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총리님. 백악관에서 온 연락입니다.”
“…….”
대전의 상황을 보고받던 총리는 핫라인을 통해 걸려온 통신에 살짝 얼굴을 굳혔다.
“무슨 일입니까.”
“지원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이번 차원문은 1개로 국한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적색지대 때의 일을 거론하며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자국을 방어할 병력이 필요하다 알렸습니다.”
쾅-!!!!
탁자를 내려치는 총리의 표정에 수화기를 들고 있던 비서실장이 움찔거렸다.
“다른 나라들은 어떻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알렉 트라만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라 영국은 패닉에 빠져 있고, 그의 치료를 이유로 에이라 미쉘은 한국이 아닌 영국행을 선택했습니다.”
비서실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UN의 입장도 같습니다. 이미 한국에는 5명의 계시자들이 있으니 현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최선을 다해? 어이가 없군. 그들이 한 게 뭐가 있다고!!”
“역대 차원문 중 최대 전력이 투입된 것이니 이 이상의 전력을 빼는 것은 국가 방어의 공백이 생긴다 하여…….”
“그만. 알겠네.”
총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비서실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지원을 원하지 않는다면 강요할 순 없지. 대신 UN에 공문을 보내게.”
“어떤……?”
“연합의 의사는 충분히 알겠다. 이번 4번째 마물은 더 이상의 지원 없이 우리 손으로 완료할 것이다. 하나 그 대신.”
비서실장은 총리의 말에 긴장한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그 대신, 앞으로 우리 역시 자국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둘 것이며 그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타국의 지원을 불허한다.”
비서실장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그의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초, 총리님. 그 전언은 다른 국가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과 매한 가지…….”
“적이라뇨? 저희 역시 UN에 소속된 국가로서 UN에 결정에 따라 자국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일 뿐입니다.”
총리는 말했다.
“그리고 정부는 그 의사를 적극 수용하여 앞으로 무엇보다 국민을 최우선시할 것입니다. UN을 비롯한 그 어떤 단체보다도.”
둘러말했지만 결국 총리는 앞으로 독자노선을 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총리께 이런 모습도 있으셨나…….’
능력은 있지만 모질지 못해 항상 사람 좋은 이미지가 강했던 사람이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는 인지도는 높아도 권력의 힘은 약하다는 평가가 강했다.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걸까.
비서실장은 예전과 달리 호기로운 그의 모습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은…… 안심이 되는구나.’
국회의사당이 폭발하며 주요 인사들이 모두 사라진 지금, 정부는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상황이었다.
구심점이 필요한 상황에서 총리가 과연 그 일을 잘 해낼지 의문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위기 상황인 지금 그 의문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조금 더 대한민국의 미래를 그릴 수 있으리라.
“전황은?”
“요새 외곽은 아직 박빙이긴 하나 그래도 조금씩 승세를 잡아 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요새 안인데…….”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미 군산 쪽에 함선들을 배치하였고 상공에도 비행대대들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대전 시내 안으로 포격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폭격과 포격을 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남궁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남궁 님은 저희들에게 있어 가장 주요한 전력입니다. 오히려 군부대의 지원 사격으로 피해를 입기라도 한다면 더 큰 위험을 초래 할 수도 있습니다.”
“크흠…….”
총리는 안타까운 듯 신음을 뱉어냈다.
“그의 말이 맞군.”
“……네?”
“스스로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고 말이야.”
“그래서 참악부대를 창설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으로는 부족해. 이번 대전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면 참악부대 이외에도 각 군의 병사들의 전력을 올리는 방안을 찾아야 할 걸세.”
“알겠습니다.”
비서실장은 허리를 숙여 대답했다.
“이번 대전 전투…… 남궁 님 덕분에 피해는 3번째 문 때보다 적지만 상황은 훨씬 더 좋지 않습니다.”
미력하다고 하지만 군의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혼자 싸워야 했다.
“……승리할 수 있을까요.”
접견실을 나서려던 비서실장은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글쎄.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를 믿는 것뿐이겠지. 그리고 국가가 개인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에 반성하고 그에게 힘이 되지 못하는 지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일세.”
“……강해져야겠군요.”
“그래. 그렇게 만들어야지. 전선에서 싸우는 그들을 위해서라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국력을 세우는 것이 우리가 해야 몫이니까.”
“긴급 회견을 준비하겠습니다.”
비서실장은 다짐을 새로이 한 듯 조금 더 확신에 찬 얼굴로 접견실의 문을 열었다.
