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270)

91화

“남궁의 제안.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에이라 미쉘이 알렉에게 물었다.

“연합의 본부를 한국에 두는 것에 대한 대가로 4번째 문에서 소환되는 마물의 미끼가 되겠다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네요. 3번째 마물의 침공에서 많은 국가들이 피해를 입었어요. 복구가 필요한 시점에서 또다시 피해를 입는 건 끔찍한 일이죠.”

에이라는 창밖에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남궁의 말대로 4번째 보스가 단 하나의 목표물을 노린다면 전장은 한국에 한정될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회복할 시간을 벌 수 있겠죠.”

“그렇게 해서 정말로 남궁이 마물을 잡는다면?”

“그야…….”

“최악의 상황은 연합의 본부를 한국에 세우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남궁이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것. 그게 가장 큰 문제죠.”

꽈악-

알렉은 주먹을 쥐었다.

“4번째 마물이 정말로 강력한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회귀…….”

“만약 놈의 거짓말에 우리가 놀아나고 있는 거라면요? 놈의 속임수 때문에 충분히 잡을 수 있는 마물조차 그냥 포기하고 놈에게 양보해 버리면 격차는 더 이상 좁힐 수 없게 될 겁니다.”

그가 말했다.

“당신도 알겠죠. 보스를 잡고 나면 얻을 수 있는 보상들 말입니다. 그걸 고스란히 남궁에게 갖다 바치는 꼴이 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세계연합은 예정대로 진행될 겁니다. 이미 UN을 비롯해서 각국 정상들과 합의를 끝낸 시점입니다.”

“……괜찮을까요?”

에이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알렉을 바라봤다.

“괜찮지 않으면?”

“……네?”

오싹-

그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알렉의 눈빛에 에이라는 자신도 모르게 전신에 닭살이 돋는 기분이었다.

“이제 와서 발이라도 빼실 생각?”

‘뭐, 뭐야…… 이 눈빛은.’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살기 어린 시선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적색지대에서 남기로 한 순간부터 우리는 한배를 탔습니다. 지금 전 세계가 남궁을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는 뭣 같은 상황에서 그 일이 밝혀지면? 성녀라는 이미지가 과연 무사할까요?”

“그, 그건…….”

“그때는 당신이 제안을 한 것이지만 앞으로는 내가 당신께 제안을 할 겁니다. 알겠습니까?”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 해.”

* * *

[파, 파, 팔각전쟁을 시작하겠굽쇼?!!!]

“귀 떨어지겠다. 규류.”

[아니, 이게 조용할 일이나고요. 오랜만에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전쟁을 벌이겠다니…… 3번째 문이 닫힌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싸웁니까?]

“그렇게 됐어.”

남궁은 을지로 지하상가에 너저분한 가게 안에서 날뛰는 규류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혹시 싸움 중독이세요? 아니, 좀 쉬라고 소환수의 밤을 열었는데 왜 알아서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겁니까? 위상들이 착해서 이런 시간을 만든 줄 아세요?]

규류는 남궁을 향해 소리쳤다.

[4번째 문이 열리면 진짜 끔찍할 거라고요! 아니, 회귀자면 아시잖습니까. 어떤 놈이 나올지!]

“알지.”

후르릅-

남궁은 캔 음료를 마셨다.

“그런데 너도 알 텐데. 내가 회귀하기 전에 어떤 퀘스트가 존재했었는지 말이야.”

[알죠. 알다마다요. 666,666마리의 마족을 사냥해서 얻을 수 있는 회귀의 기회.]

“그래. 666,666마리다. 내가 잡아 목을 벤 마족의 수가 말이지.”

[다르잖습니까! 그 흔한 마족들과 비교할 일이 아니죠. 4번째 문에서 나오는 마족은……!! 웁? 우웁!!]

하지만 규류의 말의 끝나기도 전에 그의 입은 캔으로 틀어막혔다.

“거짓말을 하는 인간이라면 모를까. 대리자 일족이 미래의 일을 발설하게 되면 규율에 어긋날 텐데?”

[웁웁!! 웁!!]

규류는 캔을 입에 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퉤, 퉷! 자신 있습니까?]

“이대로 놈과 붙는다면 100% 지겠지.”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팔각전쟁을 일으키신다는 겁니까? 다음 마물을 상대할 방비나 찾으셔야지!]

“그렇기 때문에 하는 거야.”

[……네?]

“이대로 붙으면 지겠지만 자신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4번째 마물을 사냥하기 위해서라고. 티탄의 힘이 필요하거든.”

[으음…….]

규류는 턱을 괴며 생각했다.

[팔각전쟁은 대리자 일족들의 왕을 가리는 자리입니다. 그 말은 곧 대리자 일족들의 전쟁이라는 말이죠.]

