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270)

82화

영국 버킹엄(Buckingham).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일단…… 대피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총리로서 그게 할 말입니까.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잖습니까.”

여왕의 일갈에 총리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1자 저지선이 뚫렸습니다. 2차 저지선을 구축하고 있지만…… 영공을 이미 와이번들에게 빼앗긴 지금 저지선을 구축하기 전에 마물들이 도시로 밀려들 것입니다.”

“도시라면…….”

“피해 범위는 최소 반경 200㎞ 이상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곳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총리의 말에 여왕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끝까지 유지하려고 했던 냉정함도 눈앞에 펼쳐진 절망스러운 상황에 무너지고 말았다.

“시민들의 대피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절망적인 말에 여왕은 두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그때였다.

▶ 아이언 골렘을 처치하였습니다!

▶ 소환된 모든 골렘들의 작동이 멈춥니다.

그들의 머릿속에 울리는 알림.

그리고 그건 비단 그 두 사람에게만 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와, 와이번들이 물러간다……!!”

“……살았다. 살았어!!”

각국의 도시 전선에 병력들은 갑자기 후퇴하기 시작한 와이번과 멈춰 선 골렘들에 안도의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 이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총리는 황급히 모니터를 켰다. 순수한 전선에서의 환희와 달리 모니터를 바라보는 총리를 비롯한 각국의 대표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 살아남은 건가.”

총리는 참았던 한숨을 내뱉었다.

“알렉 트라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보고가 되긴 했을 텐데 답신이 아직 없습니다. 현재 연락 두절 상태입니다.”

총리의 보고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영국의 존망을 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왕실의 명령을 어긴 채 무단으로 단독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

“확인된 것은 없습니다. 3명의 계시자 중 적색지대에서 귀환한 건 덴 하울 한 명뿐이니까요.”

여왕의 물음에 총리는 난색을 표했다.

“회복 능력을 가진 STW의 에이라 미쉘 역시 연락 두절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적색지대에도 문제가 생겼을지 모른다는 뜻인가요?”

“네. 막연하게 그를 추궁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뭐, 그것도 일단은 귀환을 한 뒤에나 가능한 일이지만요.”

“후우…… 알겠습니다. 어쨌든 알렉 그자는 영국의 유일한 희망이니까요. 무사히 돌아오기라도 하는 것을 바라야겠군요.”

그렇게 말했지만 입술을 깨무는 여왕의 모습에서 차분한 분노가 느껴졌다.

“원폭 사격을 준비하던 인도가 직전에 취소를 한 모양입니다.”

총리는 패드를 들어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보고들을 확인했다.

“도시를 포기하고 후퇴하던 여러 국가들도 다시 집결하고 있는 것 같고요.”

그는 혀를 찼다.

“……결국 이번에도 한국에게 선수를 빼앗겼습니다.”

“그게 중요한가요. 지금은 살아남았다는 것에 감사를 해야 하겠죠.”

여왕의 말에 총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더욱더 전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게 되겠군요.”

“아뇨. 한국이 아니라 저 사람이겠죠.”

그녀는 폐허가 된 부두에 널브러진 골렘의 시체 위에 서 있는 남궁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 단 한 명의 의해 마물의 침공 격퇴!

-단신으로 골렘을 사냥한 영웅은 8명의 대리자 일족 계약자 중 한 명인 남궁으로 밝혀져…….

-전 세계 시민들 침공을 막아낸 한국의 위업에 찬사!

-반대로 침묵하고 있던 계시자들에게 거센 비난을 보내는…….

“그때 날아다니던 드론이 정부가 아니라 기자들 것이었나 봅니다. 하여간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다니까. 떨어뜨릴 걸 그랬나.”

전술 차량 안에서 올라오는 속보를 확인하던 창환이 남궁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참, 허락도 없이 막무가내로 올려도 되는 거야? 최초 유포자가 누구야? 이거.”

단순히 기사 내용뿐만 아니라 그가 싸우던 모습까지 영상에 찍혀 업로드되어 있었다.

“국경일보 한지희? 국경일보가 어디야? 들어보지도 못한 어디 지방 일보 같은데…… 상부에 보고해서 확 금지 처분 내버릴까 보다.”

