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새로운 지점의 문이 열렸습니다.
▶ 모든 참가자들은 카니발의 새로운 쉼터에서 많은 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적색지대(赤色地帶)가 곧 개장합니다.
▶ 그곳에서 마물을 사냥하고 힘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쏟아지는 빛은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거리였지만 그 빛을 본 사람들의 머릿속에 적색지대의 모습이 각인되기 시작했다.
“……시작이네요.”
명훈은 남궁이 건넨 검을 움켜잡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아마도 그의 머릿속에도 이제 적색지대의 정보가 주입된 모양이었다.
“저기 푸른빛의 기둥들이 적색지대로 갈 수 있는 포탈인가 봅니다. 빌어먹을 놈들…… 당장에라도 가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일 처리 하나는 더럽게 빠르네.”
적색지대로 갈 수 있는 포탈들이 도시 곳곳에 열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지역이 나온다고?”
“……특종이다.”
“빨리 철수해!!”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집 앞에 몰려 있던 기자들이 너도나도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머릿속에 정보가 다 주입되는데…… 기사 내봤자 무슨 의미지?”
지하실 거점에서 올라온 호준이 기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아직까지 일상을 버리지 못한 거지. 아니면…… 붙잡고 싶은 걸 수도. 갇혀 있느라 고생했다.”
“고생은요. 아무래도 무너진 집을 다시 고쳐야겠습니다. 기자들이 왜 부서진 집에 있는지 의아해하더라구요.”
“뭐, 곧 저런 사람들은 사라질 테니까. 집을 다시 지어봤자 금방 또 무너질걸.”
“하긴, 그렇네요.”
남궁의 말에 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지하실 문이 열리고 소민과 성우가 달려왔다.
“오셨어요?”
“그래. 다들 잘 지냈지?”
품 안으로 달려드는 소민이를 안으며 남궁은 성우를 바라봤다.
“……흠?”
그 순간 그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헤어진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는데 뭔가 주눅 든 모습이 아닌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표정이 괜찮은데. 명훈이랑 호준이에게 받은 훈련이 도움이 되었나 본데?”
“네. 두 분께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형님. 이 녀석, 생각보다 물건입니다. 언젠가 한 번 데려가시죠.”
“그래?”
“나중에 직접 보십시오. 어쩌면 우리들 중에 가장 쓸 만한 녀석일지도 모르니까요.”
호준이 꽤나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대해보지.”
“네.”
성우는 남궁의 말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법 변했군.’
예전까지만 하더라도 성우의 주위엔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최고라 여겼다. 하지만 그 자심감은 남궁을 만나면서 산산조각 났고 성채에 왔을 때 완전히 사라졌다.
자신보다 강한 사람들 투성이었으니까.
‘애들은 빨리 변한다지만…….’
영종도에서 데리고 온 지 얼마 되지 않는데 변화가 눈에 보였으니 남궁으로선 기쁠 따름이었다.
그러자 성우는 확실히 지금까지와는 달리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네게 도움을 구할 때가 있을꺼다. 기대하마.”
“알겠습니다.”
남궁의 한 마디에 성우는 자신감으로 가득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적색지대가 열리면 본격적으로 계시자들의 활동이 시작될 거야.”
“계, 계시자…… 그들과 싸워야 하는 걸까요?”
“방해한다면. 열에 아홉은 그렇겠지만.”
성우의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남궁은 말을 이어갔다.
“지금까지는 마물이 도시에 소환되었으니 숨죽이고 있던 나머지 계시자들도 사냥이 가능했겠지만 새로운 지역이 열린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음지에서 나올 수밖에.”
“계시자들이 모인다라…… 각종 클랜과 연합까지 그곳을 노릴 테니. 그야말로 난전이 되겠군요.”
“알렉 트라만이 3개의 안전 구역 중에 어디에 거점을 삼는지가 중요하겠네요. 누가 뭐라 해도 결국 그자의 유니버스가 현시점에서 가장 거대하니까.”
영국을 기점으로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 알렉 트라만은 유럽 각국의 능력자들을 영입해 클랜 【유니버스】를 창설했다.
“아마 이미 적색지대에 가 있을 가능성이 높아. 안전 구역이 있다는 정보가 머릿속에 주입되었으니까.”
“그렇겠군요. 그럼 저희는 나머지 두 곳 중 하나에 자리를 잡으면 될까요? 아무래도 알렉과는 껄끄러우니까요.”
명훈이 물었다.
하지만 그의 물음에 남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너희는 녀석이 있는 곳에 갈 거야.”
“괜찮을까요? 괜히 마찰이 생기면…….”
“일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적색지대에서 해야 할 일 말이야.”
“으음…… 거점보다 더 중요한 걸 빼앗겠다고 하셨죠.”
“맞아. 그렇다면 대신 거점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지. 지금 상황에서 알렉 트라만만큼 믿을 만한 방패막이가 또 있을까?”