* * *
[믿을 수가 없군…….]
[어째서 아직도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지……?]
대전 상공에 지옥문이 열린 지 일주일이 되었다.
60만이 넘는 마족들 중 어느새 10만이 넘는 수가 줄어들었다.
물론, 여전히 50만이란 엄청난 대군이 남아 있었고 대전을 지키는 사람들보다 마족의 수가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처음과 달리 공격하지 못했다.
이미 전의(戰意)가 꺾인 것이다.
“……이게 끝이야?”
마족의 시체 위에 서 있던 남궁이 마족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듬성듬성 이빨이 부러져 빈 곳이 있었고 턱뼈가 나갔는지 웃을 때마다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성한 곳이 있을 리 없었다.
격렬한 싸움의 흔적인 듯 사슬을 감고 있는 손목의 살점들이 너덜너덜하게 떨어져 뼈가 보일 지경이었고, 눈두덩이도 부어올라 제대로 앞이 보이지도 않았다.
“대단하신 마족들도 결국은 공포 앞에선 모두 똑같아지는군.”
[……네놈.]
마족들은 으르렁거렸지만 누구 하나 먼저 다가가는 이는 없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고작 우리가 인간 하나에게 이렇게…….’
그들은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지만 오로지 무력(武力)만으로 자신들을 죽인 남궁의 힘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놈이 한 말이 맞았어.’
‘우리의 약점을 모두 알고 있다.’
‘저런 녀석을 어떻게…….’
툭 하고 건들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은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공포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남궁이 이미 자신들을 한 번 죽여본 사냥꾼이라는 걸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뭣들 하느냐!! 놈은 이미 체력이 바닥났다고! 우리를 죽인 놈이다!!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네가 오라고. 3일 전부터 주둥이만 놀리고 있는 네 말을 과연 저들이 들을까?”
꿀꺽- 꿀꺽-
“그루터기의 악마. 올가.”
남궁은 붉은 액체를 입안에 밀어 넣어 삼키고는 소리치는 마족을 향해 말했다.
“하긴, 너는 목이 잘려 나가 소멸되기 직전까지도 시끄러운 녀석이었지.”
[……닥쳐.]
올가는 남궁을 향해 으르렁거렸지만 그의 뒤에 있는 마족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 명심해. 내게 덤빌 생각이라면 네 왼쪽 겨드랑이에 자라 있는 가시를 조심해야 할 거야.”
웃으며 말하는 남궁이었지만 그 말 한마디로 여태껏 올가는 그에게 섣불리 덤비지 못했다.
겨드랑이에 자라 있는 가시.
그것이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이었으니까.
“너희 마족은 강하지. 하지만 그래 봐야 너희도 신이 아닌 일족에 불과해. 누구나 약점은 있다. 그리고…….”
남궁은 씨익 웃었다.
“그 약점을 내가 다 알고 있다는 게 문제지.”
빠득-!!!
올가는 쥐고 있는 검에 힘을 주며 이를 갈았지만 그래 봐야 상황이 달라지는 건 없었다.
“후우…….”
붉은 액체를 모두 삼키고 난 남궁은 조금 체력이 회복된 듯 숨을 토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벅- 저벅-
남궁은 마족이 떨어뜨린 검들 중 하나를 집어 걸음을 옮겼다.
“널리고 널린 게 무기라서 좋군.”
조금 전 그가 마신 액체는 사실 포션이 아니었다.
드워프의 전대 안에 있던 포션은 동이 난 지 오래였다.
[…….]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족들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쓰윽-
그는 입가에 묻은 액체를 손등으로 닦았다.
그건 마족의 피였다.
우드드득……!!
그러고는 검으로 마족의 다리를 잘라냈다.
서걱-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이번엔 마족의 다리에서 살을 발라내 씹어 먹기 시작했다.
“강력한 마력을 가진 너희 마족의 피와 살은 꽤나 괜찮은 회복제거든.”
우적…… 우적…….
아이러니하게도 마족의 눈에는 자신들보다 그가 더 괴물처럼 보였다.
[저런 걸 어떻게…….]
[괴물 같은 놈…….]
마족의 피와 살점이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을 먹는 것 자체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몸은 태생적으로 독성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피와 살점을 먹는 순간 일단 그 안에 담겨 있는 독이 먼저 육신을 공격할 것이었다.
그 아득한 고통을 이겨낸 뒤에야 피와 살이 녹아들어 독성까지 회복된다.
즉, 몸을 회복하기 전에 그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는 것.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고작? 살아남기 위해서…….”