8명의 위상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는 것처럼, 8개의 대리자 일족들 역시 서로 서로 원한과 상성 관계를 가진다.

거인족은 야차 일족과 문제가 있지만 요정족에게 약하고, 요정족은 나가 일족과 문제가 있지만 노움 일족에게 약하다.

가위 바위 보처럼 얽혀 있는 일족들은 결국 자신과 적대 관계의 일족을 잡기 위해 상성을 가진 일족과 손을 잡아야 했다.

하지만 서로가 물려 있는 상황에서 쉽사리 먼저 행동을 옮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눈치 싸움.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불을 댕기려는 이가 바로 남궁인 것이었다.

“그렇겠지.”

[그런데 그 전쟁을 인간이 먼저 일으키겠다? 솔직히 언젠가는 터질 전쟁이라도 그건 좀 아니죠.]

“왜?”

[명분이 없잖습니까. 대리자들의 전쟁에 인간이 끼어든다는 건 오히려 나머지 대리자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규류는 말했다.

[불씨를 붙이려다 괜히 불똥만 튈 수 있습니다.]

“명분은 만들면 그만이야.”

[글쎄요. 납득할 수 있을 만한 명분이 아니라면, 부끄러운 얘기지만 야차는 적이 많습니다. 남궁 님께서 움직인다면 그건 곧 야차들도 따라야 한다는 뜻이니까요. 위험해 질 수 있습니다.]

남궁은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날 걱정해 주는 건가?”

[무, 무슨…… 계약자니까 그런 것뿐입니다.]

규류는 당황한 듯 살짝 뒤로 물러서며 괜히 애꿎은 고개만 세차게 가로저었다.

“이거나 받아.”

남궁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건…….]

“얼마 남지 않은 세계수 잎사귀야. 요정족의 동맹 대가로 받은 것이지. 무휘에게 가져가서 다섯 시간 간격으로 3일 동안 달여 마시라고 해.”

규류는 남궁이 건넨 작은 잎사귀를 빙그르 돌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진짜 구하기 어려운 건데…… 그런데 이걸 왜 아버님께 드립니까? 그 괴물 같은 야차는 어디 아프지도 않은데.]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뭐,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이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건네줘라.”

[으흠…… 알겠습니다.]

그는 잎사귀를 품 안에 집어넣으면서 남궁을 바라봤다.

[자, 생각하신 명분은 뭡니까? 아무래도 그걸 가지고 판을 짜는 게 제가 할 일 같은데.]

“눈치가 빠르군.”

남궁은 마음에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 경매가 끝나고 대리자 일족들은 각자의 계약자를 공개했지.”

[그렇지요.]

“그들의 활약 덕에 몇몇의 도시들은 제법 피해가 적기도 했고.”

홍콩의 진천, 싱가포르의 양웨, 이스탄불의 사지드…….

8명의 계약자들은 마물의 침공 속에서 활약하며 남궁과 더불어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하지만 모두가 전투에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거인족의 계약자가 나타나지 않았지. 어째서일까?”

[뭐…… 그거야, 계약자라고 꼭 마물과 싸워야 하는 건 아니니까 안 나타날 수도 있죠.]

“위상처럼 계시자를 직접 고른 것도 아니고 경매를 통해서 살아남은 자들이야. 그런 자들이 마물의 침공에서 도망을 쳤다고?”

[으음…….]

“영웅심이 아닌 강해지기 위한 욕심에서라도 눈에 불을 켜고 마물을 사냥해야 할 텐데.”

남궁은 그를 향해 말했다.

“경매가 진행되는 동안 이상한 점은 없었나?”

[이상한 점이라…….]

규류는 턱을 쓸며 기억을 더듬었다.

[이걸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뭔데?”

[후보자들이 뽑히고 난 다음 대리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거인족은 다른 후보들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계약자를 먼저 골랐습니다.]

“그게 가능해?”

[후보자가 원하고 서로 결정이 된다면 가능합니다. 남궁 님도 그러시잖습니까.]

남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거인족의 계약자야 뭐 마다 할 이유가 없죠.]

“계약자의 출신은?”

[베네수엘라라고 합니다. 거인족 관할이 남아메리카 쪽이라 그쪽을 뽑았나 싶기도 한데…… 그런데 이게 이상한 점이라 할 수 있을까요?]

“혼란스러운 도시일수록 사람이 죽어나간다 한들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지.”

[……네?]

그는 규류를 바라봤다.

“계약자가 꼭 마물과 싸워야 하는 법이 없듯이, 대리자 일족이 꼭 계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법도 없거든.”

[……그게 무슨 뜻입니까?]

“대리자 일족들이 계약자를 뽑는 이유는 카니발 때문이 아냐. 그들을 강하게 만들어 일족의 전력을 강화시켜 팔각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함이지.”

