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270)

94화

[거, 검묘요?! 자, 잠시만요. 형님……!!]

규류는 남궁의 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허둥지둥 말을 내뱉다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계약자라도 대리자 일족이 인간에게 형님이라니. 그러다 위상들에게 한 소리 듣는다.”

[아, 아니. 형님이 아니라…… 여튼 검묘는 절대로 안 됩니다!! 거기가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아니까 하는 소리지.”

[통천루(通天樓)가 야차족의 보물이 보관되어 있는 성역이라면 검묘(劍墓)는 금역이라굽쇼! 거긴 야차들도 절대로 가지 않는 곳입니다.]

“난 인간이니까.”

[어휴, 그런 뜻이 아니잖습니까.]

규류는 남궁의 대답에 이마를 집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곳이 금역이라는 것도, 가장 위험한 곳 중에 하나라는 것도 잘 알아.”

[그런데요?]

“하지만 가장 강력한 무기가 있는 곳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남궁은 라칸하임의 안쪽으로 걸어가며 규류를 바라봤다.

“악귀검(惡鬼劍).”

에픽(Epic) 등급의 무구 중에서 최상위.

현 시점에서 위상이 수여한 무기인 알렉의 별해검보다도 높은 등급이었다.

[헐…… 미친!! 거기까지 아십니까?]

규류는 그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봤다.

[그렇구나. 아하, 알겠네. 아무래도 회귀 전에 그곳에 가보신 모양이군요?]

남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악귀검을 써보셨습니까?]

“아니. 얻지도 못했는걸.”

[그래도 가긴 가셨나 보구나. 그렇다면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오신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네요. 언제 가보신 겁니까? 카니발이 시작되고 5년? 아니, 10년? 적어도 그 정도는 돼야 검묘의 사기(邪氣)를 버틸까 말까 할 텐데 말입죠.]

그의 대답에 규류는 회의적인 얼굴이 되었다.

[하긴, 뭐 그게 중요하겠습니까. 얼마나 지난 뒤에 검묘에 가신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지금보다 강한 시기였겠지요. 제가 감히 드릴 말씀은 과거의 자신을 믿지 말라는 겁니다.]

“무슨 의미지?”

팔짱을 낀 채로 마치 가르치듯 규류가 말했다.

[지금 그곳에 간다면 절대로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말입니다.]

“친절하군. 역시 넌 착한 녀석이야.”

[아, 아니거든요?]

“근데 말이 너무 많다.”

하지만 걱정하는 규류와 달리 오히려 그의 말에 남궁은 묘한 자신감을 보였다.

“검묘는 확실히 전생의 나도 실패했던 일이야. 내가 도전하려는 건 전생의 내가 준비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의 내가 할 수 있기 때문이지.”

[준비할 수 있는 거요?]

쿠그그그그…….

남궁은 서서히 열리는 라칸하임의 창고를 바라봤다.

“가령 그때는 사라져 얻을 수 없었던 거인족의 보구 같은 것.”

서고 같았던 야차 일족의 통천루와 달리, 뜨기 힘들 정도로 번쩍거리는 수많은 보물들이 쌓여 있는 라칸하임의 창고를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오싹-

그 순간, 알 수 없는 희열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보상의 시간이었다.

* * *

[와…… 내가 진짜 거인족의 왕이 된 건가? 미쳤네. 미쳤어. 키킥.]

규류가 라칸하임 창고의 손을 가져가 문을 열며,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나 자신의 손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직 제대로 수장의 자리에 오른 것도 아니니 설레발은 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에헴, 어쨌든 이제 같은 선상에 있는 것 아닙니까. 거인족의 수장 자리를 제가 아니면 맡을 사람이 없으니 말입죠.]

-글쎄.

여왕은 콧대를 세우는 규류를 향해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규류, 자랑은 나중에 아빠한테나 가서 하고 창고 안이나 살펴. 수장만이 열 수 있는 비밀 장소가 있을 거다.”

[끄응…… 알겠습니다. 근데 혹시 오해하실까 봐 얘기하는데 제가 막 아버님에 목매는 그런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그래. 알겠으니까 자랑은 나한테 하지 말고 가서 해.”

[아니, 그러니까…….]

규류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우우우웅…….

그가 손을 뻗자 창고 안에 쌓여 있는 보물들이 하나둘 반응하기 시작했다.

[끄응, 거인 녀석들 좀 정리하고 살지. 이건 뭐 그냥 쓰레기 쌓아 놓은 것 같네.]

규류가 중얼거리며 정신을 더욱 집중했다.

촤르르륵……!!

그러자 산처럼 쌓여 있는 보물들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그 안에 번쩍이는 보물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바윗덩어리 하나가 덩그러니 나타났다.

“오, 있다 있어.”

남궁은 보물들 사이에서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바위를 보며 반색했다.

넘버링 3.

이름 : 태고의 씨앗

등급 : 레전더리(최초)

▶ 거인계를 구축하는 거인족의 보구.

▶ 씨앗이라 불리지만 거대한 바위를 닮았다.

