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잡아!!”
알렉 트라만의 외침과 동시에 한슨과 요한나가 써펀트의 사슬을 던져 놈의 움직임을 막았다.
하지만 거대한 써펀트를 옭아매는 것은 두 사람으로서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키에에에에!!]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써펀트는 자신의 몸뚱이에 감긴 사슬을 풀어내기 위해 요동쳤다.
“크윽!!”
놈의 반항에 거구의 한슨마저 크게 휘청거리며 들썩였다.
“축복이 있으리. 아그누스(Agnus).”
▶ 시전자의 우호적 인물들의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하지만 순간, 두 사람의 주위로 반짝거리는 빛무리가 일더니 그 빛이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꽈드드득……!!
그러자 날뛰던 써펀트의 몸을 사슬이 강하게 잡아당겼다.
요동치던 조금 전과 달리 놈은 반항을 하지 못한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규격을 초월하라. 입시시무스(Ipsissimus).”
▶ 시전자의 우호적 인물들의 속성을 부여합니다.
화르르륵……!!!
한슨과 요한나의 손에 불꽃이 일었다. 그 불꽃은 써펀트를 옭아맨 사슬을 타고 놈에게 옮겨 붙었다.
[키에에에에!!!!]
써펀트는 괴로운 듯 비명을 질렀다.
일반적인 불꽃이었다면 수(水) 속성을 가진 놈에게 피해는커녕 아무런 효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슬을 타고 솟구치는 불꽃은 단순한 속성이 아니었다.
▶ 1분간 성(聖) 속성의 힘이 부여됩니다.
▶ 성력(聖力) 효과 발동!!
▶ 성스러운 신의 힘은 상대의 모든 저항을 무시하며 가장 상성에 반하는 힘으로 유효한 타격을 줍니다.
“지금이에요!!!”
에이라 미쉘의 외침과 동시에 알렉 트라만이 별해검을 뽑았다.
츠즈즈즈……!!
그의 검날에 날카로운 스파크가 튀며 새하얀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화르륵……!!
동시에 오러 속에 스며드는 에이라의 성력에 그의 검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흐아아압!!!!”
검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일검(一劍).
강렬한 검기가 써펀트의 목을 정확히 꿰뚫었다.
▶ 써펀트를 처치하였습니다!
“좋았어!!!”
거대한 마물의 목이 떨어지자 알렉은 마치 여의도에서 하지 못했던 한을 풀듯 주먹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대단하시네요. 써펀트의 목을 단 번에 벨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오히려 저야말로 놀랐습니다. 탁월한 회복 능력뿐만 아니라 이런 엄청난 버프를 쓸 수 있다니 말입니다. 클랜에 보조 계통의 각성자가 몇 있지만 과연 계시자는 다르네요.”
알렉은 에이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참에 저희 클랜과 함께하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소속이 싫으시다면 동맹의 관계도 좋겠지요.”
“그건 차차 생각해 보죠. 일단은 보상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어요?”
그의 제안에 에이라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에둘러 말했지만 명백한 거절 의사였다.
‘역시 쉬운 상대는 아니군.’
알렉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호시탐탐 그녀를 살폈다.
‘같은 편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적이 되면 남궁 그 빌어먹을 놈과 더불어서 가장 골치 아픈 적이 될 거야.’
하지만 그래도 걱정을 하진 않았다.
적어도 에이라 미쉘은 확실히 동류의 냄새가 진하게 풍기고 있었으니까.
“자, 그럼 어디…….”
입맛을 다시며 알렉은 써펀트가 드랍한 보상 상자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였다.
▶ 적색지대의 보스 몬스터가 처치되었습니다.
▶ 대륙 침공의 보스 몬스터가 처치되었습니다.
▶ 모든 보스 몬스터가 처치되었습니다.
“……어?”
갑작스럽게 상공에 나타난 붉은 알림.
보상 상자를 열려던 알렉의 손이 잠시 멈췄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 세 번째 축제가 막을 내렸습니다.
“세 번째 문이 끝났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알렉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에이라를 바라봤지만 그녀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써펀트를 사냥하고 나면 그다음 마물인 오크가 소환되어야 했으니까.
