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찰칵-! 찰칵-! 찰칵-!!
“버킹엄 궁전을 세계연합 본부로 지정하신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셨을 텐데요!!”
“현시점부터 네스트가 UN의 업무를 위임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만!”
기자회견장에 쉴 틈 없이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와 함께 수많은 기자들이 단상을 향해 질문을 뱉어내고 있었다.
“모두 정숙해 주십시오.”
단상에서 들려오는 빠르지 않고 적당히 품위를 갖춘 목소리에, 소란스러웠던 회견장이 조용해졌다.
‘그래. 이거지.’
기자들을 바라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 각국의 언론들이 영국을 주목하고 있다. 이번 기회야말로 선두로 나갈 수 있는 최고의 기회.’
마물의 침공에 위협받던 순간, 알렉 트라만이 돌아오지 않음에 모든 것이 끝났다 여겼다.
하지만 3번째 문이 닫히고 난 뒤, 알렉의 기자회견에서 그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계획된 것이었다니.
그녀는 잠깐이지만 알렉 트라만을 원망했던 것을 잊기로 했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지금부터니까.’
여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버킹엄 궁전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역사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곳에 세계연합이 창설된다는 것은 오히려 왕실로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찰칵! 찰칵! 찰칵!!
세계는 영국을 중심으로 흐르게 될 것이다.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왕실은 1번째 문이 열린 순간부터 많은 능력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계시자인 알렉 트라만 님을 필두로 100여 명이 넘는 능력자들을 포섭.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클랜인 유니버스 클랜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것이 세계연합 창설에 큰 기여를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저희는 앞으로도 전 세계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많은 능력자들을 발굴, 육성하여 평화를 위해 만전을 기울이겠습니다.”
홀 안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둥지(Nest)로 오십시오.”
그리고 그 목소리 속에 그녀의 야심도 함께 울렸다.
“영국과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
퍼억---!!!!!!!
“……!!!”
“……!!!”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단상을 지켜보던 기자와 카메라맨들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아무런 말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주르륵…….
단상에서 흘러나오는 피.
그것이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야심차게 기자들을 향해 말하던 여왕의 것임을 깨달았을 때.
회견장은 걷잡을 수 없는 패닉에 빠졌다.
“여, 여…… 여왕이 죽었다!!”
“괴, 괴물이다!!”
“으아아아아악……!!!”
즉사한 여왕의 시체 위에 서 있는 검은 인영을 향해 비명을 지르며, 회장 안에 사람들은 출구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졌다.
“누, 누구냐!!!”
왕실 경호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급히 검은 인영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탕! 탕! 타앙!!!
회견장에 울리는 총성.
[…….]
하지만 정작 총탄의 목표인 검은 인영은 그들을 하찮다는 듯 바라봤다.
[이상하군. 3번째 문까지 살아남은 놈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런 허접한 무구를 사용한다?]
“……컥!!!”
검은 손이 앞에 서 있던 호위대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무, 무슨 속도가…….’
‘보이지도 않았어.’
순식간에 수십 미터를 좁혀 자신들 앞에 다가온 그자를 보며 호위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희들 뭐지?]
우드득-!!
손아귀에 힘을 주자 잡혀 있던 호위대의 목이 마치 성냥개비를 부러뜨리는 것처럼 힘없이 꺾였다.
[마치 온실 속 화초처럼 연약하기 짝이 없는 생명력이로다.]
검은 인영은 들고 있던 호위대의 시체를 내던지며 말했다.
쿵- 쿵- 쿵-
“어, 어떻게…….”
“소환수의 밤이 끝나지도 않았고…… 아직 하늘에 문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마물이……?”
피식-
호위대의 떨리는 목소리에 검은 인영의 입꼬리가 울렸다.
[태평한 소리로구나. 지금 우리가 네놈들과 소꿉놀이라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느냐. 카니발이 언제부터 네놈들의 사정을 봐주면서 시작했지?]
“커헉!!!”
호위대의 몸이 기역자로 꺾이고, 그의 몸을 뚫은 인영의 손에 붉은 심장이 들렸다.
툴썩-
심장이 떼어진 호위대의 시체가 바닥에 쓰러졌고.
“으, 으아아악!!”
마지막 남은 한 명이 동료들의 죽음에 전의를 잃고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망치려 했다.
촤아아악……!!
그 순간 검은 인영이 들고 있던 심장을 내던졌다.
콰앙-!!! 파직!!
“헉, 헉…….”
포탄처럼 날아간 심장이 터지면서 사방으로 잔해들이 번졌다.
“어서 나가십시오.”
“가, 가…… 감사합니다!!”
호위대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듬직한 거구의 흑인을 알아보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알렉의 오른팔이자 유니버스 클랜의 서브 마스터, 한슨 마티오였다.
철컥-!!
한슨이 자세를 잡자 그의 건틀릿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렸다.
[제법이군.]
인영의 안광이 빛났다.
콰아아앙---!!!!
“……!!!”
그리고 한슨의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검은 인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처박힌 한슨의 다리를 집어 들어 다시 한 번 건물의 벽으로 내던졌다.
“……쿨럭!!”
미끄러지듯 날아가는 그와 부딪힌 관객석의 의자들이 사정없이 부서졌다.
쿠그그그그……!!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 가까스로 몸을 날린 한슨은 잔해에 깔리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크악!!”
하지만 밀려오는 강렬한 통증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크, 크윽…….”
그의 옆구리에 튀어나와 있는 새하얀 뼈들.