‘……한지희?’

언성을 높이는 창환과 달리 남궁은 그 이름을 듣자 살짝 눈썹을 들썩였다.

“들어본 이름인데…….”

귀에 익다 싶은 그 이름은 다름 아닌 일전에 만덕수를 찾아가던 도중에 읽었던 기사들 속에서 본 이름이었다.

“아. 그래.”

알렉을 비롯해 3명의 계시자들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기사를 썼던 기자.

“흐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다시 언급되자, 남궁은 묘하게 그 이름이 머릿속에 새겨지는 기분이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기자가 기사를 쓰는 게 뭐가 잘못됐다고. 오히려 우리에겐 잘되었지. 덕분에 관심이 우리에게 쏠리게 되었으니까.”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연신 보도를 내던 미국과 영국은 더 이상 그 어떤 기사도 내지 못했다.

적색지대에서 귀환한 덴 하울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침공이 끝났고, 나머지 두 사람은 소식을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닭 쫓던 개가 된 상황.

‘예상대로 알렉은 적색지대에서 돌아오지 않았어. 에이라 미쉘과 손을 잡고 적색지대를 공략하기로 한 것이겠지.’

전생도 전생이었지만 에이라 미쉘을 잘 알고 있는 남궁에겐 당연한 결과였다.

‘뭐가 구호 단체고 누가 성녀라는 건지. 뱀을 한 트럭 집어삼킨 여자인데.’

전 세계가 위협을 받아도 그녀는 자신이 강해지는 것이 더 중요할 뿐 아랑곳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남아 있는 계시자를 믿었기 때문이라는 핑계나 대겠지.’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보도는 생각지 못한 것이었지만, 알렉과 에이라의 평판에 금이 가게 만들었으니 제법 괜찮은 수확이었다.

“아직 끝난 게 아냐. 전에도 말했지만 골렘은 파수꾼에 불과해.”

남궁은 시계를 바라봤다.

[00 : 03 : 00]

남은 시간은 3분.

아슬아슬했지만 다행히 써펀트가 소환되기 전에 골렘을 잡을 수 있었다.

‘알렉과 에이라는 그렇다 쳐도 덴 하울이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다행이야.’

만약 시간 내에 골렘을 잡지 못하고 써펀트가 소환되었다면 적색지대와 대륙을 연결하는 포탈이 닫히게 되기 때문.

그렇게 되면 적색지대의 연결이 끊어지게 된다.

본래, 3번째 몬스터 웨이브를 버티지 못하고 원폭을 투하했던 나라는 인도만이 아니었다.

‘미국 역시…… 몇 개의 도시를 과감하게 포기했다.’

하지만 덴 하울이 귀환했으니 다시 마물들이 나타나도, 적어도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이다.

픽-

남은 3분이 지나자 곳곳에 펼쳐져 있던 푸른 포탈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쿠그그그그…….

하늘이 붉어지고 적색지대의 보스 몬스터가 소환됨을 알리는 검은 먹구름이 전 상공에 드리워졌다.

‘……부탁한다.’

남궁은 창밖 너머로 보이진 않지만 적색지대가 있는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써펀트가 소환되고 난 뒤 1시간이 지나면 작동이 멈춘 골렘들이 재료화되면서 대륙에도 진짜 보스 몬스터가 소환된다.’

그것이 남궁이 골렘을 파괴하고 아직 열려 있던 포탈을 타지 않은 이유기도 했다.

‘써펀트까지는 다들 경험을 해봤으니…… 아이들을 믿을 수밖에 없겠지. 그다음 소환되는 오크부터는 난이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렇기에 그 전에…….

이곳에 소환되는 보스 몬스터를 잡아야 한다.

뚜…… 뚜…….

-네. 박효주입니다.

위성 전화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남궁이 물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세계가 마물의 침공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의 함성을 지르는 순간에도, 그는 이미 다음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 * *

“오셨습니까.”

포항 시청에 마련된 임시 작전통제실에 있던 지휘관들이 남궁의 등장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했다.

“됐습니다. 내가 상관도 아니고.”