▶ 생존자 전원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 2,000헤드가 지급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앞에 지급되는 헤드를 보니 정말로 세 번째 문의 공략이 끝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기는 그렇다 쳐도…… 도대체 대륙에 소환된 마물 침공은 누가 막은 거죠?”
에이라는 다급히 그에게 물었다.
“내가 알 리가…….”
“모른 척하긴. 당신이라면 이미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텐데.”
얼버무리려던 알렉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
숲에서 걸어 나오는 한 남자의 얼굴을 본 그의 인상이 구겨졌다.
“최명훈? 네놈이…… 언제…….”
“언제긴. 적색지대의 포탈이 열리자마자 들어왔지. 누구처럼 기자회견이다 뭐다 온갖 세간의 주목이란 주목은 전부 끌어모으느라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았거든.”
“쥐새끼처럼 숨어서 감히 내 사냥감을 빼앗아? 저열한 짓거리를 하는 게 남궁 그 새끼와 똑같구나!!”
콰아앙-!!
그 순간 알렉의 발아래 날카로운 낙뢰가 떨어졌다.
“다시 한번 말해봐. 우리 아빠가 뭐?”
“…….”
치직……! 치지지직……!!
시커멓게 타버린 지면 위로 붉은 스파크가 꺼지지 않고 날뛰는 것을 보며 알렉은 입을 다물었다.
‘붉은 번개…… 여의도 때 써펀트의 비늘을 날려 버린 게 저 꼬마로군. 남궁의 딸이랬던가.’
그는 소민을 노려봤다.
‘평범한 마력은 아니야. 특수한 자질인 것 같은데…… 들고 있는 무기도 범상치 않아.’
알렉은 소민이 요정족의 계약자가 되었다는 보고를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귀찮게 되었군.’
한순간 이 자리에서 싹을 정리해 버릴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알렉. 주위에 매복이 있다.”
한슨의 말에 그가 조용히 주위를 살폈다.
‘……둘인가.’
미세하게 느껴지는 인기척.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닌 듯 보였지만 자신을 노리고 있는 화살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뭘 그렇게 노려봐?”
“이 새끼가…….”
호준의 한마디에 한슨이 한 발자국 앞으로 튀어나오며 그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됐다. 한슨.”
알렉은 고개를 저었다.
“처리를 못할 것도 없지만 보는 눈이 많아.”
그가 한슨의 어깨를 잡고서 낮게 귓속말을 했다.
“에이라 때문에? 써펀트를 잡는 시점에서 어차피 그녀도 한배를 탔잖아.”
“그렇기 때문이야.”
“……음?”
한슨은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차라리 적이라면 상관없지. 죽여 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동료가 된다면 다르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동류의 냄새.
만약 이 자리에서 저들을 처리하게 되면 분명 언제라도 에이라 미쉘은 그것을 약점으로 이용할 사람이었다.
▶ 보스의 죽음으로 인해 적색지대의 난이도가 현시점을 기준으로 동결되었습니다.
▶ 3일 뒤, 앞으로 적색지대엔 고블린과 리자드맨, 2종의 마물만이 소환됩니다.
솨아아악---!!!
알림과 동시에 그들의 앞에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는 푸른 포탈이 열렸다.
▶ 축하합니다!!
▶ 3번째 문까지 모두 살아남은 참가자들을 위한 특별한 혜택이 시작됩니다.
▶ 3일 뒤, 적색지대에서 【소환수의 밤】이 시작됩니다. 참가자들께서는 당신을 따를 믿음직스러운 파트너를 얻게 될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적색지대도 모자라 밖의 보스까지 빼앗기게 되다니…… 닭 쫓던 개가 돼버린 거잖아.’
빠득-
이대로 아무런 수확도 없이 돌아 갈 수는 없었다. 알렉은 포탈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봤지? 너희들이 멋대로 보스를 사냥한 덕분에 적색지대에선 더 이상 상급의 마물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저놈들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울 수밖에 없어.’
그는 명훈의 일행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가 어째서 귀환하지 않고 써펀트를 사냥했는데? 그건 다음 문이 열렸을 때 소환될 오크를 상대할 준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너희들 때문에 다 틀어졌어!”