▶ 최초 거인족의 수장, 골리아가 이곳에서 탄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 소지자의 신체 방어력을 증가시킨다.

▶ 발동 시 30초간 전신에 모든 공격을 무효화하는 광석을 두르게 된다.

▶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다.

▶ 뭔가 숨겨진 힘이 더 있을 것으로 보인다.

[거인족의 보물이 바윗덩어리라니…… 아니지. 거인족답다고 해야 하나?]

규류는 씨앗을 퉁퉁 치며 말했다.

“이걸 가져가고 싶은데. 사이즈를 좀 줄일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남궁의 말에 규류가 자신 있게 말했다.

우우우우웅……!!

그가 손바닥을 펴서 씨앗 위에 내려놓자 순식간에 거대한 바위가 손바닥만 한 자갈로 바뀌었다.

[여기 있습니다.]

-볼만하네요. 일족의 보물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인간에게 바치는 수장도 없을 텐데.

[다 상부상조 아닙니까.]

규류는 여왕의 도발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오히려 입술을 씰룩였다.

[다른 건 필요 없습니까?]

“이거면 충분해. 거인족의 무구들은 하나같이 무거워서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건 없거든. 사실 이걸 가지고 있는 것도 버거운 일이야.”

사실 씨앗의 크기는 줄었지만 무게는 그대로였다. 그냥 보기에는 평범하게 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살펴보면 씨앗을 쥐고 있는 남궁의 팔을 검은 연기가 감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령의 힘을 모두 동원해서 들고 있는 것이다.

-호수는 어떻게 할까요?

여왕은 조심스럽게 남궁에게 물었다.

거인족의 일이 마무리되자 이제 그녀는 남궁이 자신의 목적을 이뤄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천하의 페어리 퀸이 인간에게 굽신거리다니. 진짜 이거야말로 진풍경이로구나.’

규류는 자신의 처지는 잊은 듯 여왕의 모습을 보며 씨익 웃었다.

“거긴 좀 기다려. 거긴 4번째 문을 처리하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아.”

-하지만…….

“규류, 용아 대신에 거인족들을 호수의 파수꾼으로 두도록 해. 나가 여왕도 거인족과 싸우면서까지 무리하게 호수를 빼앗으려고 하진 않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쓸 만한 놈들로 추려서 처리하겠습니다.]

“좋아.”

남궁은 만족스러운 듯 씨앗을 쥐고서 창고 밖으로 나섰다.

콰앙-!!

그때였다.

창고를 나서려던 남궁이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며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

바닥에 뻗은 남궁의 모습에, 야차와 요정의 경악에 찬 얼굴과 함께 정적이 흘렀다.

“뭐냐.”

[어, 어…… 얼레? 자자자자!! 잠시만요.]

규류는 욱신거리는 코를 문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은 남궁을 보며 당황스러운 얼굴로 황급히 뭔가를 뒤지기 시작했다.

[아, 여기 있네요!! 신규 왕의 규율. 대리자 일족이 타 일족의 수장이 되었을 시 최소 50년 동안은 수장의 권한이 축소된다…….]

그는 소환한 두꺼운 규율서를 들고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급히 대답했다.

[제약의 시기 동안 점령한 일족의 창고에서 반출할 수 있는 보구는 에픽 등급으로 제한…… 된다.]

“……빨리도 말한다.”

남궁은 규류의 이마를 한 대 쥐어박으며 말했다.

[하, 하하. 죄송합니다.]

“흐음…… 어쩐다. 놈을 잡기 위해선 이게 필요한데…… 가져 나갈 방법이 없나?”

남궁은 들고 있던 태고의 씨앗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그 순간 둘의 대화를 듣던 여왕이 나섰다.

-점령한 일족의 무구와 능력을 쓰는 데 기간의 제한을 둔 것은 팔각전쟁이 한쪽으로 너무 빨리 치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귀찮은 규율이지만 납득은 가는군.”

남궁이 들고 있는 씨앗이나 요정족의 세계수 지팡이처럼, 대리자 일족들은 하나씩 레전더리급의 보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보물들 역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를 뒤집을 수 있는 강력한 것들이었다.

쉽사리 팔각전쟁을 끝내지 못하도록 위상들이 정해놓은 규율. 그 이유는 전쟁의 승자가 가지는 보상 때문일 것이다.

‘팔각전쟁의 승자는 위상으로 승격될 수 있다. 즉, 녀석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나눠 주기 싫은 거겠지.’

위상들로서는 팔각전쟁이 승자 없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이 더 좋을 테니까.

참으로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방법은?”

-두 개 이상의 일족을 점령했을 시 일족의 강함을 증명하는 것이 되어 그 보상으로 제약의 시기가 무효화됩니다.

“흐음…….”

여왕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4번째 문의 보스를 잡기 위해서 씨앗이 필요하다면 대리자 일족 하나를 더 점령해야 합니다. 어떠십니까? 역시 나가 일족을 잡는 게…….

“딱히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네?

“잔머리 굴리지 마.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방법이 그것만이 아니라는 거.”

남궁이 여왕의 작은 턱을 손가락으로 잡아채 자신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여왕의 목소리가 떨렸다.

