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이거 가져가십시오. 기린의 가죽으로 만든 겁니다. 단단하고 가볍죠. 인간에 맞게 외형도 바꿨으니 입기 편하실 겁니다.]
규류는 품 안에서 깔끔하게 접은 코트를 꺼내 남궁에게 건넷다.
살짝 적빛이 도는 짙은 갈색의 코트였다.
“이걸 왜?”
[그냥 받아 두십쇼. 아버님의 목숨을 구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라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코트를 남궁에게 밀어 넣는 규류를 보며 무휘의 일은 그저 핑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린은 야차계에서도 보기 힘든 영물이었다.
백이면 백 ,이번에 거인계를 손에 넣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무휘에게 하사받은 것일 것이다.
“역시 넌 착한 놈이라니까.”
[……됐거든요. 살아오시기나 하십시오. 기린은 죽기 전에 꼭 자신의 둥지에 한 번 더 돌아오거든요.]
“설마 그런 의미로 주는 거야?”
[아닙니다!]
규류는 도망치듯 황급히 떠났다.
검묘의 입구에 선 남궁은 코트를 들고서는 피식 웃고 말았다.
넘버링 없음.
이름 : 규류의 특제 코트
등급 : 레어(최고)
▶ 야차 일족의 영수인 기린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직접 개조해 만든 코트.
▶ 3등급 독 내성을 가진다.
▶ 5등급 치유 효과를 가진다.
▶ 일시적으로 발화(發火)하여 주위를 태운다.
화르르륵……!!
남궁이 코트를 걸치는 순간 코트의 끝에서 불꽃이 일었다. 마치 기린이 내뿜는 불꽃처럼 코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닌 샛노란 화염이었다.
“기린은 영물이라 놈이 뱉어내는 화염은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남궁은 어째서 규류가 이 코트를 자신에게 준 것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재밌는 녀석이라니까.”
그는 피식 웃으며 검묘의 입구를 바라봤다.
[멈춰라.]
을씨년스러운 묘의 입구에 서 있는 두 개의 커다란 장승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아마도 규류의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문지기들이 틀림없었다.덜렁대 보여도 제2위계인 규류는 야차 일족 내에서도 실력자였다.
“야차 일족의 수장, 무휘의 인가를 받았다.”
남궁은 작은 펜던트를 들어 장승들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를 가로막은 둘은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검묘는 인간이 들어갈 수 없다.]
그들은 기계 같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남궁을 향해 경고했다.
“흠, 역시. 있어도 별반 다르지 않네.”
남궁은 확인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펜던트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퍼억---!!!!
그리고 장승의 머리를 후려쳤다.
* * *
“엄마를 만났냐고?”
야차계로 떠나기 전 훈련장에서 소민은 남궁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만나지 못했어.”
화르륵……!!
소민이 요정을 불러냈다.
하지만 일전에 소환했던 세계수의 요정이 아닌 물망초의 요정들이었다.
“사실 내가 계약한 요정은 얘네들이야.”
“위그라시온이 아니라?”
“응. 마족들 앞에서 거짓말을 한 거지. 녀석들이 겁을 먹도록 말이야. 마왕도 속아 넘어가던걸.”
그녀는 으쓱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도 속여야 하는 법!”
남궁은 딸에 말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빠한테까지 비밀로 할 필욘 없어. 그런데 그럼, 그때 소환된 위그라시온은 어떻게 된 거야?”
“아빠가 준 씨앗을 세계수의 지팡이에 사용한 건 맞아. 그녀는 계약과는 별개로, 자신의 의지로 나를 도와주기로 했어.”
“흐음…… 다행인걸. 네가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아마 안타까워하는 게 더 맞을 것 같긴 하지만.”
“안타까워해?”
씁쓸한 표정으로 남궁의 말에 대답하는 소민을 보며 그가 되물었다.