하지만 그의 말을 듣던 호준은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야. 네가 내뱉어도 말 같지 않은 소리란 거 알지? 보상에 눈이 멀어 사람들 죽어 나가는 것도 모른 체한 놈들이 뭐가 어째? 어디서 약을 팔아? 확!”
그는 검지와 중지를 펼쳐 찌르듯이 알렉에게 겨누며 말했다.
“……돌아가게 되면 너희들이 벌인 무능한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글쎄. 그럴까?”
포탈을 타고 넘어가려는 알렉을 향해 명훈이 말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서 말이야. 돌아가면 서로 어깨동무하고 웃고 있을지 누가 알아?”
“별 미친 소리를 다 하는군.”
알렉은 명훈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려다 에이라를 힐끔 바라보고는 포탈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 * *
솨아아악……!!!
포탈을 타고 넘어오자 시야를 가득 채우던 빛무리가 사라졌다.
알렉은 동시에 천천히 눈을 떴다.
번쩍-! 번쩍-!!
찰칵! 찰칵! 찰칵! 찰칵!!!!
포탈의 빛이 사라졌음도 불구하고 눈부시게 그의 눈을 때리는 빛.
알렉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아아아---!!!
와아--!!
고막을 찢을 듯한 함성 소리에 알렉이 눈을 떴다.
“……!!!”
그 순간,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알렉 트라만 씨! 귀환을 환영합니다!! TMC 기자입니다!!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중앙보도의 정태영 기자입니다!! 적색지대의 보스를 사냥하신 것이 알렉 트라만 씨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뭐, 뭐야?”
당황한 것은 함께 돌아온 한슨과 요한나 역시 마찬가지.
‘……여기가 어디야?’
몰려든 기자들도 기자들이었지만 낯선 풍경에 알렉은 자신이 있는 위치부터 우선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남궁 씨의 인터뷰에 의하면 마물 침공에 대비하여 이미 사전 약속이 되어 있었다고 하던데요!”
“……네?”
“이 모든 것이 미리 계획된 양동 작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작전이 정확히 들어맞으셨는데 기분이 어떠십니까?”
자신을 둘러싼 기자들을 바라보며 알렉은 본능적으로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와아아아아---!!
그 순간, 다시 한번 함성 소리가 들렸다.
턱-
자신의 어깨 위로 올라오는 손.
‘설마…….’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봤다.
“맞습니다. 알렉 트라만 씨는 방금 적색지대 공략에 성공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실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작전이었습니다.”
“···당신은 뭐야?”
“청와대 비서실장 함만수라고 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하는 비서실장을 보며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알렉은 인상을 찡그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최명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거지?’
알렉 트라만은 뒤를 돌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입모양으로 말했다.
“나도 몰랐던 일이야. 아무래도 적색지대의 포탈이 침공한 마물의 보스가 죽은 곳으로 연결되는 모양이군.”
“그럼…….”
명훈의 대답에 알렉이 눈살을 찌푸렸다.
“맞아. 여기 한국이다. 알렉.”
“……!!”
그때 들려온 낮은 목소리가 소란스러웠던 일대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남궁이다!!”
“카메라 돌려!! 어서 찍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외침에 침묵했던 사람들의 함성이 다시 요란하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물러서세요!! 물러서!!”
“거리를 벌려주세요!!”
홍해가 갈라지듯 좌우로 밀려나는 인파 속에서 걸어 나오는 남궁을 바라보며 알렉이 빠득- 이를 갈았다.
“수고했다.”
알렉이 자신을 향해 내민 남궁의 손을 일별하고 그를 노려봤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남궁은 대답 대신 으르렁거리는 알렉의 손을 잡아당기며 꽉 움켜잡았다.
“이, 이거 노…… 아…….”
알렉은 그의 악수를 뿌리치며 소리치려다 말끝을 흐렸다.
찰칵-! 찰칵-!!!
수십, 수백 대의 카메라에서 일제히 그들을 향한 플래시가 터졌다.
“보는 눈이 많은데.”
알렉의 귀에 속삭이는 남궁의 목소리.
“일단 웃어.”
그는 직감했다.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