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하…… 하하!! 다들 들었나? 4번째 문에서 나올 마물을 여기 있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말이야. 계시자는 위상이 뽑은 가장 강력한 자들이다!”
알렉은 남궁을 향해 으르렁거리듯 소리쳤다.
“네가 지금까지 많은 마물을 막아 낸 것은 사실이지만 다음 마물을 너 혼자만이 사냥할 수 있단 헛소리는 그저 자만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데?”
“그렇게 생각하든지.”
“……뭐?”
하지만 그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남궁은 오히려 담담한 표정이었다.
“자신 있으면 네가 4번째 마물을 상대해라. 말리진 않는다. 대신 많이 먹어둬. 다음에 만날 땐 시체가 되어 있을 테니.”
“이거 치워!!”
알렉은 자신 앞에 남궁이 내미는 고기를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아까운 고기만 날렸군.”
바닥에 떨어진 고기에 남궁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 참. 날리긴 왜 날려? 뭐 묻지도 않았구만. 주워 먹으면 되지.”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냉큼 주워 먹는 미카엘의 모습에 팔무성 사이에서 팽팽했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어디서 거지 같은 놈을 데려와서는.”
바닥에 쭈그려 앉은 미카엘을 향해 알렉이 툭 내뱉자, 미카엘은 씨익 웃으며 자신의 목을 젓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내가 좀 배고프게 살긴 했지. 다들 배대지가 불렀나 봐? 눈앞에 고기를 남기고 말이야. 난 좀 모자라는데 형씨 모가지나 꼬치로 꿰어볼까?”
“뭐? 이 새끼가……!!”
콰앙-!!!!
알렉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신경질적으로 불판이 있는 드럼통을 미카엘을 향해 발로 찼다.
콰가가가강……!!
날아간 드럼통이 바닥에 튕기며 벽에 처박히자 얼마 남아 있지 않던 가게의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왜? 진짜 붙으려고?”
철컥-!!!
알렉이 별해검을 뽑았다. 아니, 뽑기 직전이었다.
쩌적…… 쩌저적…….
“둘 다 그만하시죠.”
“……?!!”
별해검의 검집이 차갑게 얼어붙었고, 검과 마찬가지로 미카엘의 두 다리 역시 얼음으로 둘러싸였다.
‘5단계 빙계 마법? 생각보다 성장이 빠른데…… 어쩌면 저들 중에 가장 강한 건 알렉이 아니라 덴 하울일 수도 있겠군.’
모두가 갑자기 벌어진 기현상에 놀라고 있었지만 남궁은 익숙한 듯 그를 지켜봤다.
“철부지들처럼 다투려고 온 것이 아니잖습니까. 굳이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덴 하울…… 당장 마법을 해제 하시죠. 당신도 보셨지 않습니까. 저 녀석이 먼저 도발한 거.”
“글쎄요. 그렇게 따진다면 저도 당신께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 있지요. 마물 침공 소식을 듣고 적색지대에서 귀환을 결정했을 때 모두가 합의를 하지 않았습니까.”
움찔-
알렉의 어깨가 떨렸다.
“한데 당신은 귀환하지 않고 써펀트를 사냥하셨더군요.”
“그, 그건…….”
덴의 말에 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건 기자회견에서 이미 말했을 텐데. 이미 계획된 것이었다. 마물의 침공만 막아서 끝나는 게 아니었으니까. 적색지대의 보스를 사냥해야 하지.”
그 순간 남궁의 눈짓에 알렉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 만약 적색지대에서 내가 마물을 끝내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직도 3번째 문을 막지 못했을걸!”
“정말 계획된 것이 맞긴 합니까? 지금 모습을 봐서는 절대로 함께 손을 잡은 것 같아 보이지 않는데.”
“어차피 계시자들은 서로 경쟁 하고 죽여야 하는 관계니까. 하지만 이해관계가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손을 잡을 수 있지. 지금도 그러기 위한 만남이고.”
“…….”
덴 하울은 남궁을 지그시 바라봤다.
“남궁 님. 당신의 속내를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군요. 스스로 회귀자라는 것을 밝히는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끝까지 감췄다면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남궁은 덴의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누가 회귀자인지 서로 의심할까? 신이 몰라서 나를 그냥 두고, 너희가 몰라서 나를 죽이려 하지 않고 있는 거야?”
“······.”
“그저 지금껏 확실한 증거가 없을 뿐. 누가 봐도 나였고 나 역시 더 이상 감출 생각도 없어.”
“왜죠?”
