 무슨 계획이지?”

-3번째 문이 열리면 적색지대라는 하나의 섬이 생깁니다. 그곳엔 여러 가지 마물들이 서식하고 있고, 참가자들은 이제 그곳에서 마물을 사냥해야 합니다.

남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알고 있었던 이야기이기도 했기에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그곳엔 3개의 안전 구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8개의 던전이 있지요.

“그렇다면 일단 안전 구역에 거점을 둬야겠군.”

그녀의 말에 남궁이 대답했다.

3개의 거점 중에 하나를 먼저 쟁취하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으니까.

-글쎄요. 모른 척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정말로 모르시는 건가요. 거점을 세우게 되면 어떻게 될지 말입니다.

그녀는 3개의 손가락을 펼치면서 말했다.

-위상은 8명. 대리자 일족 역시 8종족. 그런데 어째서 안전 구역은 3개일까요.

“……무슨 뜻이지?”

-그 의미를 잘 파악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저도 인정합니다. 이 축제는 가혹하죠. 안전하고 싶다는 욕망은 언제나 인간을 유혹합니다.

여왕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도 잘 알 겁니다. 안전하게 있어서는 결코 이 축제를 즐길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축제를 즐겨? 그 말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군. 즐기는 건 너희들이나 해.”

남궁은 그녀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넬랴의 보고와 함께 그는 소민과 함께 차원문을 넘었다.

-쯧, 저 남자…… 끝까지 오만하군요. 여왕께서 진언을 했는데 말입니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남궁이 차원문을 통과 하자 넬랴는 못마땅하다는 말했다.

-글쎄. 나는 달리 보는데.

-어떻습니까?

-내 눈엔 오히려 눈치를 채고 서둘러 떠난 것 같은걸. 위상들의 시선을 알고 있으니까.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하는 것이겠지.

-그럴까요?

여왕은 넬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웃었다.

-넬랴. 당신도 이제 좀 더 인간을 탐구해야 할 때가 온 것 같군요. 요정족은 지금까지 항상 나가 일족에게 열세에 있었지만…….

등 뒤에 날개가 마치 그녀의 기대감을 대신 말해주는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이번에야말로 그들에게 빼앗긴 호수를 되찾을 기회가 될 것이다.

넬랴를 비롯한 나머지 귀족들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제 대리 경매는 어떻게 되는 거지?”

[뭐, 야차 일족은 남궁 님을 앞세우며 경매 포기를 선언할 겁니다. 요정족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차원문을 넘자 남궁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으윽…….”

그의 뒤에 있던 소민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건 그들이 돌아온 장소가 조금 전 경매가 끝났던 세빛섬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릿한 핏물의 냄새는 가시지 않았고 시체들 역시 그대로 남아 있었다.

따스했던 요정계와는 달리 끔찍한 광경에 다시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

남궁은 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돼요?”

소민이 규류에게 물었다.

[하하, 좋은 질문입니다. 지금 참가자들은…… 야차 일족이 주관하던 경매였는데 경매 자체가 사라지니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규류가 여기저기 너부러져 쓰러진 사람들을 훑으며 말했다.

[2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생존 게임을 해서 후보를 뽑아 개인적으로 마지막 경매까지 도전을 하든지…… 아니면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가던지요.]

“도,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부탁입니다!!”

규류의 말을 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은 몰려들며 소리쳤다.

[흐암…… 뭐, 아무래도 후자겠군요. 운이 좋은 거죠. 남궁 님과 소민 양 덕분에 저들은 죽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요. 아마…… 대리 경매 역사상 가장 많은 생존자를 남긴 게 아닐까요?]

그의 대답에 소민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른 이들도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에 이제야 안도를 한 듯 보였다.

“아빠, 저 사람들 아빠가 구한 거야.”

소민은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그에게 확신을 주듯이 말했다.

“고맙다.”

딸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남궁이었기에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들은 돌려보낸다고 했고…… 그럼 우리는?”