열에 아홉, 아니, 열에 열은 그녀도 사실 남궁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호수는 확실하게 받아준다.”

남궁이 그녀를 바라봤다.

“대신 요정족을 넘겨.”

* * *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거인계에서 돌아온 남궁이 지금 있는 곳은 서울역의 카페였다.

소민은 아직 요정계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나머지 인원들도 적색지대에 있는 상황이었기에, 혼자인 그는 누군가 기다리며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세계연합 Nest 창설!!

-연합 본부의 장소는 영국 런던으로 정해져…….

-알렉 트라만을 필두로 성녀(聖女) 에이라 미쉘의 지원 아래 대대적인 능력자들 집결 중!!

-영국 당국은 세계 국가와 연합하여 시민들의 안전을 최우선시하겠다 공표……!!

“……어쭈? 이 새끼 보게?”

인터넷뿐만 아니라 각종 메스컴에서 소란스럽게 울려대는 속보를 보며 남궁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스트가 영국에 설립되었다고? 알렉 이 자식, 분명 경고를 했는데…….”

하지만 기사를 보고 있는 그의 웃음 속에는 어쩐지 기분 나쁘거나 어이가 없다는 듯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내가 없는 동안 결국 일을 저질렀군.”

오히려 남궁은 예상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뚜…… 뚜…… 뚝-

신호음이 가다가 끊겼다.

“빌어먹을.”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끊어지는 신호음에 남궁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알렉 트라만. 나는 네놈이 뒈지든 말든 상관 안 해. 단지 네놈의 알량한 명예욕 때문에 벌어질 끔찍한 일이 싫을 뿐이지.’

-현재 9시 30분. 서울행 도착 KTX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안내 방송이 들렸다. 남궁은 뜨겁지도 않은지 컵에 있던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여기다.”

카페를 벗어나 플랫폼에 내려간 남궁이 열차에서 내리는 승객들 중 한 명을 향해 소리쳤다.

“형님.”

“그래. 오느라 고생했다.”

남궁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는 남자는 다름 아닌 포항에서 그를 도왔던 저격수 김창환이었다.

“다른 애들은요?”

“적색지대에. 지금은 소환수의 밤이잖아. 소환수를 얻어서 다들 귀환할 거야. 그러고 보니 넌 왜 적색지대에 안 갔지?”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해서요.”

“그래도 있으면 좋을 텐데.”

“소환수에게 보호받기보다 보호받을 필요 없이 완벽하게 숨는 게 더 나으니까요.”

“너다운 대답이네. 어차피 소환수의 밤은 계속되니까,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때 가도 괜찮겠지.”

남궁은 창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부대 정리를 하고 난 뒤에나 올라오려고 했는데 급하게 부르시다니요.”

“진수혁이라고 알지?”

순간, 창환의 표정이 굳어졌다.

“진수혁? 설마 정보사 출신이었던 그 미친개를 말하는 겁니까?”

남궁의 기억에는 그저 무장공이라는 이명을 가진 자로 남아 있지만, 창환에겐 좀 달랐다.

“알다마다요. 711이 해체되고 나서 그 새끼가 얼마나 들쑤시고 다녔는지 아십니까.”

“알아. 박효주에게 그 얘긴 들었어. 해체된 책임으로 널 걸고넘어졌다지?”

“……빌어먹을. 711이 해체된 게 왜 저 때문입니까? 그날 일 때문이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네겐 미안하게 됐다.”

남궁은 창환이 말하는 그날을 떠올리기 싫은 듯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게 다 형님께서 잠적하셨기 때문이라고요. 형님 명령이 없으니 그 새끼 죽이지도 못하고.”

“……뭔가 포인트가 이상한데?”

“여튼, 생각해 보니 화나네. 명훈형님하고만 연락을 계속 주고받았다면서요? 뭐, 우리 해체와 별개로 형님 잠수 타신 거야 형수님 때문이라 잘 알지만…….”

창환은 멋쩍은 듯 콧등을 쓰윽 문지르며 말했다.

“그래도 남아 있던 동생들 좀 챙기시지 그러셨습니까. 기다렸다고요.”

남궁은 그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 자식은 왜요?”

“부탁할 일이 있어서.”

“글쎄요. 꽉 막힌 놈이라서 누구 부탁을 들어줄 위인은 아닌 것 같은데…….”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거든.”

남궁은 손가락을 펼쳤다.

“7천만.”

“……네?”

“영국의 인구수야.”

창환은 무슨 뜻이냐는 듯 그를 바라봤다.

“모두 죽을 거다.”

“……?!!”

4번째 지옥문이 열렸을 때, 네스트의 창설은 없었지만 인류의 구원자라 칭송받던 알렉 트라만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과 함께 스스로 보스의 타깃이 되었다.

결과는 비참했다.

전멸(全滅).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장이 되었던 영국은 완벽하게 지도에서 사라졌고, 알렉 트라만만이 가까스로 도망치듯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인류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날의 일을 그렇게 명명했다.

‘런던의 악몽(London’s Nightmare)’.

꽈악-

남궁은 주먹을 쥐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