“사실을 밝혀야 진실된 얘기를 할 수 있을 테니까.”
“흥,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군.”
알렉 트라만이 그의 말에 빈정대듯 입술을 씰룩이며 말했다.
“위상이 회귀자를 죽이라고 너희들에게 명한 것처럼, 언젠가 우리는 결국 서로 싸우게 될 거다.”
남궁은 그런 그를 슬쩍 바라보고는 다시 덴에게 시선을 돌렸다.
“위상이 너희들에게 어떤 보상을 내걸었을지는 모르지만…… 계시자들의 싸움도 일단은 살아 있어야 성립되는 것.”
남궁은 말했다.
“세상이 망한다면 그런 게 무슨 소용이지?”
“……4번째 문에서 나오는 마물이 도대체 어떤 녀석이기에 당신 같은 사람이 우리를 모은 것인지 모르겠군요.”
독불 장군 같았던 지금까지와는 분명 달랐다.
덴의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남궁에게 쏠렸다.
“마족(魔族).”
하지만 긴장한 사람들과 달리 그는 의외로 담담히 말했다.
“……자신 있으십니까?”
남궁은 차갑게 웃었다.
그의 전생을 안다면 절대로 하지 못할 질문이었으니까.
대마족 666,666마리의 머리를 잘라 시간을 회귀한 마족 사냥꾼.
“물론.”
그게 남궁이었다.
* * *
▶ 소환수의 밤이 시작됩니다.
▶ 모든 참가자들은 적색지대에서 자신에게 맞는 소환수를 획득하시기 바랍니다.
▶ 소환수는 험난한 카니발을 함께할 동료입니다.
▶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 주의 : 계약에 실패할 경우 때로는 소환수가 당신을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오…… 이제 시작인가요?”
삼각지역의 허름한 가게에서 있었던 계시자들의 만남이 세간에 알려졌더라면 엄청난 이슈가 되었을 것이다.
“으흠.”
하지만 계시자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기도 전에 시작된 소환수의 밤에 세계는 다른 의미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분간 적색지대가 붐비겠군.”
남궁은 머릿속에서 울리는 알림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명훈아. 네가 애들을 데리고 적색지대에 다녀와. 미리 록산느에게 부탁을 해두었으니 그녀의 조언을 따르도록 해.”
“알겠습니다.”
록산느는 남궁이 용아(龍牙)를 계약하는 과정에서 마물의 진화 방법을 알려준 대가로 나머지 사람들의 소환수 계약을 도와주기로 했다.
“소민이는 안 가나요?”
“응. 소환수의 밤이 시작되기 전날 요정계에서 소민이에게 연락이 왔어.”
“……요정계?”
명훈이 시선을 돌리자 뒤에 있던 소민이가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며 말했다.
“네. 요정족의 계약자는 소환수 대신에 요정과 계약을 맺는대요.”
“오……? 요정? 그거 대단한데. 과연 요정족의 계약자답네. 기대되는데.”
“그쵸? 히힛.”
명훈이 소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소환수는 단순히 본인이 마음에 든다고 계약을 할 수 있는 게 아냐. 유대를 쌓는 과정이 중요하다. 마음을 열고 다가가도록 해. 그러면 분명 네게 맞는 파트너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남궁의 조언에 명훈은 대답을 하고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잘 다녀와.”
“네!!”
명훈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포털을 타고 적색지대로 가자 북적거렸던 성채 안이 조용해졌다.
“아빠랑 둘이 있는 것도 오랜만이다. 그치.”
“그러게. 최근에 꽤 시끌벅적했지?”
남궁은 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고생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 아빠의 속내가 모두 담겨 있음을 소민은 잘 알 수 있었다.
“아냐. 아빠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녀는 남궁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아니. 네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한 거 같아 아빠가 미안해.”
“그런 소리 하지 마. 엄마가 슬퍼할 거야. 엄마가 전해달랬어. 그때 일은 미안해하지 말고 조금은 우리를 의지하라고.”
“……뭐?”
“아빠가 뭘 고민하는지 알아. 이번에 열릴 4번 문 때문에 그렇지?”
“그, 그게 무슨…….”
“엄마가 그러던데? 아빠의 사령술로 영체화가 되었을 때 아빠 기억을 봤었대.”
“……!!”
남궁은 딸의 말에 진심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목소리가 들려?”
* * *
솨아아악--!!!
기분 좋은 향긋한 풀 내음이 느껴지는 순간, 눈앞으로 삭막한 도시가 아닌 맑은 하늘이 있는 숲이 펼쳐졌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계수의 계약자시여.
