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거주지 확장서를 구입하였습니다.
“정말 이걸로 괜찮겠어?”
남궁은 야차 보따리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꺼내며 말했다.
타지마할에 숨어 있던 마족이 죽고 4번째 문이 완벽하게 닫히게 되자 살아남은 생존자들에겐 하나의 혜택이 주어졌다.
그것은 대리자 일족의 상품이 새로이 갱신된 것이었다.
물론, 보따리 속 아이템들은 헤드가 없으면 살 수 없으니, 그것만으로는 혜택이라고 할 수 없었다.
대신 갱신된 물품 중 1회에 한해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맹아의 이빨]
[부루슈 깃털로 만든 갑옷]
[팔라멘의 무릎 보호대]
남궁은 보따리 안에 새로 생긴 물건들을 훑었다.
‘할인은 레어 등급 이하의 물건만 가능하다는 조건이 달리긴 했지만, 지금 시점에선 이것들도 충분히 탐나는 것들이야.’
그리고 할인된 가격 역시, 지금까지 특별히 마물을 사냥하지 않고 살아남기만 했어도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다만 갱신된 물건의 대부분이 무기와 보호구라는 거지. 그렇지 않은 것들은 이것처럼 할인이 되도 가격이 비싸거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잡다한 것뿐.’
남궁은 확장서를 펼치며 생각했다.
결국 교묘하게도 혜택은 사람들에게 무기와 방어구를 구입하라 말하는 것과 같았다.
물론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그로 인해 인류의 전력은 분명 증강될 것이었고 마물과의 싸움에 도움이 될 것이다.
‘……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겠지.’
다음에 열릴 문과 자신들이 싸우게 될 대상이 누군지 알게 되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정말 지독한 놈들이야.“
하나하나가 결국 인간을 죽이기 위한 함정의 연속이었다. 우습지만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것들이라 남궁은 그러려니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희 모두 상의해서 결정한 일이니까요. 어떻게 변할지 궁금한데요? 어서 사용해 보세요.”
확장서는 할인된 금액이라고 해도 엄청난 헤드가 필요했다.
남궁 일행의 헤드를 모두 모아야 간신히 구입이 가능할 정도.
갱신된 목록 중에서도 최고가였다.
‘왠지 요르가 넣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긴 하지만…….’
어쨌든 일행은 무구나 방어구를 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이번이 아니면 확장서를 살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해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사람도 늘었는데 거점이 더 넓어지면 좋죠.”
“그러게 쟤는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남이사?”
남궁은 티격태격하는 명훈과 호준과 함께 새로이 합류하게 된 창환을 보며 피식 웃었다.
▶ 거주지 확장서를 사용하였습니다.
▶ 거주지로 판명되는 장소 : [고블린 성채]에 확장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남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 당신의 거주지가 확장됩니다.
쿠그그그그그…….
두루마리를 찢자 그들이 있던 성채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오……?”
마치 마법처럼 기둥들이 하나둘 솟아나고, 그들이 있던 방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 거주지 확장이 완료되었습니다.
▶ 승급 조건 : [2회에 걸친 거주지 보수]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고블린 성채의 등급이 올랐습니다.
▶ 고블린 성채의 등급이 (매직)이 되어 각종 부가 효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승급? 이런 게 있었나……?’
남궁은 나타난 알림을 보며 조금 놀란 듯 살짝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순식간에 변해 버린 거점을 바라봤다.
만덕수가 보강한 기둥과 벽은 그 위로 단단한 석재가 더해졌고 방의 개수도 늘어났다.
“우아……! 안에 공터도 생겼어요!!”
“저건 뭐지? 창고인가? 진열장도 있어!”
“여긴 식자재도 넣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다른 곳과 달리 시원해.”
그리고 놀란 남궁만큼이나 일행들은 변해 버린 거점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와…… 지하에 이런 훈련장이 생기다니. 공터 주위로 쳐져 있는 벽들만 좀 더 보강하면 이제 훈련장을 따로 가지 않아도 되겠는데요?”
명훈은 새로 생겨난 지하 공터를 보며 말했다.
“괜찮군.”
남궁은 짧은 감상평을 말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아도 그는 성채의 변화를 누구보다 기뻐했다.
전생이었다면 이런 거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전생에는 그저 마물들의 눈을 피해 숨기 바빴으니 딱히 거점 같은 것을 만들지 않았었다.
아니, 사실 거점은 있었다.