남궁은 자신의 말을 잊지 않고 있는 명훈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물이 가득한 적색지대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안전 구역에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어. 하지만 그 때문에 다들 핵심을 놓치고 있지.”
“핵심이라면?”
“지금까지 우리는 2번의 문을 겪었다. 문을 닫기 위한 조건은 3번째도 똑같아.”
“보스 몬스터를 사냥해야 하는 것이군요.”
“안전 구역을 확보하는 것으로는 적색지대를 클리어할 수는 없어.”
“으음…… 저희들끼리 가능할까요? 3번째 문이면 사실 지금까지 마물들보다 더 강할 텐데.”
명훈은 그의 말에 조금은 자신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거야. 그게 바로 모두가 가진 착각이지.”
“……네?”
“시간이 지나면 녀석들도 알게 되겠지만…… 그때 가서는 너무 늦어. 오히려 지금이 보스를 사냥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거든.”
마물의 섬, 적색지대.
그곳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끊임없이 다양한 마물이 소환된다.
“제일 처음 소환되는 마물은 고블린.”
가장 쉬운 마물이지만 놀랍게도 적색지대에서 사냥한 마물에서 드랍 되는 아이템들은 지금까지의 것들보다 훨씬 좋았다.
처음에는 기회의 땅처럼 보였던 그곳에서 사람들은 갈수록 강해지는 마물의 난이도에 절망한다.
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아마…… 적색지대에 미노타우르스가 소환되었을 때였을 거다.’
보스 몬스터, 모울.
놈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놈의 정체를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작은 체구.
연약해 보이는 모습.
하지만 그 마물은 이제 조금 강해졌다고 자만에 빠져 있던 사람들을 그야말로 뭉개 버렸다.
“적색지대의 보스 몬스터는 고블린이야.”
“고블린이요? 1번째 문이 열렸을 때 나왔던 그 작은 마물들 말입니까?”
“그래. 적색지대에서 가장 처음 소환되는 마물이기도 하지.”
“설마…….”
“응. 보스 몬스터는 고블린이 소환될 때 함께 소환된다. 그리고…….”
적색지대의 이면.
“그곳에서 강해지는 건 인간만이 아냐.”
단순히 마물을 사냥하는 것만으로는 이곳을 끝낼 수 없었다.
“안전 구역이든 뭐든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해. 너희는 녀석들이 시간 낭비하기 전에 모울을 사냥한다.”
놈이 강해지기 전에.
“타임 어택(Time Attack).”
그것이 적색지대의 공략법이었다.
“형님, 그런데 아까부터 왜 자꾸 너희라고 말씀하십니까? 꼭 같이 가지 않으실 것처럼.”
눈치 빠르게 남궁의 말을 듣던 명훈이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맞아. 난 안 갈 거야. 적색지대는 너희끼리 공략을 하도록 해.”
“네?! 저희끼리요? 형님은요?”
“나?”
그 순간 남궁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집 지켜야지.”
* * *
“영종도의 있었던 일은 보고받았습니다. 천일회뿐만 아니라 삼합회까지 관련된 일이었다니…… 큰일을 막았군.”
“그런 노고를 생각하신다면 기자들 정도는 미리 정리를 좀 해주셨으면 좋지 않았습니까.”
“하하. 미안하게 되었네.”
창밖으로 적색지대의 출몰을 알리는 푸른 포탈을 바라보던 국무총리 서재욱은 남궁의 말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혼란한 상황이니까. 일부러라도 이슈가 필요했네. 대통령마저 잃은 한국은 국민들에게 불안할 수밖에 없는 나라니까.”
그는 이해해 달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남궁은 그런 그를 차갑게 바라볼 뿐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앞으로 여러 사람들의 타깃이 될 수밖에 없을 걸 세.”
“총리께서는 일전의 대화에서 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셨나 봅니다. 제 딸을 정치에 쓸 생각이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
총리는 남궁의 말에 웃던 표정을 감추었다.
“그 자리를 내어주는 것 이상으로.”
“……주의를 시키도록 하지.”
“너무 몰아세우지 마시죠. 총리께서도 최대한 소민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당분간 거점을 떠나 안전가옥에 있으라고 제안을 했었습니다.”
그때였다.
남궁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해서 경찰들을 배치한 것도 총리께서 지시하신 일입니다.”
“쿠후란의 가르침이 대단했나 보네. 자신감 좀 붙었나 보지? 보자마자 내게 말대답을 하다니. 박효주.”
그는 그녀를 살폈다.
“내가 지금 부탁하는 거로 들려?”
아이슬란드로 떠나기 전보다 확실히 뭔가 각이 잡힌 모습에, 그녀가 한층 더 발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떨궜다.
남궁의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단단한 사슬이 전신을 휘감아 조이는 기분.
‘더 강해졌어.’
그의 말대로, 우습지만 아이슬란드에서 돌아왔을 때만 하더라도 조금은 자신감이 생긴 그녀였다.