페어리 퀸과 함께 요정들이 소민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그녀를 반겼다.
-소환수의 밤이 시작되었습니다. 저희는 계약자를 위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요정을 준비했습니다.
딱-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넬랴를 비롯한 대귀족들이 커다란 가마를 이고 나타났다.
가마 안에는 커다란 꽃망울 3개가 있었는데, 모두 다 아직 개화하지 않아 망울이 닫혀 있는 상태였다.
“어떤 요정들이에요?”
-저도 알지 못합니다. 요정들은 꽃망울 속에서 부화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시시각각으로 수없이 변하니까요.
“으음…… 그럼 운에 맡겨야 하는 건가요?”
-세계수의 계약자인 당신이라면 운은 직감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소민은 눈앞에 놓여 있는 꽃망울들을 바라보며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많습니다. 조급하지 말고 천천히 교감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네, 알겠어요.”
-넬랴. 꽃망울들을 동녘 정원으로 가져가세요.
-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여왕의 명령을 받은 넬랴가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히며 소민을 인도했다.
-그런데 당신은 어쩐 일이십니까? 요정 계약을 하려고 오신 건 아닐 텐데…… 듣자 하니 새로운 종의 써펀트를 계약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응. 소환수의 밤과는 별개의 일로 왔다.”
-무슨 일 때문인지 이제는 가늠도 하기 어렵네요. 일전 제가 적색지대에 대해 했던 조언이 무색하게 3번째 문을 막으셨으니까요.
여왕은 남궁을 향해 석연치 않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아냐. 도움이 되었어. 8명의 계시자, 하지만 거점은 3개. 그 말은 결국 거점 쟁탈에 대한 경고를 뜻하는 것이었으니까.”
-이미 알고 계셨지만요.
“예상을 확신으로 바꾸게 한 계기가 되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여왕은 그의 대답에 고개를 숙였다.
“다만…….”
그녀는 이제 남궁이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말할 것임을 직감했다.
“적색지대가 종결된 덕분에 인간들끼리의 싸움은 잠시 멈췄지만 아직 시작하지 않은 싸움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시작하지 않은 싸움이요?
“슬슬 시작하는 게 어때? 야차는 거인의 심장이 필요하고, 요정은 나가에게서 빼앗긴 호수를 찾아야 하지.”
-……!!!
그의 말에 여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팔각전쟁(八角戰爭).
대리자 일족들끼리 권좌를 두고 싸우게 될 전쟁.
-이제 막 계약자가 결정된 상황에서 벌써 전쟁을 시작할 생각을 하다니…… 지치지도 않으십니까?
그녀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남궁에게 말했다.
“야차 일족의 무휘가 병들었다. 그를 고치기 위해선 거인족의 수장인 티탄의 심장이 필요해.”
-무휘가 병에 들었다고요? 천년은 더 거뜬히 살 것 같은 괴물도 살아 있는 생명이긴 한가 보네요. 그렇다면 제게 온 이유를 알겠군요.
“그래. 거인족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요정의 힘이 필요하거든. 대신 나를 도와준다면 나가 일족과의 전쟁에서 거인과 야차는 요정에게 힘을 보탤 거야.”
-벌써부터 승리를 장담하시는 겁니까?
“요정이 도와준다면.”
-저희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나요?
“요정독이 필요해.”
-죄송하지만 거절합니다.
제법 괜찮은 제안처럼 들렸지만 어쩐 일인지 여왕은 단박에 거절했다.
“어째서지?”
-요정독은 요정의 비술 중 최상위 술법입니다. 세계수의 힘을 통해서도 성공 가능성이 낮습니다. 확률을 높이려면 요정들의 요력을 집중시켜야 하는데…….
여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호수를 지키는 요정군의 요력까지 필요할 겁니다. 하나 그렇게 된다면 그 빈자리를 나가 일족들이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솨아아악---!!!
남궁이 손바닥을 들어 올리자 그의 품 안에서 작은 구체가 하나 나타났다.
촤르륵……!!
물풍선이 터지듯 구체가 물과 함께 쏟아졌고, 그 안에서 작은 수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륵!!]
그리고 수룡이 고개를 치켜들며 혀를 내미는 순간, 손바닥만 했던 녀석이 순식간에 수십 미터의 거대한 써펀트가 되었다.
-……!!!
[크르르르르르……!!!]
“나가들은 요정의 영토에 다가 가지 못할 테니까.”
남궁은 용아의 허리를 가볍게 두들기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