그것도 도시 곳곳에…… 수십, 수백 개나 넘게.
단지 몸을 숨길 수 있는 구덩이에 불과했을 뿐이지만 말이다.
이 세계에서 이렇게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장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집인가.”
“네?”
“아냐.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던 남궁은 명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훈련장이 생긴 건 우리에겐 행운이야. 소환수의 밤에서 얻은 소환수들을 단련시킬 수 있을 테니까.”
“스케줄을 짜도록 하겠습니다.”
명훈이 남궁의 생각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록산느의 연락처는 받아뒀지? 그녀에게 조언을 구해서 훈련표를 짜도록 해.”
“네.”
[크르르르…….]
남궁은 명훈의 옆에 서 있는 붉은 털을 가진 늑대를 슬쩍 바라봤다.
[적렴]
늑대의 머리 위에 푸른색으로 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좋은 녀석이야.”
레어 등급의 소환수였다.
명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녹색이름표를 가진 매직 등급의 소환수와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록산느 님 덕분입니다.”
“다음 문이 열리기 전까지 잘 길들여봐. 레어 등급 이상의 소환수는 성장폭이 높으니까.”
“알겠습니다. 당장 훈련장에 가봐야겠네요.”
전생의 최명훈은 소환수도 없었던 것을 떠올리면, 지금의 상황은 확실히 그때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형님.”
“응?”
“괜히 궁금해서 그런데…… 형님의 용아는 무슨 등급입니까?”
명훈이 멋쩍은 듯 물었다.
소민이를 제외하고 적색지대에서 소환수를 얻은 일행 중에서는 가장 높은 등급을 얻었으니 궁금한 모양이었다.
“글쎄.”
솨아아악……!!
남궁이 용아를 불러냈다.
원래의 거대한 크기가 아닌 손바닥만큼 작은 뱀의 모습은 귀엽기까지 했다.
[크르르르…….]
하지만 용아가 소환되자 명훈의 소환수인 적렴이 경계하듯 이빨을 드러내며 뒤로 물러섰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명훈이 다급히 소환수의 목을 감쌌다.
“없네.”
“……네?”
“등급이 없어.”
명훈은 남궁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용아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용아의 머리 위에는 보통의 소환수가 있어야 할 이름표 자체가 없었다.
“아무래도 위상들이 만들어놓은 소환수가 아니니까. 카니발의 규율에 어긋나는 녀석이겠지.”
“그 말은…… 정해진 성장폭도 없다는 말이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려나?”
남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명훈은 용아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형님과 어울리네요.”
명훈은 갈수록 더 격차가 벌어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번 부탁해서 미안하다. 아이들을 맡아줘.”
“걱정 마십시오. 그게 제 일인걸요. 그런데 오래 걸리시는 일입니까?”
“글쎄. 나도 잘 모르는 곳이라…… 가봐야 알 것 같다. 오래 걸릴 수도 있고, 반대로 찰나일 수도 있고.”
“……?”
“전장에서 빈손으로 싸울 수는 없으니까.”
남궁은 용아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오마.”
* * *
[남궁 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방정맞은 목소리에 남궁이 고개를 돌렸다.
“규류?”
[아이고, 아이고! 진짜 제가 다 속이 썩어갑니다! 썩어가요!!!]
엉망이 된 얼굴로 나타난 규류가 남궁의 다리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진짜 무슨 생각으로 그 많은 마족과 혼자 싸울 생각을 하신 겁니까? 진짜 죽을 수도 있었다고요!]
“죽을 뻔한 건 내가 아니라 네 쪽인 거 같은데? 얼굴은 왜 그 모양이 된 거야?”
[아…… 이거요? 검묘에 들어가려다가 입구를 막고 있는 용아귀들에게 처맞았습니다.]
“……자랑이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무기도 없이 마족들과 싸우랍니까? 보는 내가 다 심장이 쫄려서 원……!!]
“무기야 어차피 마족들이 들고 있는 것들이 잔뜩 있었잖아. 그것들을 주워서 쓰면 됐는데.”
[그래도 그렇죠…….]
“고맙다.”
[네?]
“가자.”
제2위계인 규류가 검묘에 들어간다는 건 목숨을 내놓는 일과 다를 바 없었다. 그만큼 위험한 일을 자신을 위해 하려고 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아, 아니, 그렇게 훅 들어오시면…… 가, 같이 가요!]