한슨은 그것이 부러진 자신의 갈비뼈가 살점을 뚫고 나온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적색지대에서 얻은 체력과 방어 룬에 최대한 투자를 했는데 고작 일격에……?’
숨을 쉴 때마다 부서진 뼈들이 요동 쳤다.
더 이상 싸울 수 없다.
한슨은 눈앞의 적이 자신이 감당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흐음. 인간들 중에 너는 얼마나 강하지?]
“……뭐? 으아악!!”
[두 번 묻게 하지 마라. 그나마 개미 같은 힘이라도 있어 네게 기회를 주는 것이니.]
인영이 손을 비틀자 한슨의 팔 한쪽이 그대로 찢겨 나갔다.
우적- 우적-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한슨의 팔을 씹어 먹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크, 크윽…… 나보다 강한 사람들은 많다.”
[부디 그래야겠지. 나는 지금까지의 저급한 마물들과 다르다. 약간의 유흥만으로 기다려 주마. 너희 인간족 중에 가장 강한 자를 불러라.]
“너…… 누구지?”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한슨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잘못 본 걸까?
이상하게도 인영의 이마 위에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산양의 뿔 같은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꺼억.]
검은 인영은 팔을 모두 먹어 치우고서 입가에 묻은 핏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나타스(Natas).]
“크아아아악!!”
그는 튀어나온 한슨의 갈비뼈를 장난감 다루듯이 이리저리 쑤시며 즐거운 듯 말했다.
[4번째 문의 보스…… 아니, 마왕(魔王)이다.]
* * *
-기자회견장 습격!!!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피살!!!
-전조도 없이 시작된 4번째 문?
-인류에게 선전 포고를 한 최초의 보스 몬스터!!
-그는 정말 마왕인가?!
네스트 창설의 공식 기자회견이 있었던 날 일어난 사건에, 전 세계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대전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창환이 올라오는 속보로 채워진 핸드폰 화면을 보이며 말했다.
“아마 문이 열리기 전에 먼저 차원을 넘어온 거겠지.”
“그런 게 가능한가요? 마물은 문을 통해서 나오는 게 아니었습니까?”
“지옥문이 열리면 마물이 소환된다. 카니발의 규율이니 그건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꼭 문을 통해서만 마물이 나온다는 규율은 없어.”
남궁의 말에 창환은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마왕은 환술계 마물 중에서도 최고위 능력을 가진 마물이니까. 차원 이동쯤이야 불가능한 것도 아냐.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될 수 있다.”
“문을 닫았다고 해도 절대로 안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군요. 단 하루도 평온한 시간을 주지 않을 샘인가. 진짜 엿 같은…… 세상이 되었네요.”
‘생각보다 빠르다.’
분노하는 창환과 달리 남궁은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왕(魔王)…….’
남궁은 놈의 얼굴을 떠올렸다.
666,666마리의 대마족을 사냥했던 그가 유일하게 사냥하지 못했던 마족.
놈은 지금까지의 마물과는 분명 격이 다르다.
대리자 일족이 될 수 있었을 만큼 그들은 하나의 계를 가진 거대한 군세였다.
‘호시탐탐 이 순간을 기다려 왔겠지. 내 회귀를 알아차리고 있었을 테니까.’
단순한 마물이 아닌 대리자 일족 급의 마물이라면 충분히 자신의 회귀를 인지하고 있을 터.
그 회귀가 일족의 죽음으로 이뤄진 것이라면 절대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놈은 분명 나를 찾고 있겠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회귀자가 가장 강할 거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 그런 제안을 한 것일 테다.
-소, 속보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살해한 마물이 현재 버킹엄 궁전 앞 기념비, 빅토리아 메모리얼 앞에 나타났습니다!!!
-저, 저게 무슨 짓일까요!!!
-마물이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신을 기념비 꼭대기에 걸고 있습니다!!
웅성- 웅성-
기자에 비명과도 같은 외침.
모두 같은 영상을 보고 있는 듯 기차 안은 소란이 일어났다.
기념비 꼭대기 위에서 승리를 상징하는 브리타니아 여신상의 뻗은 팔에 걸쳐져 있는 여왕의 시신.
콰직-!!
그리고 그 아래, 대영제국을 뜻하는 독수리상을 부수어 바닥에 내 던진 마왕은 자신을 향한 수많은 드론들을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콰아아앙--!!!!
“……!!”
그러고는 팔을 젓자 버킹엄 궁전과 함께 그 일대가 초토화되었다.
[들어라. 유흥의 즐거움은 그리 길지 않다.]
우우우웅…….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놀랍게도 일대에 쓰러진 사람들의 잘린 목이 하나둘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 숫자는 족히 1백이 넘었다.
[22시간을 주마.]
불타는 버킹엄 궁전 앞에 선 마왕이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그 안에 너희는 나와 싸울 자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서걱-!!
이번엔 그의 꼬리가 움직였다.
수백 미터로 늘어난 꼬리가 원을 그리자 건물들이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지금부터 이 도시의 인간의 목은 광장 안에 차곡차곡 쌓을 테니.]
런던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다음.]
촤아아아악---!!
놈이 궁전을 벗어나 천천히 걸을 때마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잘려 나간 머리들이 계속해서 하늘 위로 솟구쳤다.
-으아악……!!
-사, 살려줘!!!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
“…….”
남궁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이를 바득 갈았다.
런던의 인구는 약 800만 명.
놈이 인류에게 제시한 22시간의 유예.
1초에 100명씩.
찰나라고 불릴 만큼 짧은 순간이 지날 때마다 마왕은 런던의 목숨을 앗아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