“씨앗이 위그라시온을 깨웠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그녀는 힘을 사용할 수 없어. 육체는 부활했지만 이미 요력은 사라진 지 오래니까. 현세에 힘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매개체가 필요했어.”
“설마…….”
“응. 맞아. 지팡이의 주인인 나지.”
“…….”
남궁은 딸의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미 아내의 영혼으로 소민이의 몸은 물이 가득 찬 위태로운 그릇과 같았다.
쿠후란 덕분에 간신히 조율이 되고 있는 상태인데, 그 위로 위그라시온이라는 엄청난 영혼을 붓게 된다면 그릇은 넘치다 못해 깨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엄마의 영혼이 위그라시온에게 간 거야. 요력 대신 엄마의 영력이 그녀의 힘을 되살아나게 해줬지.”
“그래서 위그라시온의 얼굴에 엄마의 얼굴이 보였던 거구나. 그럼…… 지금 엄마의 영혼이 그녀에게 담겨 있는 거니?”
“아니. 엄마는 여전히 내게 있어. 단지 힘을 빌려준 것뿐이니까. 그래도 영력을 나누게 된 덕분에 나도 더 몸이 가벼워졌어.”
“다행이다…….”
남궁은 딸의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아내의 영혼을 담을 새로운 그릇을 찾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딸과 함께 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간절했다.
“그럼……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
“뭔데?”
“위그라시온을 소환해 줘.”
“에이, 뭐야.”
소민은 별것 아닌 일을 왜 그렇게 심각하게 말하냐는 듯 웃으며 지팡이를 쥐었다.
우우우웅…….
그녀가 마력을 지팡이에 머금자 화려한 빛과 함께 위그라시온이 나타났다.
“전력을 다해서 공격해 봐.”
“……엑? 왜?”
하지만 두 번째 요구를 들었을 때 소민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우리 딸뿐이거든.”
남궁은 그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아빠보다 강한 사람은.”
“피…… 농담도.”
하지만 소민은 남궁의 말이 싫지만은 않은 듯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간다?”
“……!!!”
그 순간 엄청난 마력이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카릉-
그때였다.
남궁의 손목에 감겨 있던 사슬이 가볍게 떨렸다.
“역시.”
콰아아아아앙---!!!!
요란한 폭음과 함께 성채가 흔들렸다.
* * *
“후우…….”
남궁은 산산조각이 난 장승들 위에 서서 흐트러진 코트를 바로잡았다.
카르르릉…….
그의 손목에 감겨 있던 사슬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부서진 장승들을 휘감으며 뭔가를 찾는 듯 보였다.
파슥-!!
사슬이 부서진 장승의 잔해 속에서 뭔가를 찾아 휘감았다.
장승의 핵이었다.
핵은 아직 소멸된 것이 아닌 듯 힘겹지만 옅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슬이 핵을 부수자 새하얀 연기와 함께 핵이 사라졌다.
츠르릉…….
이렇다 할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사슬은 남궁에게 더 먹고 싶다고 말하는 듯 가볍게 흔들렸다.
“이제 한 가지는 확실해졌군.”
남궁은 확인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사슬은 자기 방어 능력이 있다.’
마왕과의 일전에서 위기의 순간에 사슬이 마왕을 공격했던 것을 떠올렸다.
지금까지는 잠들어 있었던 사슬이 어째서 갑자기 움직인 걸까.
그는 4번째 문을 닫고 난 뒤 여러 가지 방면으로 사슬의 조건을 생각했다.
지금까지 잠들어 있었던 사슬이 움직였다는 건 지금까지는 없었던 변화가 마왕과의 전투에서 생겼다는 것.
그건 위기였다.
마왕과의 전투는 그야말로 죽음의 문턱에 닿았을 만큼 격렬한 전투였다.
그 순간 사슬은 남궁을 보호하려는 듯 마왕을 공격했었다.
‘사슬은 내가 죽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조금 달랐다.
미묘하지만 그를 보호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 더 강했다.