남궁의 말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던 규류는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대단하더군. 샘을 통해서 자네가 싸우는 모습을 봤네. 사슬을 사용했더군?]
“딱히…… 사용했다고 하기도 좀 그렇긴 한데.”
남궁은 손목에 감겨 있는 우(无)의 사슬을 만지작거리며 무휘에게 대답했다.
일족의 수장이 머무는 혈루궁엔 제1위계인 현류뿐만 아니라 야차 일족을 대표하는 수뇌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아무래도 남궁이 자신들을 찾을 걸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슬이 반응을 보인 건 마왕과 싸울 때 한 번뿐이었다. 그 뒤로는…… 내게 있어선 그저 아주 튼튼한 줄에 불과했지만.”
스르릉-
남궁은 사슬을 풀어 가볍게 휘둘렀다.
[그 한 번이 중요한 거다. 영원히 잠들어 있는 것은 죽은 것과 같다. 하나 한순간이라도 깨어난 것은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
무휘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마도 넌 사슬의 비밀에 좀 더 다가 간 듯싶군.]
“그래 봤자 내가 죽을 위기에 있을 때 도와주러 오지도 않았으면서.”
[하하, 사내가 꽁해서야 쓰나.]
“소득 없는 칭찬은 됐고, 검묘에 가고 싶은데. 문이나 열어주지?”
무휘는 가차 없이 자르는 남궁의 대답에 멋쩍은 듯 웃었다.
[……불가하다.]
“어째서? 내가 알기론 수장의 인가가 있다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 아니었나?”
[그러니까. 그 인가를 내줄 수 없다는 거다.]
“이거 생명의 은인에게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티탄의 심장이 없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데?”
[같은 맥락이야. 자네가 내 생명을 구해줬으니 나 역시 자네 생명을 구해주려는 것이지. 수장의 인가는 그저 문을 여는 것뿐. 그것과 별개로 인간이 검묘에 들어가면…….]
무휘는 단호하게 말했다.
[죽는다.]
“…….”
[…….]
그의 말에 홀 안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 하하! 아버님도 참!! 남궁 님이 뭐 보통 인간입니까? 검묘에 가려는 것도 다 자신이 있어서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자신 없어.”
[쿨럭.]
“죽다 살아난 기억밖에 없거든.”
[아, 쫌……!!]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시켜 보려던 규류는 남궁의 대답에 허둥지둥하기 바빴다.
[들어가 봤군?]
“입구만 잠깐.”
[신기한 일이군…… 그 말은 야차 일족의 인가를 인간에게 내려 줬다는 건데…… 누가 그랬지?]
“안 내려줬어.”
그리고 남궁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냥 들어간 거야.”
[……?!!]
그의 말에 무휘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럴 리가! 수장의 인가가 없으면 검묘를 찾을 수도 없어. 농담이 심하군.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인가를 받진 못했지만 위치는 들었다. 내가 아는 무휘는 죽는 순간까지 두 가지 일에 대해 슬퍼했지. 하나는 후계를 두지 못한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남궁이 규류를 슬쩍 바라봤고 그 눈짓을 알아차린 무휘는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처럼 표정이 굳어졌다.
“검묘에서 평생 검을 지키며 갇혀 있는 딸을 구하는 것.”
[……딸?]
[아버님께 딸이 있었나?]
웅성- 웅성-
그 순간 홀 안은 소란스러워졌다.
“안타깝게도 이미 멸족해 버린 뒤라 당신의 뒤를 이을 자식은 아무도 없었기에 첫 번째는 이룰 수 없었지.”
규류와 현류를 비롯하여 안에 있는 장로들까지도 모르는 일인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혈육이라도 구하고 싶어 일족의 비밀을 털어놓은 것일지 모르지. 하지만 그것도 유언만을 남긴 채 끝.”
[……내가 죽은 건가.]
“지금 살아 있잖아. 그거면 됐지.”
남궁은 무휘를 바라봤다.
야차 일족 0위계 연화.
꿀꺽-
무휘의 목젖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번째 역시 실패했다. 나 역시 검묘의 입구에 발을 잠시 들여놓은 게 고작. 간신히 살아 돌아온 게 전부였어.”
[그때도 실패했던 일을 지금 어떻게…….]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알거든.”
[……?]
“생각보다 자식들은 부모보다 강하다는 걸 말이야.”
남궁의 말에 무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믿어봐. 같은 아버지잖아.”
무휘의 마음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