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오셨습니까!!]
탑의 상층의 문을 열자 마치 다른 세상인 것처럼 광활한 대지가 펼쳐졌다.
고대 연무장을 연상케 하는 흙바닥 위에서 술법을 수련하던 규류가 남궁을 보더니 소리쳤다.
[무엇을 고르셨습니까?]
쪼르르 달려와 그가 남궁의 손에 있는 비급서를 살폈다.
[역시!! 역진경을 고르실 줄 알았습니다. 암요. 저희 아버님도 대단하지만 사실 무량의 술법을 따라갈 순 없지요.]
규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의 술법도 결국은 역진경에서 나온 것이니까요. 역진경을 익히는 건 모든 야차술의 기본을 익히는 것과 같습니다.]
철컥-
남궁이 비급서 위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잠금쇠가 풀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결계가 하나 씩 해체되었다.
[오오…….]
새하얀 빛과 함께 결계가 사라지자 눈앞에 나타난 비급서를 보며 규류는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드디어……!]
비전서의 모습이 서서히 나타나자 그는 벌써 감개무량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크, 내 평생 무량의 술법을 볼 수 있다니…… 진짜 제가 계약자 하나는 기가 막히게 구했다니까요…….]
부욱-
그때였다.
[……어?]
남궁이 들고 있던 【역진경】의 표지를 있는 힘껏 찢었다.
[자, 자, 자자자자자……!! 잠깐만요!!]
그 광경에 사색이 된 얼굴로 규류가 소리쳤다.
[야이, 이 미친 인간아! 내가 진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주먹질을 하는 게 싸했어! 지금 무슨 짓을 한지 알기나 해?!]
규류는 너덜너덜해진 비급서의 표지를 보며 남궁에게 소리쳤다.
“시끄럽다. 조용히 해.”
하지만 그런 그에게 남궁은 찢은 표지를 던졌다.
툭-
규류의 이마에 맞고 떨어진 비급서의 찢긴 표지가 바닥에 닿았다.
[……어?]
공중에서 빙그르르 돌며 떨어진 표지가 뒤집어지며 안쪽 페이지가 보였다.
[무아경(無我經)?]
그 순간 규류는 안쪽 페이지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역시.”
남궁은 그 광경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게 뭔가요?]
“무량의 아들, 무명의 술법이야.”
[……!!!]
남궁의 말에 규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 진짜입니까? 사라진 무명의 술법이…… 설마 여기 통천루에 있었단 말인가요?]
“그래. 지금 눈앞에 보고 있잖아.”
[미친…… 이건 진짜 엄청난 일이라고요!! 당장 아버님께 알리겠습니다!!]
규류가 연무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가긴 어딜 가? 넌 어서 투갑술을 익혀서 내 상대가 되어줘야 하잖아.”
[네? 하지만…….]
“규류, 확실히 너는 때 묻지 않은 녀석이야. 뭐, 그래서 널 좋아하는 것이지만.”
[……절 좋아하신다고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남궁은 규류의 대답에 피식 웃었다.
“한번 생각해 봐. 무명의 술법이 남아 있다는 걸 알면 야차들의 반응이 어떨지.”
[그야 당연히 저처럼 좋아하겠죠. 역진경을 무너뜨린 유일한 술법이잖습니까. 명실공히 최강의 술법이라고 할 수 있습죠!]
“그게 문제야.”
[문제라뇨?]
“지금 수장인 무휘의 술법은? 그 역시 역진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규류는 남궁의 말에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에이, 고작 그런 걸 걱정하신 겁니까? 남궁 님은 아무래도 저희 아버님을 모르셔서 그러는 겁니다. 아버님께서는 남궁 님께서 무명의 술법을 익힌다 하더라도 시기하지 않으실 겁니다. 오히려 적수가 나타났다고 좋아하실걸요?]
“좋아하겠지. 무휘라면 말이야. 하지만 그 위의 자들은?”
[위라 하시면…….]
“장로들.”
남궁이 그를 바라봤다.
“야차는 그 누구보다 약육강식의 규율을 따르는 자들이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 생각은 무뎌지고 욕심이 생기지. 만약 인간인 내가 일족의 수장인 무휘의 술법을 깰 수 있는 힘을 가졌다면?”
[……장로들이 달갑게 볼 리가 없지요.]
그 순간 규류는 반박하지 못했다.
[하, 하지만 그 노인네들이 남궁 님을 어찌하진 못할 겁니다! 아버님께서 그리 놔두지 않으실 테니까요.]
“그렇겠지. 아무리 장로들이라 해도 계약자인 내게 위해를 가하진 못하겠지. 하지만 그들이 노리는 건 이거, 무명의 술법이야.”
남궁이 비전서를 보이며 말했다.
“폐위된 수장의 술법. 당연히 술법도 폐기시켜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할 거야. 무휘도 그들의 말을 쉽게 무시할 순 없겠지.”
[으흠…….]
“설령 폐기하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인간인 내가 이 술법을 익히게 놔두진 않을 거야.”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야차인 네게 묻겠어.”
[네? 저, 저요?]
남궁은 당황해하는 그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명의 술법을 보고 싶지 않나?”
[그거야 당연히…….]
“하지만 이걸 보고하는 순간 영원히 이 술법을 볼 수 없을 거야.”
꿀꺽-
남궁의 말에 규류는 본능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뜸들이지 마시고 하시고 싶은 얘기를 하시죠.]
이미 마음을 먹은 듯한 그에 물음에 남궁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공범이 될 생각 없어?”
촤르르륵……!!