마치 숙주가 죽으면 자신도 죽기 때문인 것처럼.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규류조차 이기지 못했던 검묘의 문지기를 남궁은 산산조각 내버렸다.
다만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대전에서 30만 마리가 넘는 마족들과 대치했을 때는 사슬이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슬이 반응을 한 건 마왕과 위그라시온, 그리고 지금으로 도합 세 번이었다.
‘그때도 죽을 뻔했는데…….’
남궁은 자신의 손목에 감겨 있는 사슬을 바라봤다.
“놈들이 날 죽일 만큼 강하지 않다는 뜻이냐.”
사슬에게 인정을 받아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남궁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30만이 넘는 마족들에겐 반응도 없던 녀석이 고작 무덤의 입구를 지키는 장승에게 반응하다니…….”
문지기들이 사라지고 난 뒤 서서히 열리는 검묘의 문을 바라보며 남궁은 중얼거렸다.
저 안에 얼마나 대단한 괴물들이 있는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저벅- 저벅- 저벅-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이 말하듯 고민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건 머리가 아닌 몸이 하는 것이었으니까.
* * *
촤르르륵……!! 퍽!!!
검묘에 들어선 순간부터 사슬이 날뛰듯 요동치며 남궁을 향해 날아오는 파수꾼들을 부숴대기 시작했다.
[캬악!!! 크아아악!!!]
돌을 깎아 만든 조각상들은 인간의 형태부터 동물의 형태까지 다양했다.
하나하나가 당장에라도 남궁을 죽일 듯 매서운 일격을 뿜어냈다.
“흠…….”
하지만 남궁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마물들을 향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가 오히려 사슬을 더 날뛰게 만들었다.
‘이곳을 내가 찾았을 땐 전생에 무휘가 죽고 난 이후였으니…… 족히 십수 년을 살아남았었다. 무기도 그렇고 강함으로 따지자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겠지.’
그런 수준이었지만 검묘는 공략은커녕 입구에서 포기하고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난이도가 높다는 뜻은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의 자신은 검묘의 파수꾼 한 마리도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방심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즉사(卽死).
그렇기에 사슬은 더욱 필사적으로 그를 보호하고 있으니 남궁으로서는 우스울 따름이었다.
“10분인가.”
외길을 걸어가던 남궁은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앞에는 거의 부서져 가는 낡은 팻말 하나가 걸린 작은 사당이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삼 일을 헤맸었는데…….”
솨아아악……!!
그가 팔을 휘젓자 사당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안개들이 도망치듯 흩어졌다.
놀랍게도 안개가 사라지자 사당과 검묘의 입구는 기껏해야 100미터도 되지 않았다.
“이게 이렇게 짧은 길이었다니 말이야.”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파스슥…….
안개가 사라지자 사당에 걸려 있던 팻말이 부서지듯 내려앉았다.
“…….”
다른 건 몰라도 사당의 부서진 팻말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이 문턱을 넘지 못한 채 포기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키에에에에엑……!!!!]
그 순간,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사당의 문이 열리자, 묘를 지키는 석상들이 나타났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붉은 안광을 뿜어내는 야차들이 나타났다.
살아 있는 듯한 모습.
하지만 남궁은 그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곳은 역대 야차 일족의 수장들이 사용했던 모든 무기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영혼은 기억을 투영하기에 무구에 잠들어 있던 영혼들은 그야말로 역대 수장들의 역량과도 같았다.
쿵-
사당의 문 앞에 남궁의 2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야차가 걸음을 내디디며 나타났다.
“무량…….”
일족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장.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주위로 다른 수장들의 영혼들도 나타났다.
“야. 여기서 저 녀석들처럼 평생 갇혀 지내고 싶지 않으면…….”
전생의 자신을 도망치게 만들었던 원흉들의 모습을 보며 남궁은 차갑게 말했다.
“날 지켜.”
크릉…….
남궁의 말에 어쩐지 못마땅하다는 듯 사슬이 부딪히며 그르렁거렸다.