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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92/270)

92화

쿠웅--!!

거대한 망치를 내려치는 것 같은 둔탁한 굉음과 함께 주위에 솟아 있던 바위산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감히 어떤 건방진 놈이 거인족의 땅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이지?”

남궁이 고개를 들자,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산을 마주한 듯한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네놈…… 그래. 그 얼굴을 알고 있다. 일곱 뱀의 계시자이자 야차 일족의 계약자로군.”

거대한 산과 같은 몸집 위에 달린 외눈은 얼음처럼 차가운 회색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 수백이 넘는 거인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위압감.

“인간이 혼자 라칸하임에 올 리는 없고, 그렇다고 위상이 이런 소동에 관여했을 리도 없지. 그렇다면 문을 열어준 놈은 뻔하지. 규류, 짓이겨지고 싶지 않으면 모습을 드러내라.”

[하, 하하…… 오랜만입니다. 티탄.]

남궁의 등 뒤에서 규류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으며 나타났다.

“너희 야차와 우리 거인은 분명 결이 다를지언데,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인 거지?”

티탄은 남궁의 발아래 쓰러진 거인들을 바라봤다.

‘아무리 계시자와 계약자 두 개의 힘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인간에 불과한데…… 라칸하임의 문지기 셋을 쓰러뜨렸다니.’

그는 남궁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제법이군. 평범한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할 줄은 몰랐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대리자 일족이 인간을 돕는다는 생각을 너희가 깨줬으니까. 위상이고 대리자 일족이고…… 모두 우리의 일상을 파괴한 똑같은 것들이라는 것은 마찬가진데.”

[저희는 아닌데…….]

모기 소리같이 기어들어 가는 규류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티탄과 남궁은 서로를 바라봤다.

“너희 거인족의 계약자. 어디 있지?”

꿈들-

그 순간 티탄의 눈썹이 씰룩였다.

“베네수엘라의 디에고. 너희들이 뽑은 계약자가 맞지? 다른 계약자들의 행보는 확인되었지만 그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거인족의 힘을 받기 위해 수련 중이다. 그것까지 우리가 네게 알려줄 이유는 없을 것 같다만.”

“글쎄. 3번째 문이 열리고 자신의 나라가 위협을 받는 순간까지도 과연 수련을 하고 있었을까?”

“인간의 잣대로 세상을 보려 하지 마라. 너희들이 나눈 국가란 그저 편 가르기에 불과할 뿐. 더 많은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희생도 필요한 법이다.”

“아하? 그래서 지금 이 광경이 그 약간의 희생의 증거라는 건가.”

남궁은 바위산에 즐비한 인간의 시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규류에게 들었다. 대리 경매가 시작되자마자 계약자를 선점했다고?”

“그건 너와 야차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지. 하지만 달라.”

그는 팔짱을 낀 채로 티탄을 향해 말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조사를 했는데 꽤 재밌는 사실을 알게 되서 말이야. 3번째 문이 열리고 마물의 침공을 받았을 때 가장 피해가 적었던 대륙은 아시아가 아니라 너희가 관할하는 남아메리카더군.”

“그게 어째서? 겉멋만 든 다른 일족과 달리 우리 일족은 인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싸웠기 때문이다.”

“아니.”

하지만 티탄의 말에 남궁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너희는 유일하게 대리자 일족 중 직접 전투에 참여한 종족이지.”

“……그래서?”

“위상이나 대리자 일족이나 모두 인간에게 직접적인 관여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계시자가 존재하고 계약자가 존재하는 것이지.”

[그런데 거인족은 직접 나서서 싸웠더군요. 아주 열심히 말입니다.]

규류가 남궁의 말을 보탰다.

“아직까지 아무도 의심하지 않더군.”

“흥, 뭐가 의심스럽지? 어째서 계약자가 아닌 대리자 일족이 직접 나섰는가에 대해서 말인가? 우리는 인간을 위해…….”

“아니.”

그 순간 남궁은 티탄의 말을 잘랐다.

“어떻게 직접 싸울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무슨…….”

툭-

남궁이 바닥에 굴러다니던 인간의 뼛조각을 그의 앞에 던졌다.

“너희가 직접 마물을 사냥할 수 있었던 건 일족으로서가 아니라 참가자의 입장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니까.”

목소리에서 지독한 살기가 느껴졌다.