남궁이 【역진경】을 뒤집자 그 안에 새겨진 글자들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무명은 수장의 자리를 내려놓고 종적을 감췄지. 세간의 평가는 그가 아비를 죽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친 것이라 했다.”
치직…… 치지직…….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역진경】 안의 글자들이 허공에 떠오르며 새로이 조합되기 시작했다.
“그가 특이했던 걸까? 그 어떤 야차도 그런 감정을 가지지 않는데 말이야.”
[그럼…….]
“그는 누구보다 호승심이 강한 자였다. 그렇기에 아무에게나 자신의 술법을 전승시키고 싶었을 리 없어. 그런 그가 선택한 방법은…….”
촤아아악……!!
남궁이 비급서의 나머지 페이지까지 모두 찢었다.
“무명은 죄책감으로 사라진 게 아니야. 그는 너희들에게 묻고 있었던 거야.”
[저희들에게요?]
“최강의 술법이라고 여겨지는 역진경은 무명의 술법에 의해 더 이상 최강이 아니다. 최강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그걸 그냥 익힐 것인가?”
솨아아악---!!
찢어진 페이지들이 다시 맞춰졌고 허공에 새로이 조합된 글자들이 그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역진경】의 궤가 새로이 만들어집니다.
수장들은 고민했을 것이다.
과연 자신이 무량의 술법보다 더 높은 술법을 만들 수 있을까?
아니면 검증된 강력한 술법을 익히는 것이 좋을까.
결국 지금껏 모든 수장들은 결국 역진경을 기반으로 자신의 술법을 만들었다.
“아마 무명은 그런 자들을 비웃고 있을 거다.”
▶ 봉인된 【무아경】이 당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안주한 자는 가질 자격이 없다.”
꽈악-
남궁은 자신의 앞에 새로이 만들어진 검은 비급서를 움켜잡으며 말했다.
“최강의 야차술을 말이야.”
▶【무아경】을 습득하시겠습니까?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가 통천루에 간 지 얼마나 되었지?]
[이제 3일째입니다.]
[크흠…….]
[왜 그러십니까?]
현류는 턱을 괴며 한숨을 내쉬는 무휘를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그에게 통천루의 열람 기회를 주신 것이 후회되십니까? 하긴, 장로들이 그 얘기를 듣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규류까지 그 안으로 들여보내시다니요.]
[머저리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너는 네 아비를 고작 그 정도로 보느냐.]
오싹-
그 순간 현류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네?]
[내가 고작 그런 잡음이 두려웠다면 애초에 그들을 통천루에 들여보내지 않았을 거다.]
[죄송합니다…….]
만약 그의 발이 지면에서 떨어졌다면 무휘의 주먹이 날아왔을 것을 알고 있는 현류는 고개를 숙였다.
[그자는 내게 통천루를 열어주면 티탄의 심장을 뽑아주겠다고 하더군.]
[티, 티탄? 거인족의 수장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다.]
[당돌하다 못해 어이가 없는 놈이군요. 고작 인간 따위가 일족의 수장을?]
[그래서 궁금한 거다. 통천루 안에 있는 술법들은 나 역시 모두 알고 있는 것들이지. 그 술법들 중 과연 무엇을 익혀 티탄을 잡겠다는 것인지…….]
무휘는 창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탑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단지 이 기다림이 너무 무료하구나.]
콰아아아앙---!!!
그때였다.
통천루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무휘의 눈이 커졌다.
[무, 무슨…… 여봐라!! 당장 상황을 살피고 오거라!!]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통천루의 상층을 보며 현류가 소리쳤다.
[됐다. 저 정도로 부서지지 않는다.]
[하, 하지만…….]
[조용히 하거라. 지금이야말로 내가 아주 기대했던 순간이니까 말이지.]
무휘의 입꼬리가 올라가자 맹수와 같은 거대한 송곳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흉차를 가지고 오너라.]
[……네?]
현류는 전쟁에서나 사용하던 무구를 가져오라는 무휘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티탄에게 보내기 전에 내가 직접 확인을 해야겠다. 과연 얼마나 강해졌는지.]
현류는 저렇게 환히 웃는 무휘의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자가 아버지의 마음에 불을 지핀 모양이구나.’
야차 일족의 장로들은 하나같이 그를 칭송했다.
역대 야차들 중 무휘만큼 무량의 술법을 완벽하게 이해한 자는 없다고 말이다.
사실 진즉에 수장의 자리를 내어 줬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가 수장의 자리에 있는 것은 누구도 그에게 도전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무량의 재림이라 칭송받는 그는 어쩌면 그 삶마저 무량과 닮았다.
도전자가 없는 고독감.
[크…… 크큭.]
하지만 현류는 그 웃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는 기분이었다.
‘……저런 괴물을 상대한다고?’
자신은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이었다.
‘역진경은 최강이다. 그 역진경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이 아버님의 술법이다. 통천루에서 뭘 익혔다 해도 아버님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어.’
쿠웅-
홀의 문이 열리며 야차들이 두터운 건틀릿을 가져왔다.
무휘의 전용 무기, 【흉차】
한쪽의 무게만 해도 어마어마해서 3명의 야차들이 붙어 낑낑거리며 간신히 들고 왔다.
철컥-
그런 엄청난 건틀릿을 무휘는 아무렇지 않게 들어 양팔에 장착했다.
‘남궁…… 네놈 때문에 내 계획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규류 놈에게 기회마저 빼앗겼으니까.’
현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오늘 초상 한번 치르겠군.’
[가자.]
그의 말에 위풍당당한 무휘의 뒤를 야차들이 일제히 따르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행여나 네놈이 아버님을 이기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목숨을 바쳐서 널 따르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