하지만 남궁을 본 순간 그 자신감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나 실감할 수 있었다.
“네게 실망이군. 자아도취를 할 시간 동안 좀 더 확실한 처리를 하길 바랐는데.”
“제가 실수했습니다.”
그동안 함께했던 시간들 때문일까.
조금은 남궁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던 박효주는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보같이…… 그가 딸과 관련 된 일에서 만큼은 양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너무 허술했어.’
“음음, 이번엔 내가 박 팀장의 변호를 해야겠군. 그녀를 너무 나무라지 말게. 어젯밤에 귀국했으니까. 거의 자네와 비슷하게 상황을 보고받았을 걸세.”
“그럼 책임은 모두 총리께 있는 거군요. 앞으로도 말입니다.”
“허허, 주의하겠네.”
총리는 남궁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번 새겨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와서 인천 일 때문에 부르신 건 아닐 테고. 본론부터 나누죠.”
“다름이 아니라 자네를 부른 건 3번째 문이 열린 적색지대 때문일세. 이미 한 곳은 알렉 트라만의 유니버스 클랜이 자리를 잡았고 나머지 두 곳이 비어 있는데…… 박 팀장을 필두로 이번에 전담팀을 파견해 볼 생각인데 어떤가.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군.”
“어디로 보내실 생각입니까?”
“아무래도 마물을 사냥하려면 유니버스 클랜 이외에 다른 곳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래도 경쟁이 덜하지 않겠나.”
“전 안 갑니다.”
“……뭐?”
총리의 말에 남궁은 피식 웃었다.
“그냥 집이나 지키시죠. 어떻습니까?”
“……뭐?”
“알렉 트라만이 뽑은 정예와 이제 막 창설된 전담팀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들은 알렉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능력뿐만 아니라 장비도 수준이 다르니까요. 하지만 이쪽은요? 어정쩡한 상태로 가봐야 오히려 죽임이나 당하겠죠.”
“말이 과하군. 그럼 우리는 집 지키는 개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강해지는 걸 구경만 하라는 겐가?
냉정한 그의 평가에 총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 집 지키는 개가 되십시오. 이제 막 신설된 팀원들이 부족하다는 건 누구보다 팀장인 그녀가 더 잘 알 겁니다.”
남궁이 박효주를 바라봤다.
“한 가지 묻지. 참악 부대에 너와 비슷한 수준을 가진 자들이 있나?”
“……없습니다.”
“알렉 트라만은 저보다 강합니다. 그는 위상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저들을 끌고 가봐야 일주일이나 생존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래서 자네에게 묻는 것 아니겠는가. 유럽을 비롯해서 강대국들이 속속들이 세를 구축하고 있다네. 이런 상황에서 적색지대 공략에 손을 뗀다는 건…… 너무 뒤처지는 일이지 않겠나.”
총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걱정 마십시오. 저도 적색지대에 안 갈 겁니다.”
“그, 그게 무슨……?”
남궁의 대답에 총리뿐만 아니라 박효주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차라리 뒤처지는 게 나을 때도 있습니다. 욕심을 부려 죽는 것보다 말입니다.”
“으음…….”
하지만 총리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치였다.
“뒤처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물을 사냥해서 얻는 아이템보다 이곳에서 훨씬 더 값진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그게 뭔가?”
“여론(輿論)입니다.”
“……여론?”
“때로는 말이 칼보다 무서운 법이죠. 강대국들이 어째서 적색지대에 목숨을 거는지 아십니까?”
“으음.”
총리는 그의 물음에 잠시 고민을 했다.
“선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맞습니다. 지금까지 2번의 보스 몬스터를 한국에서 사냥했습니다. 세간이 한국을 주목하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조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궁은 두 사람을 바라봤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위상은 결코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주입된 정보를 믿지 마십시오. 놈들은 언제나 얄팍한 말장난으로 인간의 심장을 찌르니까요.”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3번째 지옥문을 열면서 우리에게 정보를 주었죠. 적색지대에 마물이 나온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적색지대에만 마물이 나온다고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
그의 말에 총리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군산, 대구, 포항.”
남궁은 접견실 벽에 걸려 있는 지도에 걸어가 그곳들을 손가락으로 집으며 말했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적색지대는 기회의 땅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그곳으로 가려고 하겠죠.”
쿵-
떨리는 책상에 박효주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한데 적색지대 이외에 곳에 마물이 나타난다면? 강자들이 빠져나간 도시에는 마물을 상대할 만한 실력을 가진 자가 몇 되지 않을 겁니다.”
꿀꺽-
박효주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좁아터진 적색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아웅다웅하는 동안, 소환된 마물은 그보다 몇십 배나 큰 도시들을 파괴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유린하겠지.”
그의 눈빛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적색지대를 공략했다 한들 돌아 갈 집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어. 안 그래?”
그런 그녀를 향해 남궁이 말했다.
“집을 지킨다는 건 그런 의미야.”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