[그런 이유도 있긴 하지만 대리자 일족이 계약자를 이용하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아. 적어도 너희가 그러지 않다는 건.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선택한 것이기도 하고.”

[경매는 대리자 일족의 하나뿐인 특권인데…… 오히려 저희가 경매를 당하다니. 거참…….]

규류는 남궁의 말에 머쓱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생각해 봐. 계약자의 목적이 팔각전쟁에서의 승리라면, 그게 꼭 계약자가 강해져야 한다는 뜻은 아냐.”

[…….]

“계약자가 아닌 일족 자체가 강해지면 되는 일이니까.”

[이거, 이거…… 어쩐지 냄새가 나는데. 그것도 지독한 구린내가 말입니다요.]

규류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남궁의 주변을 배회했다.

“거인은 인육을 먹는다.”

딱-!!

[이제 알겠군요.]

규류는 손가락을 튕겼다.

“판이나 잘 만들어봐.”

* * *

라칸하임.

위대한 협곡 아래 있는 티탄의 성역.

화사한 요정계나 웅장한 야차계와 달리, 협곡 아래 거암들과 모래 바람만이 가득한 이곳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닌 듯 보였다.

쿵…… 쿵…….

남궁은 거대한 괴암들이 즐비한 협곡을 올려다보았다. 구불구불한 바위산 위로 들려오는 육중한 소리.

마치 무거운 뭔가를 내려치는 듯싶었지만 그것은 거인들의 발걸음 소리였다.

저벅- 저벅- 저벅-

그에 비한다면 남궁은 너무나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비탈길 주위로 풍경이 바뀌었다. 즐비한 바위 대신,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굳이 그게 누구의 시체라고 설명 할 필요도 없었다.

저벅- 저벅- 저벅-

남궁은 시체들을 지나 좀 더 걸어가기 시작했다. 시체의 피를 머금은 땅은 붉게 변해 있었다.

쿵…… 쿠웅…….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인족의 영토인 라칸하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냄새가 나는군.”

주위에 즐비한 시체들에서 풍기는 썩은 내가 아니었다. 시체의 산과 어울리지 않게 맛있는 고기가 구워지는 냄새였다.

툭-

남궁은 라칸하임의 입구에 걸터 앉아 있는 거인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뭔가를 먹고 있었다.

산처럼 거대한 모닥불을 피웠고 그 위에는 나무기둥으로 된 꼬치가 세워져 있었다.

놈들의 크기만큼이나 꼬치의 크기도 상당해서 썰려 있는 고깃덩이들은 거의 사람만 했다.

우적- 우적- 우적-

아니, 사람이었다.

녀석들은 입안으로 꼬치를 밀어 넣으면서 신나게 인간 고기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맛있나?”

남궁의 목소리가 들리자 거인들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인간?”

“아직도 남은 게 있었나?”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던 거인들이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남궁에게 다가왔다.

“이놈은 별로 맛없게 생겼는데.”

“그냥 구겨서 공놀이나 할까?”

“괜찮은 생각인데? 껄껄!!”

“티탄 님께서 조용히 있으라고 해서 인간 세상 구경도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좋아, 좋아!”

외눈박이 거인 3명이 자기들끼리 박수를 치며 좋아하기 시작했다.

서걱-

웃고 떠들던 순간, 뭔가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남궁의 앞에 서 있던 거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떨궜다.

퍽!! 데구르르르…….

남궁이 발로 밀자 엄지발가락 하나가 경사면을 타고 굴러떨어졌다. 놈은 그게 자신의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 발 냄새. 넌 먹지도 못하겠다, 새끼야.”

“이, 이이익……!!!”

푹!!

소리치려는 거인에게 남궁은 대답 대신 무릎 관절 사이로 검을 박아 넣었다.

“크아아악!!!”

거인의 비명을 뒤로한 채 박아 넣은 검을 발판처럼 밟고 뛰어 오른 남궁이 놈의 머리 위로 올라가서 하나뿐인 눈알에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계란이 깨진 것처럼 녀석의 눈 안에서 진득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 내렸다.

“아악!! 아아아아악!!!”

극심한 고통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거인이 두 팔을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야, 야야!!”

“조심해!!”

내젓는 팔에 나머지 2명의 거인들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퍼억-!! 콰아아앙-!!

하지만 놈은 고통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주위에 닿는 것들을 모조리 부수기 시작했다.

“인간이 맛있나? 너희는 맛없던데.”

남궁은 요동치는 놈의 머리 위에서 갈대숲같이 기다란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팔각전쟁의 승자인 거인족.

티탄이 위상에 승격되기 바로 직전, 그들은 세상에 완전히 사라졌다.

그들의 강함이 인육 때문이라는 것을, 한 남자가 알게 되었던 날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