[일 처리가 끝나고 발표가 있고 나면 소민 양은 집으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남궁 님은 저와 함께 야차계에 잠시 들르셔야 하고요.]

“무휘를 만나는 건가.”

[네. 남궁 님은 사실 저의 계약자였을 뿐이라 아직 야차 일족의 정식 계약자가 된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군.”

쿠웅---!!!

그때였다.

지진이 난 것처럼 지면이 거칠게 흔들렸고,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수십 명의 야차들이 일제히 발을 굴리며 나타났다.

“소민아.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어. 곧 갈 테니까.”

“응.”

그녀는 오히려 남궁이 걱정하지 않도록 담담하게 대답했다.

딸이 이런 세상으로 인해 성숙해져 버리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남궁 역시 딸의 배려를 알기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노려볼 필요 없다. 이제 한배를 탄 거잖아. 안 그래?”

[…….]

남궁은 모여든 야차들 중 가장 앞에 있는 현류를 지나치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그냥 넘길 것 같아?]

“페어리 퀸이 내 딸을 계약자로 맞이하면서 세계수 지팡이를 줬지.”

[그게 뭐?]

소환문을 넘기 직전 남궁은 고개를 돌려 현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가 생각해야 할 건 날 받아들이고 안 들이고가 아냐. 얼마나 내 마음에 드는 조건을 찾아내느냐지.”

[키킥-]

구겨지는 현류의 얼굴이 마음에 드는지, 규류는 무릎까지 꿇을 기세로 남궁과 함께 문을 향해 걸어갔다.

* * *

[자네로군. 위상을 가지고 노는 회귀자. 혹은…… 회귀자인 척하는 사기꾼.]

남궁은 눈을 떴다.

계(界)를 연결한 문이 사라지며 빛 가루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는 뒤편에, 마치 동굴 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거칠게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덩굴처럼 덥수룩하게 자라난 턱수염과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

‘무휘…….’

규류의 3배는 될 것 같은 엄청난 크기.

‘오랜만이군.’

남궁은 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야차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페어리 퀸의 전갈을 들었다. 그런데 조금은 아쉬운걸. 이런 일이 있었다면 내게 먼저 얘기를 하는 게 맞지 않느냐.]

흠칫-

규류는 무휘의 말에 움찔거리며 남궁의 뒤에 숨었다.

“내가 요정계부터 가자고 했다. 딸아이의 안전부터 생각하는 게 아비 된 자로서 해야 할 일이니까. 나야 뭐…… 당연히 계약을 할 거잖아? 안 그래?”

[크, 크하하하!!]

남궁의 물음에 무휘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마치 천둥이 울리는 것 같았고, 주위에 있던 야차들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페어리 퀸에게 차분함이란 걸 좀 배워야겠군.”

[속과 겉을 알 수 없는 날파리 같은 종족보다야 이쪽이 낫지. 여왕이 세계수 지팡이를 줬다고?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다.]

“흐음, 그건 동감.”

무휘는 더욱더 남궁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래. 너는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

“그건 내가 당신에게 물어야지. 요정은 마법에 능하지. 그렇기에 세계수 지팡이를 내 딸에게 내어줬다. 그럼 야차는 무엇에 능하지?”

[허허, 요놈 봐라……?]

“자신 있는 것을 내어봐. 결정은 내가 할 테니.”

[재밌는 놈이로구나.]

그 순간 무휘의 눈동자가 마치 당장에라도 불타는 것처럼 붉게 변했다.

무휘의 시선이 닿자 남궁은 마치 사슬로 온몸을 조이는 것처럼 저릿저릿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 이거지.’

씨익-

하지만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남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대리자 일족들은 저마다 고유의 능력을 가지고 그 힘을 계약자에게 빌려준다.

가령 요정족이 마력을 다루는 것처럼, 야차 역시 그들만이 가진 능력이 있었다.

‘투기(鬪氣).’

가장 압도적인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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