“인간을 먹어 치웠으니까. 네놈들 배 속에 삼켜진 인간의 영혼이 카니발에 적용된 것일 뿐.”

솨아아악……!!!!

동시에 남궁의 등 뒤로 4명의 영혼 병사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분명 다른 이들이 눈치채기 전까지 몇 번이라도 더 그 짓거리를 반복했겠지. 그렇게 살아남은 인간들을 너희들의 배 속에 우겨 넣기 위해서.”

“……크크크!!!”

“너희는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직접 나선 게 아냐. 인간이란 먹잇감을 마물에게서 지키기 위함이었을 뿐.”

티탄이 괴성과 함께 거대한 주먹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쿠그그그그……!!

그러자 그의 손 위로 두터운 해머가 나타났다.

“그래서?”

콰앙!!!!

그 순간, 거대한 크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로 티탄이 튀어나가듯 남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용케 알아차린 모양이지만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냐. 설마 전쟁이라도 일으킬 생각인가.”

아스와 함께 영혼 병사들이 티탄을 막아섰다.

퍼억-!! 카가가강!!

카가가강--!!!

병사들의 무기가 사방에서 그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과연 대리자 일족 중 최강이라 불리는 거인의 두터운 피부는 문지기들과 달리 흠집도 나지 않았다.

[하…… 하하.]

그리고 그의 앞을 규류가 막아섰다.

[맞습니다.]

“……?”

갑작스러운 규류의 말에 티탄은 인상을 찡그리며 휘두르던 해머를 멈춰 세웠다.

“뭐라고?”

[전쟁하자고.]

퍼억-!!!!

있는 힘껏 내지른 주먹이 티탄의 눈에 꽂혔다.

[전쟁하자고, 새끼야!!]

“……지금 장난치는 거냐. 규류. 고작 너 따위가 팔각전쟁을 입에 담아?”

하지만 거인은 그의 전력을 다한 공격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눈을 껌뻑일 뿐.

“죽고 싶나?”

[하, 하하…… 그게…….]

자신을 바라보는 외눈의 시선을 피한 규류가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남궁을 바라봤다.

[이, 이렇게 하면 됩니까? 난 이제 진짜 죽었다…….]

짜악-!!!!

티탄이 손아귀를 주먹 쥐자 얼굴 앞에서 맹렬한 소리가 터졌다.

[헉, 헉……!!]

그리고 규류의 사지가 그의 손에 터지기 바로 직전, 그의 목덜미를 잡아당긴 것은 남궁이었다.

“규류, 이형의 왕이 되려면 배짱을 키워야겠다. 고작 이 정도로 쫄지 마.”

[와씨…… 죽을 뻔했네.]

“피해.”

남궁은 규류의 머리를 가볍게 두들기며 말했다.

콰아아앙!!

티탄의 해머가 두 사람이 있던 자리를 완전히 날려 버렸다.

[흐미!!!]

규류는 볼썽사나운 자세로 앞으로 고꾸라지듯 뛰어들어 티탄의 공격을 피했다.

무아경(無我經) - 1서(書)

남궁의 검이 티탄의 해머가 달린 손잡이에 정확히 꽂혔다.

으즈즈즉……!!

무아경의 힘을 실은 검날이 해머의 손잡이에 닿는 순간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

“……어쭈?”

부서진 해머에 뒤로 살짝 물러섰던 티탄이 바닥에 떨어지는 해머의 머리 부분을 낚아챘다.

무아경(無我經) - 2서(書)

마치 돌덩이를 내려치는 것처럼.

티탄이 해머의 머리 부분을 있는 힘껏 남궁을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그 찰나 남궁의 검이 다시 한번 기묘한 방향으로 꺾이면서 티탄의 손목을 찔렀다.

퍼엉-!!!

그러자 규류의 공격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던 티탄의 피부가 폭발했다.

퍼억!!!

하지만 티탄은 자신의 손을 날려 버린 매서운 공격에도 멈추지 않고 반대 주먹으로 남궁의 가슴을 쳐올렸다.

“크흑!!!”

수 미터를 날아오른 남궁이 바닥에 처박히자 그의 입에서 붉은 핏물이 주르륵 흘렀다.

“무휘의 힘……? 아냐. 놈의 술법이라 한들 내게 통하지 않을 터. 결이 다르구나.”

티탄은 마치 드릴로 뚫은 것처럼 구멍이 뚫린 자신의 팔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사라진 야차의 비전을 찾은 건가?”