“남궁 님께 경례를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겁니다. 이건 상관에 대한 예우가 아닌 감사의 뜻이니까요.”

중앙에 서 있던 다부진 사내가 남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번 작전 지휘를 맡은 김대성 중장입니다. 오히려 저도 경례를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괜찮습니다.”

마주 잡은 그의 손에서 단순히 완력 이상으로 강인한 힘이 느껴졌다.

‘근력 계열의 자질을 가진 모양이로군. 최소 중급 이상인 것 같은데…… 창환의 말대로 무늬만 계급장을 가진 건 아닌가 보군.’

남궁은 김대성 중장을 바라봤다.

과거 자신이 이끌었던 711부대가 해체되고 난 뒤 유일하게 현역에 남은 김창환을 거둬준 이가 김대성 중장이라 했다.

‘본인 스스로 실력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실전에도 강하다는 뜻이니까.’

이번 몬스터 웨이브의 보스를 잡기 위해서는 다른 때와 달리 지휘 체계의 확립이 필요했다.

‘누가 봐도 무모한 전투일 수 있다. 총리의 허가를 받긴 했지만 군부는 별개니까.’

김대성 중장이 자신과 함께 싸울 수 있는 전력일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지만 기뻐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골렘의 작동이 멈춘 것은 단순한 시간 벌기에 불과하니까.”

남궁의 말에 중장을 비롯한 통제실에 있던 수뇌부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말씀은 다시 마물들이 공격을 해올 거라는 것입니까? 그건 적색지대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까.”

“적색지대의 보스 몬스터를 잡아야 3번째 지옥문이 소멸되는 것은 맞습니다.”

남궁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문이 닫힌다 하더라도 전 세계에 소환된 마물들은 남아 우리 영역을 계속해서 공격할 겁니다.”

“그렇다면 적색지대를 빠르게 공략하고 그곳에 남아 있는 능력자들을 데려오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적색지대의 보스를 잡기 전에 다시 마물 침공이 시작될 테니까요.”

“크흠…….”

중장은 그의 대답에 낮은 탄식을 뱉어냈다.

“낙담하지 마십시오. 적색지대에도 믿을 만한 전력이 가 있는 상태이니까요. 저희들이 해야 할 일은 지금부터 1시간 뒤.”

남궁은 시계를 바라봤다.

“아니, 53분 뒤에 다시 소환될 보스 몬스터를 사냥할 방법을 논의해야 합니다.”

그는 옆에 서 있던 부관에게 말했다.

“지도를.”

부관이 고개를 끄덕이고 스크린은 켜자 위성지도가 나타났다.

“전 세계에 소환된 골렘 중 단 하나라도 부서지게 되면, 모든 골렘이 멈추면서 그것들을 재료로 한 새로운 골렘이 소환됩니다. 그게 이번 몬스터 웨이브의 진짜 보스 몬스터입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골렘을 파괴한 사람에게만 따로 주어지는 정보가 있습니다.”

물론 전생의 정보였을 뿐이다.

거짓말이었지만 단독으로 골렘을 부순 남궁의 말을 어느새 사람들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디에 소환되는지도 아십니까?”

남궁은 고개를 저었다.

“소환되는 장소는 알지 못합니다.”

전생엔 원폭을 터뜨린 도시 중 하나인 미국에서 골렘이 파괴됐기 때문이었다.

변해 버린 미래는 남궁의 기억으로 알아낼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간이지만…… 간혹 인간 중에 앞을 내다 볼 수 있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네?”

지이이이잉…….

그때였다.

탁자에 놓여 있던 위성 전화가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전화에 쏠리며 긴장한 표정으로 남궁을 바라봤다.

-니니가와 에리카입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

그녀는 유일무이한 미래시(未來視)를 가진 계시자였다.

“예지는?”

-보았습니다. 하지만…….

“장소만 얘기해.”

남궁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만큼 강력한 적.

승리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 아니, 어쩌면 그녀는 미래시에서 남궁의 패배를 본 것일지 모른다.

“당신이 본 미래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남궁은 자신이 본 미래를 비튼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마지막 격전지는…….

에리카는 그의 말에 대답했다.

-부산.

그 순간, 남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