남궁은 씹어 먹던 마족의 다리를 내던지며 말했다.
“이보다 더한 것도 했었어.”
[카아아아아악---!!!!!]
그때였다.
남궁의 발아래 거대한 써펀트가 소환되었다.
콰아아앙!!!
우그적……! 우그적……!!
녀석은 미친 듯이 날뛰며 주위의 마족들을 향해 커다란 입을 벌리며 거침없이 물어뜯기 시작했다.
[뭐, 뭐야?!]
[피해!!!]
용아의 등장에 비명 소리와 함께 마족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조금은…… 시간을 벌 수 있으려나.’
남궁은 날뛰는 용아를 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허세를 부렸지만 사실 서 있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그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해. 계약을 맺은 소환수지만 용아는 레비아탄의 습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보다 약하다 판단되면 녀석은 나를 노릴 수도 있어.’
런던에서 마왕과의 일전 후 입은 내상 때문에 영혼 병사들도 소환하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용아를 다루는 건 사실 꽤나 위험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마족과 싸우면서 그가 용아를 소환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남겨 뒀던 최후의 수.
[크아아악!!!]
[……사, 살려줘!!]
거기에 더해 남궁이 만들어놓은 집요한 공포가 마족들의 머리를 굳게 만들었다.
마족 역시 결국 생명체였다.
때로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순간이 생길 수 있다는 것.
남궁은 그 변수를 계획적으로 노렸다.
[빌어먹을……!! 그따위 술수에 넘어갈 것 같으냐!!]
[뭣들 하는 거냐!! 기껏해야 마물 한 마리에 불과한 것을!! 다들 싸워!!]
그래도 그 와중 남궁의 술수에 당하지 않은 올가를 비롯한 몇몇의 마족들이 남궁을 향해 달려갔다.
“제길…… 허세는 여기까진가?”
남궁은 이를 바득 갈며 검을 고쳐 잡았다.
‘이길 수 있을까…….’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자꾸만 감겨오는 눈꺼풀에 남궁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서 쓰러지면 정말 끝이었다.
그때였다.
쿠그그그그그……!!!
상공에 열린 차원문 아래 마법진이 생성되더니 공간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
마족들이 모두 그곳을 바라봤다.
[저, 저건!!!]
[마왕의 마법진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마족을 상대하는 것도 버거운 상황에서 마왕까지 등장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쐐기를 박는 일.
와아아아아아---!!!!
[마왕께서 강림하신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잔뜩 굳어 있던 마족들의 얼굴이 펴지면서 순식간에 엄청난 환호성이 일었다.
[드디어……!!!]
마법진을 확인한 올가는 남궁을 향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지긋지긋한 바퀴벌레 같은 새끼……! 하지만 이제 네놈도 이제 끝이다!!]
올가는 무기를 들어 올리며 남궁을 향해 외쳤다.
그 순간 남궁은 지친 듯 눈을 감았다.
[결국 네놈도 끝내 포기하고 말았구나……! 마족에게 덤볐던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절망 속에서 영원히 고통…….]
“좀 닥치지? 몇 날 며칠을 주둥이로 싸우는군.”
감았던 눈을 뜨며 남궁은 올가에게 말했다.
“절박하긴 절박했나 보구나. 대마족이란 녀석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다니 말이야.”
[……뭐?]
“지금 변한 게 고작 저 마법진 뿐일까?”
오싹-
올가는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쩌저적……!!
황급히 뒤로 물러선 그의 머리 위로 마법진이 열렸다.
쿠웅……!!!
그리고 뭔가가 떨어졌다.
[……!!!]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에 올가는 할 말을 잃은 듯 자신의 발아래 떨어진 그것을 바라봤다.
마왕의 머리였다.
그제야 그는 남궁의 말을 알 수 있었다.
피비린내로 가득한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향긋한 숲 내음이 흘렀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각----!!!!!
그 순간, 수십 다발의 붉은 뇌전이 대전을 강타했다.
화르르르르륵……!!!
놀랍게도 번개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정확히 마족들만을 노렸고, 마족에 닿는 순간 화염으로 변했다.
[크아아아악!!]
[아악!!!]
전신에 달라붙는 화염에 마족들은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들이 그러면 그럴수록 화염은 더욱더 깊게 놈들의 몸을 태워갔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마족들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뇌화(雷火).
이 세계에서 오직 단 한 명만이 쓸 수 있는 사상마법.
“이제 공기가 바뀌었다.”
남궁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