“사라졌던 게 아니라 찾지 못했던 것뿐이니 그렇게 놀랄 필요도 없는 일이지.”

바닥에 처박혔던 남궁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자신만만했던 이유가 있었군. 하지만 야차술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과연 그 몸으로 얼마나 쓸 수 있을까?”

“그건 해보면 아는 거고.”

“하, 하하…… 귀면피? 야차 일족의 보물까지 가져온 것을 보니 아주 단단히 작정을 하고 왔구나.”

티탄은 남궁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 나서지 마라.”

그의 말에 거인들이 뒤로 물러나 경기장처럼 둥글게 그들을 둘러쌌다.

그들의 얼굴엔 일말의 패배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무휘조차 얻지 못한 야차의 술법이 과연 어떤 것인지 직접 보겠노라. 네놈의 술법을 맛보고 나면…….”

쾅! 쾅! 쾅!!!

분위기를 고양시키듯 거인들이 일제히 발을 굴렀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지면이 거칠게 떨렸다.

“다음 차례는 무휘의 목을 비틀어 놈을 씹어 먹을 일뿐이겠구나!!”

폭발하듯 티탄의 주먹이 남궁을 향해 쏟아졌다.

차자자작……!!

남궁이 아슬아슬하게 티탄의 공격을 피하며 그의 손목에 검을 베었다.

“후웁……!!”

단단하고 질긴 피부에 남궁의 검이 이따금 튕겨 나가긴 했지만, 그의 검은 차곡차곡 티탄에게 대미지를 주고 있었다.

‘정말 자신이 있었던 건가? 그래도 이상한데……? 어떻게 남궁이 티탄을 이길 수 있는 거지?’

아무리 귀면피를 사용하고는 있다 해도, 고작 3번째 문까지 공략한 인간이 거인족의 수장과 붙는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뭔가…… 있다.’

일을 저지르긴 했지만 규류는 사실 반신반의했었다.

카강!!

카가가가강--!!!

계속해서 이뤄지는 경합.

티탄의 공격이 허공을 찔렀지만 남궁은 종이 한 장 차이로 그의 주먹을 피하며 검을 찔러 넣기를 반복했다.

“왜……!!!”

시간이 흐를수록 티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맞질 않는 거냐!!”

그의 공격은 매서웠다.

한 방, 한 방이 엄청난 힘을 가졌을 뿐더러 분명 남궁보다 빠르고 정확하며 날카로웠다.

하지만,

“거인족의 괴력은 일기당천이지만 너희들의 능력은 딱 그것뿐. 술법이나 요력 같은 이형의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순수한 힘뿐이지.”

콰가가가강!!!

그에 비해 남궁은 행동은 단조롭지만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완벽하게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마치 미리 예측하고 있는 것처럼.

“그냥 주먹질에 불과하단 말이야.”

‘느리다. 수백의 인간을 먹어 치웠던 전생의 네놈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빠르고 강했으니까.’

대리자 일족 중 최강이라 불리는 티탄이었지만 전생의 그를 아는 남궁의 눈엔 그저 한없이 부족할 뿐이었다.

푹-!!

남궁은 티탄의 공격을 피하며 검을 한 번씩 찔러 넣었다.

사실상 큰 대미지는 없었다.

기껏해야 작은 생채기에 불과했다.

모기가 무는 정도, 아니, 티탄의 입장에서는 그것도 안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얄팍한 공격이 쌓여 갈수록 티탄의 성질을 건드리기는 충분했다.

푸욱-!!

그때였다.

수십, 수백 번을 티탄의 피부만 찌르던 남궁의 검이 처음으로 조금 더 깊게 박혔다.

“퉷-”

그 순간 남궁이 참았던 숨을 뱉어냈다.

[설마…….]

규류는 그의 검이 조금 더 박힌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미 상처가 난 부위에 다시 한번 검을 찔러 넣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을 때,

꿀꺽-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네, 네놈…….”

티탄은 자신의 옆구리에 박힌 남궁의 검을 바라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두어 번 더 하면 되겠어.”

남궁은 처음으로 3분의 1쯤 박힌 검을 뽑아내며 그를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몇 번이라도 쑤셔주마.”

움찔-

그 순간, 티탄은 전신에 나 있는 수백 개의 생채기들에서 처음으로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건 검을 찌를 표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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